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평소에 무연고 노인들에게 무심하지만 생명이 위험할 때는 적극 관여한다.ⓒ시사IN 자료

노숙 생활을 하던 노인들은 응급실에 실려 가기 전까지 ‘갈 데 없는 삶’을 살았다. 사회 어디에도 이들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관계망이 없었다. 실업, 파산, 빈곤, 고령, 질병 등이 그 이유다. 그랬던 이들의 삶은 ‘응급 상황’에서부터 변한다. 길에서 쓰러진 이들은 누군가의 신고로 응급 환자가 되면 그때부터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의 대상이 됐다. 이 법은 응급 환자를 ‘질병, 분만, 각종 사고 및 재해로 인한 부상이나 그 밖의 위급한 상태로 인하여 즉시 필요한 응급처치를 받지 아니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거나 심신에 중대한 위해(危害)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환자 또는 이에 준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에 대해서도 ‘모든 국민은 성별, 나이, 민족, 종교, 사회적 신분 또는 경제적 사정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하고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도 또한 같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갈 데 없었던 노인들은 응급 상황에서 국가의 ‘무차별적 환대’를 받게 된다. 다시 말해, 응급 상황에서 국가는 한 개인의 몸을 일시적이나마 ‘점유’한다.

한 종교 재단이 운영하는 무연고자를 위한 요양원을 살펴본 적이 있다. ‘응급 환자가 아니면서 응급 환자인’ 이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장소였다.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입소 노인들은 대개 노숙 생활을 하다가 행려병자로 발견되어 응급실에 실려 갔고, 중환이 아닌 ‘노환’을 앓고 있어서 해당 복지시설로 오게 됐다. 입소 경로에서도 특히 응급실 전후 상황 변화가 눈에 띄었다. 보통의 경우와 달리 이들에게는 응급적 환대가 종료되지 않고 일상적인 형태로 지속됐다. 이들은 경찰 및 119 구조대를 통해 응급실에 들어왔다. 그렇게 응급실에 오게 된 사람은 대개 보호자(혹은 가족)와 연락이 닿고 몸이 회복되어 퇴원하거나, 더 큰 치료가 필요하면 입원을 결정하며 응급 상황이 종료된다. 하지만 무연고 노인의 경우는 ‘애매’하다.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신원을 밝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병원 원무과는 이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지어준다. 문제는 집중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지만, 퇴원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경우이다. 다시 거리 생활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노인들이다. 의학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더 이상 응급 환자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는 생명을 보존할 수 없거나 심신에 중대한 위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응급 환자’로 간주된다.

이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해당 노인 요양원에서 영양 및 수분 섭취, 그리고 이동에 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중환자’로 분류된다. 시설 관계자는 이들에게 ‘콧줄’이라 불리는 비위관 삽입(L튜브:Levin tube insertion)을 실시한다. 노인들은 더 이상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영양 공급을 받는 와상 환자가 되어 10년 정도 살다가 죽음을 맞는다. 이들의 사회적 관계는 간호사와 요양보호사의 업무로 치환된다. 이러한 의료 행위는 입소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행해진다. ‘신성한 생명’이라는 이 종교 재단이 표방하는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기력이 떨어진 노인이 자신에게 행해지는 의료 행위가 연명의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물론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이 있다. 하지만 이 법을 무연고 노인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맹점은 이 법이 연명의료를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도, “영양분 공급, 물 공급, 산소의 단순 공급은 시행하지 아니하거나 중단되어서는 아니 된다(제19조 2항)”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법을 임종기가 어느 정도 예측이 되는 말기암 환자가 아닌 다른 만성질환자, 특히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있는 노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또 다른 허점은 무연고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사실상 연명의료를 중단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 법률 제18조는 만약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 친족이 그 결정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법은 그 친족의 범위, 권리, 의무를 차등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배우자, 1촌 이내의 직계 존속·비속, 2촌 이내의 직계 존속·비속, 그리고 형제자매 순이다. 무연고 노인과 개인적 친분이 있더라도 친족이 아닌 ‘제3자’는 연명의료 결정과 관련해 어떠한 발언도, 개입도 할 수가 없다.

이처럼 갈 데가 없었던 노인들은 길에서 쓰러진 이후로 줄곧 ‘생명 보호’를 받는다. 국가는 평소에는 이들 삶의 조건에 무심하지만, 생명이 위험할 때는 적극 관여한다. 문제는 무연고 노인의 몸을 둘러싼 선언적 가치와 일상적 실천 간의 괴리다. 요양원에서 무연고 노인들의 ‘생물학적 생명’은 법적으로 철저한 보호를 받지만, 이들의 ‘서사적 삶’은 시설의 관리체계 속에서 탈각된다. 즉 입소자들 생의 끝자락과 죽음은 인간적 존엄이 증발하고 법적 틀거지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한국의 의과대학은 해부용 시체를 행려병자나 무연고 사망자에게 의존해왔다. 기증자가 늘면서 더 이상 무연고 시신이 필요하지 않게 됐다.ⓒ시사IN 이명익

