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a

나이 듦, 질병, 돌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도 없다. ‘존엄한 죽음’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시사IN〉은 의사·의료인류학자·환자·보호자·간병인 등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의식과 목소리에서 출발해 ‘죽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현장까지 두루 살펴봤다. 기사는 총 5회 연재된다.

① 당신은 어디에서 죽고 싶습니까
② ‘아픈 몸’을 거부하는 사회에게
 
- ‘아픈 몸’도 아픈 대로의 삶이 있음을
③ 의학은 돌봄을 가르치지 않았다
  - “환자 집에 가면 질병이 작아 보여요”

④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돌봄으로부터
⑤ 죽음의 미래를 찾아서

 

스무 살 무렵에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30년 넘는 세월을 가로지른 어느 날, 그보다 더 깊고 간절하게 ‘엄마처럼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죽음과 삶에 관해 단 한 가지도 결정할 수 없는 무력한 몸이야말로 이른바 ‘백세 시대’가 드리운 그늘이었다.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라서〉(한겨레출판, 2020)는 저자 권혁란씨의 ‘개인사’인 동시에 자연사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연결되기 위해 썼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콘센트에 휴대전화 충전기를 꽂고 하염없이 ‘좋은 죽음’과 ‘연명치료’와 ‘존엄사’ 따위를 검색하며 눈물짓고 있을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성실하게 늙어가는 자신의 몸 역시 두려웠다. 엄마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늙으면 다 아프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던 말이 떠올라 스스로를 찔러댔다.

늙음만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건 아니었다. 조한진희씨는 30대 중반 원인불명의 질병과 연이어 찾아온 암을 경험하면서 길어 올린 질문들을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동녘, 2019)를 통해 세상에 돌려준다. 건강을 추구해야 하고 질병은 퇴치해야 하는 이분법적인 세계에 ‘질병권(아플 권리)’이라는 새로운 권리를 디딤돌처럼 놓았다. 아픈 사람을 빨리 회복시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아픈 상태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다양한 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정상’의 몸들도 질병이나 장애, 노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좀 더 자유로워진다.”

건강한 몸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아픈 몸은 열등해진다. 질병은 병원으로, 요양원으로, 그 밖의 각종 시설로 ‘처박힌다’. 그 풍경의 일부인 가난하고 아픈 아버지는 사실 가난해서 아팠다. 조기현씨는 20대의 많은 시간을 가난과 질병을 증명하기 위해 허비해야 했다. 조씨가 쓴 〈아빠의 아빠가 됐다〉(이매진, 2019)는 한 사회의 가난과 불평등이 개인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진단서이기도 하다.

한 사회가 ‘아픈 몸’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죽음의 미래를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질병은 죽음을 이해하는 소중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권혁란, 조한진희, 조기현, 김호성(연세메디람 호스피스전문센터 진료과장), 송병기(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연구원) 다섯 사람이 모여 그 단서의 일부나마 더듬어보고자 했다. 질병과 죽음에 관한 각자의 내밀한 경험이 더 많은 보편의 이야기로 나눠질 때, 삶도 조금은 덜 잔인하게 된다.

코로나19 고위험군 중 하나가 기저질환자입니다. ‘아픈 몸’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코로나19가 엎친 데 덮친 격은 아니었을까요.

조한진희:코로나19 이전에도 질병으로 인한 체력 문제로 일주일이면 2~3일밖에 외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 일상 자체가 크게 변하지는 않았어요. 물론 변화가 아주 없는 건 아니죠. 제 상황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드디어 질병과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부자유한지 직간접으로 경험하게 됐으니까요(웃음).

조기현:사회 구성원들이 코로나19를 계기로 질병·돌봄·죽음에 대해서 터놓고 이야기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최근 저처럼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을 전담하는 청년들을 만나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화기애애했던 사전 인터뷰 과정이 실제 사례 인터뷰까지 잘 이어지지는 않더라고요. 표준이나 평범에서 멀어진다는 낙인에 대한 압력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겠죠.

ⓒ연합뉴스마스크 착용 의무화 계도기간 첫날인 10월13일 서울 잠실역에서 출근길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 돌봄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권혁란:백세 시대 ‘유병장수’ 하는 부모를 돌봐야 했던 처지에서 다른 사람들은 부모의 임종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보호자로서 정말 궁금했어요. 엄마가 요양원·요양병원·중환자실·집중치료실을 오가는 동안 수많은 언론 기사를 찾아봤는데, 매번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요양시설에서 벌어지는 각종 학대 얘기가 다수니까요. 얼마나 비리가 많은지, 환자를 어떻게 함부로 대하는지…. 요양시설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환자는 자기가 버려졌다 생각하고, 보내야 하는 보호자는 죄의식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휠체어, 기울기가 조절되는 침대, 안전바 같은 것들이 갖춰지지 않은 집을 어떻게 요양원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엄마를 모신 요양원에서 좋은 돌봄이 이뤄지고 있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불효의 감각을 떨칠 수가 없는 거죠.

