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1월28일 ‘항만도시를 무대로 유부녀를 농락한 48명의 추한’이 계엄당국에 검거되었다. ⓒ연합뉴스

예전에 네 삼촌 집을 방문할 때 엘리베이터 때문에 고개를 갸웃했던 거 기억나니?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서지 않고 격층으로 서서 원하는 층에 가려면 계단 하나를 오르내려야 했던 구조 말이다. 특히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지어진 아파트들 가운데 이런 구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건 에너지 절약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아예 격층으로 설계했기 때문이야. 1979년 이란 혁명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불거진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이었지.

그럼 1차 오일쇼크는 언제였을까? 그 계기는 1973년 10월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이었어. 한창 전쟁 중이던 10월17일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석유 가격을 인상하고, 이스라엘이 점령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매달 석유 생산을 5%씩 줄이겠노라 선언했다. ‘석유의 무기화’였지. 기름값은 1973년 9월 말 배럴당 3.07달러에서 1974년 1월 말 11.65달러로 4개월간 무려 280% 상승해 온 세계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어.

그런데 흔히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이 오일쇼크는 쓰라린 고난을 가져다주었지만 중동 붐이라는 거대한 돈벌이의 문이 열리는 계기이기도 했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중동 산유국들은 이를 거대 건설 사업이나 수로, 항만 공사 등 숙원사업에 투입하게 됐으니까. 이른바 중동 건설 붐이 시작된 거야. “1975년 7억5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건설 수주액이 1980년 82억 달러로 10배 이상 늘었다. 이 기간 한국 외화수입액의 85.3%가 오일달러였다. 노동자 수도 급증했다. 1975년 6000명이던 것이 1978년 10만명에 육박했고 한때 20만명에 달했다(〈경향신문〉 2015년 4월2일).” 몇 년 고생하면 집 한 채 장만할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현실 앞에 젊은 아버지, 남편들은 중동으로 달려갔다. 50℃의 고열이 내리쬐고 툭하면 모래폭풍이 불어대는 사막에 한국인 수십만 명이 바글거렸지.

그런데 이 중동 붐은 달갑지 않은 범죄와 범죄꾼들의 전성시대(?)와도 맞물린다. 요즘 네게는 낯선 단어겠지만 ‘제비족’이라는 족속들에게도 중동 건설 붐은 ‘대목’이었던 거야. 중동에 몰려간 사람들은 거의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길면 몇 년 동안 가족 간 생이별을 감수해야 했지. 제비족들은 이 생이별의 틈을 파고드는 독버섯 같은 이들이었다. 중동 간 남편으로부터 이전보다는 넉넉한 수입을 얻은 주부들을 ‘사업 대상’으로 삼아 그들을 유혹하고 돈을 우려내는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거야.

“중동 특수 기간은 제비족이라는 신종 직업을 탄생시켜 가정을 멍들게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제비족의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내무부는 제비족 뿌리뽑기 단속을 대대적으로 벌였으며 몇몇 시·도 당국들은 해외 근로자 부인들을 대상으로 ‘정신교육’에 나서기도 했다. 근로자들도 얼마나 속이 탔던지 ‘제비족’으로부터 부인을 지켜달라는 연판장을 신문사에 보내오기도 했다(〈조선일보〉 1998년 8월22일).”

정부는 제비족을 ‘사회악’으로 규정해 단속에 나섰고 건설사들은 ‘가정보호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노동자 부인들 관리(?)에 나섰다. “(남편의 의뢰를 받은) 본사 상담직원은 부인을 만나 ‘사막에서 고생을 하는 남편을 두고 이럴 수 있느냐’면서 설득작전을 폈다. 결국 부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육성 녹음테이프를 현지로 보냈고 남편은 귀국 계획을 취소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지금 일하고 있다(〈동아일보〉 1981년 6월6일)”라는 기사에 이르면 이걸 미담이라고 불러야 할지 비극이라고 불러야 할지 헷갈리게 된다.

여기서 아빠의 개인적 경험 하나를 들려줄까 해. 1999년 무렵에는 술집에서 누군가 기타를 치며 반주를 하면 함께 노래하고 즐기는 문화가 어렴풋이 남아 있었어. 직장 동료와 심야에 찾았던 종로의 어떤 막걸리집도 그랬지. 그곳에서 환갑에서 고희 사이로 보이는 연배의 ‘할저씨’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놀게 됐다. 가수 최희준의 ‘하숙생’을 멋들어지게 부른 분이 있었는데 내 옆에 있던 아저씨가 “쟤 인생은 정말 드라마야, 드라마!” 하면서 그의 라이프 스토리를 들려줬다.