2021년 3월28일자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2020년 전국 무연고 사망자 수는 2880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남성이 2172명이고, 60세 이상이 1797명이었으며, 40세 미만도 97명이나 됐다. 무연고 사망과 마찬가지로 고독사한 사람도 2016년 1820명에서 2019년 2536명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무연고사와 고독사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개념을 간략히 정의해보면 이렇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무연고 사망은 ‘장례 시점’에서 법이 규정한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를 파악할 수 없거나, 연고자가 시체 인수를 거부한 죽음을 뜻한다. 한편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고독사는 ‘사망 시점’에서 홀로 사망하고 일정 기간이 흐른 뒤에 발견된 죽음을 가리킨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병원에서 임종한 무연고자는 고독사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고독사했더라도 시신을 인수할 연고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무연고 사망자가 아니다. 물론 중요한 점은 무연고 사망자 상당수가 고독사한다는 사실이며, 또한 고독사를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안전망의 부재가 초래한 사회적 ‘고립사’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오늘날 언론과 연구자들은 무연고 사망자, 고독사 혹은 고립사를 대개 빈곤, 열악한 주거 형태, 부실한 의료복지 같은 사회적 문제로 파악하고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여기서 더 조명되어야 하는 것이 ‘연고’라는 개념이다.

특히, 무연고자의 연명의료 중단을 불가능하게 만든 근거였던 2015년도 헌법재판소의 한 위헌판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판결은 무연고 사망자에 관한 국가의 시선과 관리 방식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2015년 11월, 헌법재판소는 무연고 시신에 관한 의미심장한 결정을 내렸다.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손 아무개씨(여·53)는 무연고자였다. 미혼이었고, 부모는 모두 사망했으며, 형제와 연락이 끊긴 지도 30여 년이 흘렀다. 평소 그녀는 ‘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주목한 것은 이 법률 제12조 1항이었다. 이 조항은 “특별자치시장·특별자치도지사·시장·군수·구청장은 인수자가 없는 시체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지체 없이 그 시체의 부패 방지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하고 의과대학의 장에게 통지하여야 하며, 의과대학의 장이 의학의 교육 또는 연구를 위하여 시체를 제공할 것을 요청할 때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그 요청에 따라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법은 무연고 사망자의 시체를 생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손씨는 이 법률 조항이 자신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보고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헌법재판소(헌재)는 손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해당 법률 조항이 그녀의 “시체 처분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시민단체들은 환영했다. 해당 법률 조항은 삭제됐다. 헌재의 결정이 무연고자의 존엄성을 지키고, 더 나아가 사후에도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헌재의 결정 이유를 살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헌재는 이 법률 조항이 “인수자가 없는 시체를 해부용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보건을 향상시키고 의학 교육 및 연구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다만 오늘날 의과대학의 해부용 시체는 대부분 시신 기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법률 조항이 굳이 필요 없다고 봤다. 2015년 기준 최근 5년간 무연고 사망자의 시체를 해부용으로 제공한 사례는 단 한 건에 불과했다. 이런 맥락에서 헌재는 이 법 조항의 ‘공익’이 무연고자의 ‘사익(자기결정권)’보다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뒤집어 말해 의과대학이 해부용 시체를 원활히 공급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면, 헌재의 결정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결정문에 포함된 해당 법률 조항의 입법 연혁에 따르면, 한국의 의과대학과 무연고 사망자 시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 역사는 무려 일제강점기 전후부터 200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결정문에 따르면 여기서 무연고자는 본인의 죽음을 알릴 친족이 없거나, 친족에게 시체 인수를 거부당한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빈곤으로 인하여 길거리 생활을 하다가 죽은 사람을 뜻한다. “시신 훼손을 금기시하고 화장을 꺼리는 오랜 전통적·유교적 관습에서 비롯된 매장 문화로 인해” 한국의 의과대학은 해부용 시체를 대부분 행려병자나 무연고 사망자에게 의존해왔다. 하지만 시신 기증자가 늘어나면서 무연고 시체는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됐다. 바꿔 말해, 생전에 갈 데가 없었던 사람들은 사후에도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언급한 헌재의 결정문은 마치 무연고 사망자라는 존재의 종언을 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에 이들을 위한 자리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무연고자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는 사회

헌재의 결정에서 또 주목할 점은 자기결정권에 관한 사항이다. 헌재는 사건의 법률 조항이 무연고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현행법상 생전 본인의 반대 의사가 있다면 장기나 인체조직의 이식 및 채취를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상기했다. “만일 자신의 사후에 시체가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처리될 수 있다고 한다면 기본권 주체인 살아 있는 자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도 적시했다. 자기결정권의 근거가 되는 헌법 제10조에 따르면 해당 사건의 법률 조항은 수정해야 할 오류로 여겨졌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무연고자의 자기결정권이란 무엇인가? 해당 법률 조항에 대한 본인의 의사표시 여부인가? 오늘날 무연고 시체는 본인의 의사 여부와 상관없이 그 쓸모가 사라졌다. 다시 말해 무연고자가 시체 기부에 동의하든 안 하든 결과는 같다. 헌재 결정은 무연고 사망자의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기본권을 원칙적으로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결정권의 뿌리인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적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상에서 각종 차별을 경험한다. 각자의 존엄과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확인되고 승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연고자의 죽음을 자기결정권 여부로만 다루는 데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법학자 김현철이 논문 〈자기결정권에 대한 법철학적 고찰〉에서 지적했듯이, 우리 모두는 권리의 주체이지만 권리 행사에는 ‘사회적 승인(recognition)’이 필요하다.

