국립서울현충원 전경. 마치 군인이 계급별로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다. ⓒ시사IN 신선영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일부입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은 삶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터부와 혐오를 넘어 우리의 일상과 공동체를 ‘죽음’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는 새 연재 ‘죽음과 마주하며’를 시작합니다. 죽음을 둘러싼 국가와 개인의 관계, 관련 정책, 불평등 문제를 두루 살펴봅니다. 필자인 송병기 선생은 노화·돌봄·죽음을 연구하는 의료인류학자로 프랑스·모로코·일본·한국에서 현장 연구를 해왔습니다.

지난봄 오랜만에 찾은 현충원은 만개한 꽃과 싱그러운 녹음으로 가득했다. 동행한 친구는 ‘서울에 이런 장소가 있었느냐’며 마냥 신기해했다. 군데군데 놓인 기념 조각상 사이로 걷다 보니 국방부 중앙감식소에서 군복무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자부심이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찾는 일에 미약하나마 힘을 보탠다는 마음이었다. 조부모 세대가 겪은 난리와 고초를 책이 아니라 현장과 유해를 통해서 ‘피부’로 느꼈다. 바스러진 유해를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아픔과 부채 의식이 밀려왔다.

유해발굴감식단에는 유능하고 사명감 넘치는 동료들이 많았다. 시간이 나면 그들과 고요한 현충원을 거닐었다. 묘지에 묻힌 영령들의 명복을 빌었고, 오늘의 평화에 감사했다. 하지만 공간이 드러내는 정치군사적 위계질서는 마음 한켠을 불편하게 했다. 묘역 배치는 철저히 ‘차별적’이다. 서울 동작구 서달산 일대에 조성된 현충원은 마치 군인들이 계급별로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다.

가장 높은 곳에는 국가원수 묘역이 있고, 그 아래 장군, 장관급 묘역, 또 그 밑에 영관급, 위관급 묘역, 제일 아래에 사병 묘역이 있는 식이다.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경찰관, 일반, 외국인 묘역은 따로 구분되어 있다.

현충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의 웅장한 묘소(580m², 약 170평), 그 아래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363m²),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264m²), 김영삼 전 대통령 묘소(258.5m²)가 자리한다. 반면 장군 묘역은 약 8평이고 사병 묘역은 약 1평에 불과하다. 사병 묘역에는 봉분도 없다.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나 유럽의 여타 기념묘지의 ‘평등한’ 묘역 배치와는 확연히 달랐다. 헌법을 사회의 근간으로 삼는 민주공화국의 묘지와 현충원은 거리가 있어 보였다. 더욱이 한국전쟁은 군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 희생을 동반한 비극이었다.

2018년 7월27일,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미군 유해 55구를 송환했다. 정전협정 기념일이었던 이날, 미 공군 수송기는 원산에서 유해가 담긴 관을 싣고 귀환길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해 송환을 결정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트위터로 감사를 전했다. 백악관 대변인 역시 한반도 비핵화로 가기 위한 북한의 긍정적 행동에 경의를 표했다. 북한의 유해 송환은 그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외교부도 이 송환이 유가족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조치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 구축에도 기여할 것이라며 환영했다. 더불어 남한과 북한은 비무장지대 내 유해 발굴을 통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로 약속했다. 이 협정은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한편 대한민국 국방부는 국내에서 발굴된 중국군(혹은 중공군) 유해 20구를 송환했다.

왜 굳이 각국 정부는 60년 넘게 산야에 묻혀 있던 유해를 발굴하고, 감식하고, 어딘가로 이동시켰을까?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듯 유해는 ‘주검을 태우고 남은 뼈. 또는 무덤 속에서 나온 뼈’일 뿐이지 않은가. 뼈는 ‘척추동물의 살 속에서 그 몸을 지탱하는 단단한 물질. 표면은 뼈막으로 덮여 있고, 속에는 혈구를 만드는 골수로 채워져 있는’ 물질일 뿐인데 말이다. 각국 지도자들이 이러한 ‘과학적 지식’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상당한 시간과 예산을 써가며 온전하지도 않은 사람 뼈에 집착했을까? 전사자 유해가 물리적·생물학적 설명을 넘어서는 어떤 의미와 쓰임새가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해, 유해는 가히 한반도 평화의 꽃이라 부를 만했다. 유해는 죽어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용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해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군 수송기를 타고 국경을 가로지르고, 살아 있는 자를 고무하고, 한반도 비핵화 작전에 참여하고, 남북 간의 군사 충돌을 예방하며, 국제 정세 안정에도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 전사자 유해를 둘러싼 각국 정부의 메시지와 행동을 보고 있자면 죽음 이후에도 사람의 특정한 정체성, 예컨대 국적, 귀속, 위계, 의무 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와 전사자(아군·적군)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국가와 비전사자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국)전쟁과 (한반도)평화에서 유해는 어떤 의미일까? 국방부 유해발굴감식 사업은 그 질문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준다.