“저 녀석은 삼팔따라지야. 이북에서 꽤 잘사는 집 아들이었는데 빨갱이들한테 다 빼앗기고 쫓겨 내려왔다가 전쟁에 나갔지. 아등바등 살다가 역시 전쟁통에 혼자 된 처자하고 결혼을 했어. 그런데 70년대 중동 붐 때 저 친구가 중동에 나갔거든. 그런데 이 여편네가 바람이 난 거야. 우리도 아는 동네 남자였지.” 그 남자가 제비족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여자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는데 하여간 사달이 났고 남편도 알게 됐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자는 바람이 났다는 남자와 자신의 아내를 모두 칼로 찔렀어. 둘 다 중태에 빠졌지만 살아났고 남자는 살인미수로 교도소로 갔지. 그런데 그 옥바라지를 한 건 부인이었다고 해.

1978년 현대건설의 중동 현장을 방문한 정주영 회장(가운데)이 노동자와 함께 노래하고 있다.ⓒ아산정주영닷컴 제공

처연하게 ‘하숙생’을 부르던 노인의 얼굴

면회를 갔다가 온갖 쌍욕을 듣고 울며불며 돌아오면서도 부인은 남편을 떠나지 않았어. 전쟁통에 혼자가 돼 친정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으니 갈 데가 없었을지도 모르지. 감옥에서 나온 뒤 남편은 부인을 몇 번이나 집에서 내몰았지만 부인은 악착같이 대문에 머리를 들이밀었다는구나. 둘은 끝내 헤어지지 못했지. 나이 마흔 넘은 살인미수 전과자는 취직할 구멍이 없었고 살림은 거의 아내가 챙겼다. 그런데 그 풍파 많은 집에서도 잘 자라 근사한 신랑감 만나 결혼을 앞두고 있던 외동딸이 그만 범죄의 희생자가 돼 죽고 말았다고 해. 그 후 부인은 정신 줄을 놓았다는구나. 평생을 기죽어 살던 부인에게 딸은 정신적 기둥이자 서까래였던 것이지. 딸 때문에 악착같이 집에 남았고, 남편의 주먹질을 받아냈고, 더러운 년이라는 욕설을 참아 넘겼던 부인은 딸의 부재를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술자리에서 만나기 몇 달 전 부인은 죽었어.

“부인이 돌아가면서 그랬다네. 미안하다고. 자기는 딸을 따라가겠다고. 그때 저 녀석이 술 취해서 막 그러더라고. 그냥 만나지 말걸, 왜 만나서. 태어나지 말걸 왜 태어나서···.” 아빠는 ‘하숙생’을 부른 노인의 얼굴을 오랫동안 눈여겨봤다. 그 삶 자체가 지옥과 그리 멀지 않았던, 먹고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던 한국의 노동자로 살면서 틈바구니에 끼어든 독버섯 같은 범죄의 쓴맛을 봐야 했던,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도 살인미수 범죄자가 돼버렸던 한 남자. 그리고 한때의 실수든 범죄 피해를 당했든, 그로 인해 쌓인 남편의 증오와 살의를 오롯이 받아내면서 버텨내다가 딸의 죽음으로 무너지고 말았던 누군지 모를 한 여자.

범죄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지. 그 거울에는 차마 정면으로 들여다보지 못할 만큼 막막한 사연이 그득하다. 그날 ‘하숙생’을 처연하게 부르던 한때의 중동 건설 노동자와 그 아내. 그리고 아내를 노린 제비족. 그들이 얽히고설켜 부른 끔찍한 사건과 그 이후의 지옥들만 해도 그렇지 않니. 우리 역사 속에는 수백만 개의 지옥이 있었고, 그만큼 아픔이 있었다. 또 지옥과 아픔을 빚어낸 현실과 싸워야 했던 한 명 한 명의 사연이 고통과 분노의 포도송이처럼 맺혀 있지. 우리가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라떼는 말이야’ 타령에 진저리를 내는 건 당연하지만 그들의 ‘라떼’를 통으로 무시하거나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단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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