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5일 국회 앞에서 전국사무금융노련 노조원이 세무 비리 척결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기의 천재 아인슈타인은 소득세를 두고 이런 말을 남겼어. “이건 수학자에게도 너무 어려운 문제라서 철학자가 있어야겠다. 소득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다.” 너도 역사 시간에 옛날의 세금제도, 조용조니 일조편법이니 전분육등법이니 연분구등법이니 하는 이름들을 외우느라 곤욕을 치렀겠지만 그 이름을 넘어 세세한 내용으로 들어갔다면 그냥 기권하고 말았을 거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온갖 기기묘묘한 방법을 동원해 ‘효율적으로’ 세금을 거뒀고, ‘납세의 의무’는 고인돌을 세우던 무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빠져나갈 수 없는 ‘백성 된 도리’였지.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다”라고 간파한 것처럼 말이지.

세금 거두는 걸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인 세리, 아전, 세무서원은 이 복잡하고도 피할 수 없는 세금 징수를 집행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담당했어. 정직한 사람도 많았지만 세금을 빌미로 자기 배를 채우거나 장난치던 나쁜 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원성과 지탄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지. ‘악역(惡役)’을 넘어 실제 ‘악한(惡漢)’으로 둔갑한 사람도 많았다는 얘기다.

전쟁의 포화가 작렬하던 1952년 6월2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공무원 특별 비리수사반이 서울 중부세무서 과장과 직원 몇 명의 덜미를 잡았다. 그런데 그 뒤 상황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수사반의 활동으로 세무 관리들이 위협을 느껴 세무행정상 적지 않은 지장이 생기게 되었다는 세무 당국의 호소가 있어 비행세리(非行稅吏)에 관해서는 (세무) 당국에서 자가 숙청을 감행하면서 내부 정리를 하겠다고 자원”했고 비리수사반은 이를 수용했다는 거야. 문제가 생길 낌새가 보이자 미리 ‘튀어버리는’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당국의 수사 때문에 ‘세무행정에 지장이 생기는’ 일은 40여 년이 흐른 뒤에도 반복됐어. “검찰이 세무공무원들의 부조리에 대해 수사를 벌이자 서울 강서·동작·영등포·관악 세무서를 비롯해 수도권 지역 20여 개 세무서의 소득세과 소속 세무공무원 중 대부분이 잠적해버려 일선 세무업무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동아일보〉 1991년 4월25일).” 그것도 모자라 “해당 세무서장들이 검찰로 찾아와 세무공무원들이 검찰의 수사 확대를 겁내 잠적, 업무가 마비되고 있다며 수사 중지를 요청”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야말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그래도 나쁜 놈보다는 착한 사람들이 많고, 나쁜 놈들이 설레발을 쳐도 묵묵히 그들 몫까지 감당하는 이들이 있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지만, 그래도 나쁜 놈들이 끼치는 해악은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또 그 동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한국 세무서원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지. 오늘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세무 관료라 할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줄까 한다. 이름은 이석호.

그는 1985년까지 30년이 넘도록 전남 목포·무안·해남 등지에서 세무 관료로 일했다. 그런데 30년 경력의 퇴직 세무공무원인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땅 부자이기도 했어. 그가 재직했던 지역에서는 “그 사람 땅을 밟지 않고는 어딜 다닐 수가 없다”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였지. 대관절 그는 이 땅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전남 목포시 달동 충무공 유적지 모충각. 이석호가 팔아버린 토지 목록에는 충무공 유적지도 있다. ⓒ연합뉴스

현직 공무원의 비호를 받다

“정부는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면서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유지 일소 계획’을 세워 국유지 매각을 독려했다. 이석호씨는 관재 담당관으로 국유지 매각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씨는 ‘국유재산에 관한 사무에 종사하는 직원은 그 재산을 취득하지 못한다(국유재산법 제14조)’는 조항을 피해 친인척 등 타인 명의로 국유지를 싼값에 매입하거나, 점유자들에게 점유 중인 국유지를 매수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광주지방국세청 징세2계장’(이씨 자신) 명의로 보내 국유지를 판 뒤 이를 자기가 전매받는 형식으로 1200만여 평을 ‘일소’하는 실적을 올렸다(〈시사저널〉 1993년 7월1일).”