한국전쟁 재현하는 ‘발굴 및 수습’

2000년 4월, 육군본부는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이해 한시적으로 전사자 유해발굴 및 감식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2008년 ‘6·25전사자 유해발굴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국방부는 이 사업을 영구적으로 수행할 전문기관인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했다. 2021년 4월 기준, 유해발굴감식단은 유해 총 1만2592구를 발굴했다. 그중 아군 유해는 1만967구이고, 이 중 161명만 신원이 확인됐다. 아직 13만여 명의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상황이다. 국토개발에 따른 발굴 현장 훼손, 전사(戰史) 자료의 엄밀성 여부, 유가족 유전자 시료채취(유해 DNA 대조 목적) 확보율, 참전군인과 지역 주민(유해 소재 증언)의 고령화는 이 보훈 사업의 대표적인 어려움으로 꼽힌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사업은 “현재 시간과의 전쟁”을 하고 있다. 부대훈인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는 서울현충원에 위치한 이 기관의 정체성을 집약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사망 또는 실종된 군인을 가리키고, ‘조국의 품’은 현충원(국립묘지)을 의미한다. ‘6·25전사자 유해발굴 등에 관한 법률’의 목적도 전사자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함으로써 고귀한 희생에 대한 넋을 기리고, 국민의 애국정신을 기르는 데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 일은 국가가 하는 여러 보훈 사업 중 하나로 보인다.

2018년 8월1일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에서 열린 미군 유해 송환식에서 참석자가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이 사업의 주체와 관리 체계를 살펴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선, 유해발굴감식 사업의 주체가 정부 내에서도 국방부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전사자의 유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각종 보훈 사업을 관장하는 국가보훈처가 해도 되는 일 아닐까? 또한 당시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이 참전군인뿐이었을까?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한국군 전사자 수는 약 13만명이고 실종 및 포로 수는 약 3만명이다. 이에 비해 민간인 사망자 수는 약 24만명, 행방불명 수는 무려 약 30만명, 학살자 수도 약 12만명이다. 이는 보수적 집계이며, 조사기관에 따라 민간인 희생자가 100만명이 넘는 경우도 있다. 통계수치를 놓고 보면 전쟁으로 인해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더 많이 희생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합동조사단 혹은 독립기관을 출범시켜 당시 사망 및 실종된 ‘국민’들의 유해를 찾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국방부만이 ‘전사자’의 유해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는 형국이다.

유해발굴감식은 크게 네 가지 순서로 진행된다. 첫째는 유해발굴 현장을 찾는 ‘조사 및 탐사’ 단계이다. 이때 국방부는 산하에 있는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사 자료를 분석하고, 참전군인들과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장을 정하게 된다. 주목할 점은 국방부가 발굴 터를 특정한 서사와 함께 수용하는 방식이다. 가령 2020년 10월 강원도 철원 지역 유해발굴 개토식을 다룬 언론 보도들은 이 의례의 의미와 사업의 가치를 몇 가지 단어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뜻깊고 숭고한 일’ ‘6·25전쟁 전사자 영웅들’ ‘중공군의 개입으로 6·25전쟁 기간 중 가장 치열한 시기’ ‘한 구의 유해와 한 점의 유품이라도 더 찾기 위해 남다른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무장’ 등과 같은 수사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해발굴 현장은 적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호국 영웅들의 임시 거처가 된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유해발굴 작전’을 통해 영웅들을 조국의 품(현충원)으로 귀환시켜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사에서는 지역민들의 당시 일상, 군인보다 훨씬 더 컸던 민간인 피해 정보는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한국전쟁 당시 이 땅에는 군인 간의 전투만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더욱이 이 서사 구조는 참전군인들의 ‘관계’에도 주목하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됐던 전쟁기념관 조형물 ‘형제의 상’처럼, 한국전쟁 당시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한 가족 내에서도 형제가 국군과 인민군으로 갈려 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전쟁 당시 마을 공동체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전선에 따라 국군 가족, 친지, 협조자와 인민군 친족, 부역자로 나뉘어 처참하게 붕괴됐다. 즉 한국전쟁을 단순히 전장에서 벌어진 국군과 인민군의 대결로만 보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 서사 구조는 전사자를 국민의 본보기로 만드는 한편, 이념이 초래한 국가(군인·경찰)의 민간인 학살, 마을공동체 내 친족과 이웃들 간의 무참한 폭력에는 주목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렇듯 국방부의 조사 및 탐사 과정은 유해발굴 현장을 사람들의 일상에서(친족·집·마을) ‘이탈된 땅’이자 호국 영웅들을 조국의 품으로 옮기기 위한 ‘그라운드(근거)’로 전환한다.