김호성:제가 있는 호스피스는 그런 면에서 극단적인 현장인 것 같아요. 더 이상 근본적인 치료가 없다고 생각하며 오는 곳인 데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결합되며 기존 의료시스템에서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아요. 그래서 저희가 그 어떤 처치보다 중요하게 하는 일이 완화 의료에 입각한 심리적 차원의 커뮤니케이션이에요. 당신은 버려지지 않았다, 의료진인 우리가 끝까지 책임을 진다…. 보호자를 향한 말이기도 하거든요. 한 사람의 말기 돌봄 기간을 당사자를 포함해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이 시간에 대한 더 많은 경험들이 나눠지면 좋겠어요.

송병기:10명 중 8명이 병원에서 사망하고 있다는 건 다시 말하면 생의 끝자락에서 의료진과의 만남을 절대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의료진 사이에서도 ‘치료’에 관련된 기준은 일종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명확한 데 비해 생의 마지막 시간을 확보하는 문제는 각자의 철학과 관점이 다르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법에서는 말기 환자를 ‘수개월 이내 사망할 것으로 판단되는 상태’로 정의하는데, 의학의 발달로 내일모레 한다는 분들도 1~2년 이상 사는 경우도 많잖아요. 지금 우리는 ‘어떻게’ 죽을지를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상 생애 말기로 가면 환자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이슈가 ‘어떻게’보다는 ‘언제’에 방점이 찍혀요. 아마 보호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그래서 언제까지 살 수 있느냐”일 겁니다. 죽음의 타이밍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치료를 집중적으로 할 건지, 호스피스 등으로 갈 건지를 ‘정치적으로’ 합의해야 하는 상황이 오거든요.

조기현:얼마 전 지역에서 무연고 노인을 돌보는 50대 여성 자원봉사자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어요. 이분들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인공장루를 달고 있는 할머니가 쓰러졌는데 요양병원에 갈 수 있는 형편이나 상황은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이 돌아가며 할머니를 돌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결국 실현이 안 됐다고 하더라고요. 왜? ‘내 부모도 잘 못 돌봐줬는데’라는 죄책감이 다들 있는 거예요. 가족 돌봄이 실제로는 어떻게 굴러가든, 이에 대한 모종의 질서와 압박은 계속되고 있는 거죠. 내가 과거에 가족 돌봄을 어떻게 수행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역량이 충분하더라도 조절하는 거예요. 돌봄이 사회화되려면 이 감각이 확장되어야 하는데, 결국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이 ‘가족이 무엇인가’이더라고요.

질병 경험이나 돌봄 경험을 사회적인 일이라기보다 ‘사적인 일’로 여기는 인식이 여전히 공고합니다.

조한진희:저는 1인 가구 여성이고 비혼주의자이다 보니 나의 노년이나 질병을 ‘가족이 돌본다’는 건 아예 전제하고 있지 않아요. 발병 초기에 함께 사는 애인이 있었어요. 그 친구가 큰 도움을 줬지만 제도적 돌봄 없이 사적인 관계 안에서만 돌봄을 책임진다는 게 서로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 경험할 수 있었어요. 코로나19를 계기로 상병수당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데 의료비 걱정 없이 병원에 갈 수 있고, 아플 때 필요한 돌봄을 받을 수 있다면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당연히 훨씬 낮아지겠죠. 아플 때 가장 큰 두려움이 통증이나 생명 위협 문제도 있지만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서 빈곤해지는 거잖아요. 관련 제도가 어떻게 갖춰지느냐에 따라서 ‘나는 절대로 아프고 싶지 않아’라는 말도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이기 때문에 생래적 두려움이 있지만, 어떤 제도를 갖추었느냐에 따라 죽음이 꼭 비극이 아닐 수도 있죠. 저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없는데, 만약 제가 하루 24시간 질병관리만 하고 살면 좀 더 오래 건강한 상태로 살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저는 ‘좀 더’ 건강해져서 70~80세까지 사는 것보다 좀 덜 건강한 상태여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60세까지 살겠다는 선택을 했거든요. 이런 선택이 한국 사회에서 잘 수용되지 않아요. 인생 가지고 도박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비난의 시선을 받기도 하고요.

조기현:아픈 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떠한지에 따라서 제 돌봄 경험도 크게 달랐을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는 지금도 분노하세요. “너 때문에 치매 검사해서 이렇게 됐다”라고(웃음). 저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서 공적제도에 병을 ‘증명’해야 하는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병을 증명받는 게 일종의 낙인인 거예요. 지금도 자기가 아프다는 걸 사람들 앞에서 절대 이야기하지 않아요. 아버지에게 아픈 몸은 쓸모없는 몸인 거죠. 아버지가 자신의 아픈 몸에서 의미를 찾아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였다면 돌봄도 지금보다는 훨씬 쉬웠겠죠.