무슨 말인고 하니 국유지를 팔아 재원을 조달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이용해 자기 일가붙이에게 이 땅을 싸게 팔아치우거나, 나라 땅을 점유한 이들에게 국유지를 헐값에 팔고는 자신이 그걸 가로채거나 되파는 등 20세기의 ‘봉이 김선달’ 노릇을 한 거야. 세무서장 도장을 위조하거나, 관할 관청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친척에게 팔아치우는 대담함은 덤이었지. 그가 팔아버린 토지 목록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야. “충무공 유적지(목포시 달동), 옥암동 공동묘지, 남해배수장 유수지(목포), 해남 학동공원 구계등(명승지 제3호·완도), 윤선도 사적지(완도군 보길면), 상록수림(완도군 보길면 예송리·천연기념물 40호), 무안 남산공원…(위 기사).”

문화재고 천연기념물이고 공원이고 가리는 게 없었지. 해당 관청은 이석호가 국유지를 팔아치운 것도 모르고 그 땅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에게 임대료를 받는 경우도 있었어. 그렇게 팔아치운 땅이 여의도의 30배쯤 되는 3046만 평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가 사기를 쳐 국유지를 팔아먹은 지 십수년이 지났으니 그걸 다시 찾거나 바로잡는 일도 난항이었어.

“목포 앞 고하도의 이순신 장군 전적지 등 유적지와 완도 정도리 해수욕장 등 관광지까지 이(석호)씨에게 넘어가 있어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주민들의 반발이 거센 데다 이씨의 소유인 목포 시내 국도 1호선 일부를 확장·포장했다가 (정부가) 오히려 이씨로부터 고소까지 당할(〈한겨레〉 1993년 4월28일)” 처지였으니 한 지역, 나아가 국가권력이 세무서 관료에게 농락당한 셈이야.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한 처벌은 놀라우리만치 가벼웠다. 1994년 구속된 후 대법원까지 올라가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이석호는 형기도 채우지 않고 가석방됐어. 그러고도 버릇을 못 고친 그는 “2001년 4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이미 친인척 등의 명의로 몰래 취득해놓은 국유지 605필지(214만여㎡)를 위조한 매도증서를 이용해 특례 매입하거나 환수보상금 등으로 191억원을 챙긴 혐의(〈한겨레〉 2007년 11월5일)”로 또 구속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현직 공무원들의 비호를 받으며 “‘이 회장’으로 불리고 사무실을 수시로 옮겨 다니는가 하면 7~8명의 직원을 고용해 조직적으로 공문서까지 위조(〈중앙일보〉 2007년 11월5일)”했다니 온몸이 간으로 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대담한 악당이었어. 이번에는 이석호도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지.

이석호의 아들은 아버지가 불법으로 빼돌린 국유지를 처남 명의로 바꿔놓고 국가가 이를 환수할 때 28억원 상당의 보상금을 받아 가로채는 등 6명의 명의를 차용해 총 82억원을 부당하게 챙겨 2006년 캐나다로 튀어버린 거야. 캐나다에서 주유소를 운용하며 대저택에서 호화롭게 살던 그를 잡기 위해 검찰은 1만6000여 쪽에 달하는 수사 자료를 영문으로 번역해 캐나다 법무부에 범죄인 인도를 청구했고, 결국 그는 한국으로 송환돼 징역 8년을(왜 이렇게 가벼운지!) 선고받게 된단다.

그 부자가 해먹은 땅과 돈을 제대로 환수했는지, 그 와중에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보상은 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능적인 전직 세리 아버지와 전직 검찰수사관(아들은 글쎄 전직 검찰수사관이었단다)의 합작이 쌓아 올린 사기의 성벽은 높고도 튼튼하게만 보이는구나. 징역을 끝내고 ‘사회 지도층’으로 남은 그들은 부를 과시하고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듯 살다 가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평온한 일요일 아침, 갈데없는 분통이 터진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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