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11일 ‘나라사랑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인 금붙이들이 수출용 금괴로 만들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1997년,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 한국에는 금모으기 운동이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국난 극복이 취미”라는 우스갯소리에 걸맞은 국민들은 너도나도 금붙이를 들고 몰려들었다. 그렇게 전국에서 모은 금이 석 달간 227t이었어. 실로 막대한 양이었지.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런 황금더미가 어떻게 장롱에서 잠자고 있었을까?

한국의 금 생산량은 연간 2.5t 정도에 불과해. 그럼 우리가 100년 동안 산출한 금을 박박 긁었단 얘기일까? 그렇지 않아. 1994년 9월9일 MBC 〈뉴스데스크〉는 이런 뉴스를 전하고 있지. “현재 금시장 규모는 반지와 같은 장신구용과 산업용을 포함해서 120t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중 순수한 국내 생산은 1.4t에 불과합니다. 지난해의 경우 수입된 금은 34.4t. 이 가운데 국내 업체의 가공을 거쳐서 다시 수출된 양이 26.3t이어서 8.1t 국내에 남은 셈입니다. 따라서 최소한 110.5t은 모두 밀수에 의해 공급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국내에 유통된 금의 대부분이 밀수품이었단 얘기다. 너나 오빠의 돌반지도, 엄마 아빠가 연애할 때 끼었던 커플링도 어느 안개 낀 항구 앞바다에서 은밀히 교환되는 짐짝 속에 실려 왔거나, 좀 지저분한 얘기로 누군가의 항문 속에 감춰 들여온(〈중앙일보〉 2018년 2월20일) 금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야.

밀수의 역사는 인류가 국가를 형성하고 교류를 나눠온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품목의 수입이 금지된다 해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걸 기어코 들여오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밀수의 천국이었다. “195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지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미제 물건이 넘쳐났던 시기로 기억되기도 한다. (···) 미군 PX에서 거래되는 물건 중 70%가 암시장으로 흘러나왔다(김성보 공저 〈한국현대 생활문화사:1950년대〉).

영화 〈국제시장〉의 ‘꽃분이네’ 가게를 채웠던 물건 태반이 밀수품이었고, 서울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는 밀수품을 대놓고 거래했다. 많은 이들이 이 밀수 산업의 촉수와 깃털로 먹고살았고 그 머리와 몸통들은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하다못해 1966년 5월,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이 일본 미쓰이그룹과 공모해 사카린 2259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서 밀수입하려던 일이 드러나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어. 이 배후에 정권 실세가 도사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야당 의원 장준하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밀수 왕초’라는 비난을 퍼부었다가 철창신세를 지기도 했지.

밀수가 가장 활발히 행해진 곳은 부산과 여수 등 남부 해안지역일 거야. 경제력이 막강했던 일본과 가까우니 밀수품 조달이 용이했고, 섬이 많은 다도해여서 숨을 곳도 많았으니 밀수에는 최적의 조건이었지. 대마도 이즈하라항과 부산을 오갔던 ‘대마도 특공대’와 밀수왕 이정기는 부산세관의 철천지원수였고 여수의 밀수왕 허봉용은 여수 지역을 쥐락펴락한 거물이었어. 이들 밀수 조직들은 세관 공무원들과도 유착돼 있었고, 공권력을 우롱하며 남해안을 자기 앞마당처럼 설치고 다녔단다. 정부는 밀수 근절에 골머리를 앓았어. 지역 세관에 타 지역 출신 엘리트 공무원들을 파견해 밀수꾼과 관청의 짬짜미를 막아보려고도 했지. 1975년 여수세관으로 발령받은 서른네 살의 세관원 서정휴도 그중 하나였다.

1975년 12월4일 여수 밀수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허봉용(맨 오른쪽)과 관련 피고인들. ⓒ연합뉴스

흔했던 ‘세관원 출신 밀수꾼’

1975년 8월5일 저녁 여수세관 마당에서 사람들 몇 명이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어. 전날 세관은 밀수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배를 수색해 선주를 연행했다. 세관원들과 다투던 이들은 선주의 아들들이었어. 그들은 ‘밀수품이 배에서 나오지 않았는데(후일 육지에서 발견됐다) 조사 도중 아버지가 구타를 당했다’며 항의했고, 세관원 서정휴는 ‘그런 적 없다’고 맞서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나는 나라와 세관을 위해 임무를 다하는 것뿐입니다.”