헌법재판소는 ‘기본권 주체인 살아 있는 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원칙을 강조했다. 연고자이든 무연고자이든 ‘시체의 처분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헌재의 결정은 무연고 죽음을 자기결정권 여부로 국한함으로써,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무연고자의 불평등한 삶의 조건에는 주목하기 어렵게 만든다. 더욱이 헌재는 이성 부부 중심의 협소한 연고 범위에 대해서도 지적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헌재는 무연고자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역설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연고를 이성 부부 중심의 가족과 동의어로 취급함으로써, 동성 가구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 대한 논의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시사IN 신선영

‘장사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의 목적은 국가가 시신 관리를 통해 “보건위생상의 위해(危害)를 방지하고, 국토의 효율적 이용과 공공복리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혼자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가족이 없거나, 연락이 끊긴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 놓인 시신은 무연고사로 분류되어 안치실에서 곧바로 화장장으로 향하게 된다.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이 직장(直葬)은 일종의 ‘시신 처리’에 가깝다. 빈소, 조문객 등으로 이뤄지는 장례식은 생략된다. 그나마 서울시가 ‘나눔과나눔’이라는 비영리 단체와 함께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공영 장례식을 내실 있게 지원하는 실정이다.

한편 장사법 제2조 제16호는 연고자의 범위를 친족과 비친족으로 정해놓았다. 먼저 친족은 배우자, 자녀, 부모, 자녀 외의 직계비속, 부모 외의 직계존속, 형제·자매 순으로 규정된다. 친족의 권리와 의무는 차등적이다. 만약 배우자나 자녀가 고인의 시체 인수를 유보한다면 형제나 자매가 고인의 장례식을 치르기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친족 다음 순위는 ‘사망하기 전에 치료·보호 또는 관리하고 있었던 행정기관 또는 치료·보호기관의 장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인의 ‘시신이나 유골을 사실상 관리하는 자’이다. 이런 법적 테두리에서 친구, 동거인, 동성 연인이 고인의 장례식을 치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을 ‘시신이나 유골을 사실상 관리하는 자’로 볼 수 있는지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사법은 이성 부부 중심의 친인척 관계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가족 관계(혹은 가구 형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그런즉 ‘제3자’가 고인의 장례를 대신 치르기란 법적으로도, 그리고 규범적으로도(가령 주무관들의 보수적 태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 된다. 국가로 대표되는 법률이 특정한 연고 범위 밖에 있는 ‘가족’과 시민들의 애도를 막아서는 형국이다.

이처럼 무연고자의 죽음은 연고의 개념과 사회 성원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무엇보다 무연고 사망자 문제를 비혼, 저출생, 고령화, 가족해체 등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결혼, 출산, 가족의 유대감을 강조하는 세간의 인식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 기존 인식 구도는 마치 전자가 사회병리적 현상이고, 후자가 그에 대한 올바른 처방처럼 보이게 한다. 게다가 이러한 인식틀은 연고를 이성 부부 중심의 가족 및 친인척과 동의어로 취급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가족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서 늘 변해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산업화 시기에 국가의 가족계획 정책과 도시화로 인해 ‘4인 가족’이 대폭 늘어났다면, ‘고용 없는 성장 시대’나 ‘코로나19 시대’로 명명되는 오늘날에는 1인 가구, 동거 가구, 동성 가구, 비혼 가구와 같은 형태의 가족이 늘고 있다. 즉 당대 무연고자의 죽음을 둘러싼 문제의 본질을 ‘정상 가족’의 소멸에서 찾을 게 아니라, 이미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체계와 규범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이제라도 연고자·무연고자라는 분류를 재고하고, 그간 국가가 가족에게 떠맡겨왔던 복지 문제를 전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혼자 사는 사람을 대신하여 연명의료결정을 숙의하는 ‘시민 연대’나, 그들의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는 ‘사회적 친족’의 대한 논의도 시작할 때다.

 

*참고한 도서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2015, 문학과지성사)
〈이상한 정상가족〉(김희경, 2017, 동아시아)
〈외롭지 않을 권리〉(황두영, 2020, 시사IN북)
〈After Kinship〉(Janet Carsten, 2003, Cambridge University Press)

기자명 송병기 (인류학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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