ⓒ시사IN 조남진‘죽음의 미래’ 두 번째 방담 참석자들. 왼쪽부터 송병기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연구원,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저자,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자,권혁란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저자, 김호성 연세메디람 호스피스전문센터 진료과장.

한국의 경우 환자가 호스피스 병실에 머무르는 평균 기간이 약 20일로 짧은 편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말기 돌봄 기간을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김호성:굉장히 소중한 시간인데 생각처럼 의미 있게 보내지는 못하세요. 성별 차이도 없다고 할 수는 없고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가 있어요. 임종과 관련된 극단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 상황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정 단계가 있고, 그다음이 분노-협상-우울-수용을 거친다는 건데 사람마다 강하게 경험하는 감정이나 순서는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특징적으로 아버님들은 부정을 강하게 경험하세요. 그에 비해서 어머님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수용하시는데, 다만 다른 사람을 걱정하느라 그 시간을 잘 못 보내요. 주로 자식이나 남편이죠. 제가 어머님들에게 자주 얘기하는 게 “어머님이 이기주의자가 돼야 한다”거든요. 아버님들에게는 이런 얘기 안 해요. 할 필요가 없어요(웃음).

조한진희:우리가 요양시설 하면 흔히 ‘노인의 마지막 집’ 같은 문구를 쉽게 떠올리지만 요양시설 이용도 여성들이 훨씬 적극적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할 것 같아요. 4050 세대 중년 여성, 특히 암 환자의 경우 수술 후나 항암 과정에서 운신이 가능해도 요양원에 들어가는 걸 선호하거든요. 요양원에서는 집안일을 안 해도 비난받지 않으니까요. 일단 집에 가면 ‘아픈 나’만 돌볼 수가 없는 거예요. 돌봄이 성별화돼 있어서 그래요. 통계로도 확인이 되는데 단적으로 남성 노인이 아플 때는 아내가 돌보고, 여성 노인이 아플 때는 딸이 돌봐요. 여성 노인이 아플 때 남편이 돌보는 경우는 10%나 되려나요.

조기현:돌봄과 젠더가 교차하는 지점이 생각보다 복잡한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경험했듯이 남성이 돌봄의 주체가 되면 이른바 가부장적 가치를 떠받치고 있는 남성성이 해체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는 이게 오히려 강화되는 경향도 있더라고요. 아픈 가족을 성실하게 잘 돌보고 있는 남성 ‘영 케어러(young carer)’였는데 돌봄을 통해 가족 내에서 권력을 갖고 일종의 통치자 역할을 하는 거예요. 가족 안에서 ‘효’ 같은 가치를 계승하는.

이른바 ‘질병권’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논의들이 좀 더 이뤄지면 좋을까요.

조한진희:일상적인 요양 공간에 대해서 우리가 더 많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요양시설을 중증환자만 간다고 제한해서 생각하지 말고요. 이를테면 제가 다리를 다쳤다고 해봐요. 저희 집이 엘리베이터 없는 주택 3층이거든요? 이럴 때 갈 수 있는 돌봄 공간이 동네마다 있으면 어떨 것 같으세요? 의사들은 입원할 정도는 아니니 집에서 잘 쉬라고 퇴원시키지만 집에서 잘 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나이가 젊든 많든 집에서 혼자 잘 쉴 수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극단적 돌봄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일상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공공 단기 요양원이 마을마다 있다면 그거야말로 돌봄의 사회화가 아닐까요. 저는 죽음도 집이 아니라 호스피스 요양원에서 맞이하고 싶거든요. 돌봄도 그렇고, 죽음도 지금보다 가벼워지려면 이런 ‘다양한 집’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각자 세계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잖아요. 그건 죽음에 대한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고요. 결국은 선택지를 많이 만들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닐까 싶어요.

조기현:질병이 병원, 요양원 같은 시설에 처박혀 있잖아요. 제가 목격한 질병과 죽음의 풍경은 그랬어요. 딱 두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어요. ‘절대 아프지 말아야지’ ‘혹시 아프면 존엄사 가능한 스위스에 가야지’. 저만이 아니라 젊은 친구들이 많이 하는 말이에요. 요즘 기후위기 때문에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더라고요. 그 표현이 질병과 죽음에 대한 논의나 관련 제도를 정비할 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학교에서도 죽음 교육을 했으면 좋겠는데, 별도로 신설할 게 아니라 기존 민주시민 교육 안에서도 충분히 커리큘럼을 짤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자명 정리·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