그러자 아들 중 한 명이 칼을 꺼냈다. “세관을 위해 목숨 한번 걸어볼래?” 서정휴는 권총을 빼서 다섯 발의 총을 쐈지만 모두 허공을 향했지. 차마 사람을 쏘지 못했던 그에게 잔인한 칼질이 쏟아졌어. 피투성이가 된 서정휴를 택시들은 태워주지 않았고 병원 이송이 늦어지는 바람에 그는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말았지. 서울대 문리대에 합격하고도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하지 못했던, 부산과 더불어 밀수 천국으로 불리던 여수에서 밀수범들에게 맞서온 청년 공무원이 사위는 순간이었다. 그날은 서정휴의 둘째 딸 생일이었다고 해.

1970년대 남해안에서 쥐치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던 활어선 가운데 어떤 배는 선원에게 월급을 거의 지급하지 않았어. 그래도 일하겠다는 선원들은 줄을 섰지. 그들은 물고기를 가득 잡는 만선을 꿈꾸는 대신 일본 가전제품이나 오토바이 부품들로 어창(魚艙)을 채워왔으니까. 이 활어 수출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던 곳이 여수였어. 폭력 조직과 결부된 밀수 조직이 지역 경제를 좌지우지했고, 인구 13만명 가운데 4만명이 밀수와 관련해서 먹고산다는 과장 섞인 이야기까지 돌았다. 그러다 보니 밀수 자체에 대한 죄의식도 엷어질 수밖에 없었겠지. 여수 시민 600명이 서정휴 살해범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냈던 사실은 그 슬픈 단면이야.

“세관원이 밀수꾼에게 칼을 맞고 죽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악물었다. 서정휴의 희생을 계기로 대규모 공권력이 발동됐고 남해안 일대에서는 밀수와의 사생결단이 펼쳐진다. 특명감찰반이 벼르고 벼른 건 여수의 밀수왕 허봉용이었다. 서정휴를 살해한 범인들은 허봉용의 밀수 조직원이었어. 서정휴가 밀수 조직과 그와 결탁한 세관 직원의 묵계를 깨면서 발생한 일이었지. 특명감찰반이 뜬다는 나름의 기밀사항까지 미리 알았던 허봉용 등은 감찰반이 들이닥치기 전에 여수를 떴지만 작심하고 죄어드는 수사망을 빠져나가지는 못했어. 밀수 조직의 두목들과 밀수꾼들을 비호하던 현직 경찰서장과 공무원 175명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고, 남해안 일대를 뒤덮었던 밀수의 그림자는 어둠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게 된단다.

허봉용은 광주 시내 한 고등학교의 배구 선수였어. 그런데 세관의 배구팀 선수로 스카우트되면서 세관 직원이 됐다. 허봉용 역시 세관원 출신이었던 거야. “세관원 출신인 그가 밀수 총책이란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그러나 당시 여수에서는 이런 전직(?)이 흔했다. 경찰관이 밀수와 연루돼 옷을 벗으면 밀수꾼이 되는 식이었다(〈광주일보〉 2004년 2월18일).” 아울러 폭력 조직원들이 만든 ‘정화위원회’의 위원장 감투를 쓰고 여수의 유지 행세를 했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여수 밤거리를 장악했던 허봉용의 전성시대는 밀수 근절에 헌신한 한 젊은 공무원의 죽음이 불러온 ‘밀수와의 전쟁’으로 일단락됐다. 이후 1980년대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밀수 시대’ 역시 저물어가게 된다. 아빠 어린 시절 흔하게 돌아다녔던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 딱지, 그리고 미군 PX에서 갓 흘러나온 게 뻔했던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떠올려본다. 어쩌면 우리는 밀수와 더불어 살았는지도 모르겠구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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