다음 과정은 그 특정한 발굴 현장과 서사를 유해 및 유품이라는 물질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발굴 및 수습’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실무적 차원에서 보면, 전사자 유해발굴은 현장에 대한 사전조사 수준, 인력, 기간 등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지휘자 역할을 맡고, 해당 지역 인근에 있는 부대 장병들이 발굴에 동원된다. 이때 발굴 인력들의 주요 업무는 인골 찾기, 임시 피아식별, 유해를 오동나무 관에 넣기, 현장 영결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발굴지에서부터 유해, 유품 그리고 조사 자료를 취합하여 아군(한국군과 유엔군)과 적군(북한군과 중공군)을 분류한다. 아군이 담긴 오동나무 관은 태극기(유엔군은 유엔기)로 포장되어 영결식의 대상이 되지만, 적군이 담긴 관은 하얀 천으로 포장되어 정적에 잠긴다. 향후 정밀 감식을 통해 아군은 현충원(유엔군은 송환)에 안장되고, 적군은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에 묻힌다. 한국전쟁 당시 국제 정세가 현재에도 유해를 통해 물리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발굴 및 수습이 일단락되면 좀 더 정확한 감식을 위해 유해를 서울 현충원에 위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로 봉송한다.

반공으로 채워진 이승만 현충일 추념사

중앙감식소의 핵심 업무는 유해의 신원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이 ‘신원확인’ 단계는 법의학의 역할과 비슷하다. 국방부 중앙감식소 감식관들은 3D 스캐너, 치아 엑스레이, 비교분광기 등의 첨단 장비를 이용해 유해의 성별, 연령, 인종, 유품 등을 분석한다. 또한 유해와 유가족 유전자 비교를 통해 신원 확인의 엄밀성을 확보한다. 국방부는 중앙감식소 내 모든 유해에 바코드를 부여해 정보를 전산으로 기록하고 관리한다. 이러한 근거 중심의 감식 과정은 유해의 또 다른 탄생과 삶을 예고한다.

2018년 10월25일 강원도 철원 화살머리고지에서 유해발굴감식단이 국군 유해를 발굴·수습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국방부는 신원확인 결과에 따라 각 유해의 지위에 적합한 조치를 취한다. ‘후속조치’는 이 보훈 사업의 마지막 단계이다. 예컨대 감식 단계에서 한 유해가 아군으로 판정되고, 더 나아가 신원까지 확인되면 그 유해의 지위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그때부터 유해는 더 이상 산야에 묻혀 있던 그냥 뼈가 아니다. 국방부는 이 사실을 유가족에게 통보한 뒤, 유가족 자택에서 ‘호국의 영웅 귀환식’을 실시한다. 이 의례에는 유해발굴감식단장, 군 지휘관, 지자체 및 보훈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그 후 유해는 소속 군 참모총장 주관으로 현충원에 안장된다. 아군 판정 및 신원 미확인 유해는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현충원 합동 봉안식을 거쳐 중앙감식소에 보관된다. 특히 국민의 대표이자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와 한국전쟁 기념행사에서 전사자 유해에 경의를 표함으로써, 일련의 호국 영웅 귀환식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군 유해는 현충원에서 국민이 보고 믿고 따라야 할 자랑스러운 호국 영웅으로 ‘부활’하며,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국가는 사후 신원 확인을 통해 전사자를 ‘신성한’ 조국의 품에서 살게 하거나 그 밖으로 내쫓는다. 전사자 유해발굴감식 과정은 세속국가 내 ‘과학’ ‘종교’ ‘정치’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으로 볼 수도 있다.

여타 법의학 기관과 달리 국방부에서 유해는 법적 인격(자연인)뿐만 아니라 상징적 인격(호국 영웅)도 부여받는다. 이때 한 개인의 몸(유해)은 국가의 특정한 정치적 이념과 규범이 각인된 장소가 된다. 여기서 ‘호국’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적을 전제로 성립되는 단어다. ‘영웅’이라는 말 역시 ‘공산주의자’로 불리는 적에 맞서 ‘조국’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군인을 의미한다. 고 조영환 하사의 귀환을 다룬 2017년 1월 〈서울신문〉 기사 내용은 이를 잘 보여준다. “1950년 8월 수도사단 17연대에 배속돼 참전한 고인은 경북 포항 일대에서 북한군 12사단과 치열한 교전 중 전사… ‘6·25 호국 영웅’ 故 조영환 하사 귀환”처럼 유해는 한 자연인이기보다는 국군, 장교, 부사관, 병사, 계급, 소속, 전투, 임무 등으로 구성된 특정한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갖게 된다. 이렇듯 ‘후속조치’ 과정은 유해발굴감식 사업의 당위성(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개인과 그 개인의 희생에 책임지는 국가의 윤리적 실천)을 일련의 의례를 통해 응집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게 전사자 유해는 국가에 ‘귀속’된다.

현충원의 시작은 국군묘지였다. 1956년, ‘조국’을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운 군인들과 그 관계자들만 안장될 수 있는 국군묘지가 서울 동작동에 문을 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이승만 정권은 이념적 대립 구도(특히 반공주의)에 기반한 체제 정당성을 공고히 했다. 국군묘지는 그 이념적 기준에 따라 조형된 ‘국가와 국민’이라는 관념을 사람들이 보고 믿을 수 있는 장소로 조성됐다. 특히 1956년 제정된 현충일은 전사자 유해와 국군묘지를 중심으로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의례였다. 이승만의 현충일 추념사는 반공 군인들의 희생, 충혼, 호국 정신을 부각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국군묘지는 한반도의 양극적 정치체제, 전사자 유해, 현충일, 특정한 정치세력에 의해 ‘조국의 품’이 되어갔다.

박정희 정권은 국군묘지를 국립묘지로 개명했고, 문민정부 들어 국립묘지의 이름은 또다시 현충원으로 바뀌었다. 현충원을 둘러싼 국가 상징, 정체성, 기억 만들기는 오늘날 전사자 유해발굴감식 사업을 둘러싼 ‘서사’와 연결된다. 정부(그중에서도 국방부)가 국가의 입장에서 가치 있고 기억해야 할 ‘공적인’ 죽음을 국군 전사자로 특정함으로써, 그 경계 밖에 위치한 사람들의 죽음, 폭력, 관계는 침묵 속에 잠긴다.

한국전쟁에 관한 국가주도형 기억과 기념은 평화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공동체 내 진실 규명, 반성, 화해의 과정에 눈을 돌리기 어렵게 만든다. 그 지난한 과정이 없다면 아무리 종전선언을 하고, 아군 유해를 찾고, 적군 유해를 송환한다고 해도 ‘온전한’ 평화가 도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전쟁으로 인해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던 이들의 일상, 기억, 서사를 공적 세계로 불러낼 수는 없을까? 전사자 유해뿐만 아니라 제주도·여수·순천·영광·강화도·경산·고양·거창 등지에서 학살당한 민간인 유해도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국립묘지 현충원의 위계적 배치에 대해서도 토론을 시작할 때다.

참고 문헌:〈전쟁과 가족〉 권헌익·창비·2020, 〈한국 현대사와 국가폭력〉 김상숙 외·푸른역사·2019, 〈죽은 자의 정치학〉 하상복·모티브북·2014

기자명 송병기 (인류학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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