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핼러윈데이였다. 이상한 차림새로 나서도 괜찮은 날. 별나고 특이할수록 환영받는 날. ‘다른’ 것이 ‘틀린’ 것으로 손가락질받지 않는 유일한 날. 그래서 망가진 우산을 모자로 쓰고 버려진 빗자루를 신발로 신은 그도 인파에 섞일 수 있었다. 마을 한복판으로 흘러들 수 있었다.

날이 저물었다. 이상한 차림새가 더 이상 괜찮지 않은 밤, 여전히 망가진 우산을 쓰고 버려진 빗자루를 신은 그가 도드라져 보인다. ‘쓰레기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쓰레기가 모여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게 그제야 발각된다. 쫓기는 신세가 된다. 굴뚝청소부 루비치를 만난다.

시궁창 속에서도 누군가 별을 본다

‘푸펠’이라고 했다. 이제부터 그게 너의 이름이라고, 루비치는 말했다. 아마도 ‘쓰레기통’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푸벨(poubelle)에서 따온 이름 같았다. 루비치가 푸펠을, 친구 없는 아이가 처음 사귄 친구를, 굴뚝 꼭대기로 데려간다. 캄캄한 하늘을 같이 올려다보며 아빠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는 4000m 절벽 아래, 바깥 세계를 전혀 모르는 마을. 어딜 가나 높은 굴뚝이 솟아오른 곳. 쉴 새 없이 피어오른 연기에 가려 평생 파란 하늘을 본 적 없는 사람들. 반짝이는 별의 존재도 알 턱이 없다. 딱 한 사람. 루비치의 아빠만이 검은 연기 너머에 별이 있다고 믿었다. 마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제 아빠는 없고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만 남았다. 혼자 몰래 올려다보던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는 친구가 생겼다. 한번 해보기로 한다. 연기 너머로 가보는 일. 본 적 없는 세상을 보러 가는 일. 쉽지 않겠지만, 쉽지 않으므로,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일. 그렇게 루비치와 푸펠은 ‘체념’의 중력을 뿌리치고 ‘신념’의 날개를 펼친다. 그 둘을 바라보느라 마을 사람들도 덩달아 난생처음 하늘이라는 걸 올려다보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1986)가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 이야기. 구름 너머 ‘하늘을 나는 성’이 있다고 말해준 영화를 보고 나서, 괜스레 하늘을 쳐다보며 공상에 빠지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거다. 그걸 ‘라퓨타 신드롬’이라고 불렀다. ‘왠지 모르게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 증상.’ 만일 그게 밤하늘이라면? 구름 너머가 아닌 어둠 너머를 상상한다면? 이제부터 ‘푸펠 신드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시궁창 속에서도 우리 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본다.” 영화 〈원더스트럭〉의 소년은 엄마가 좋아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이 문장이 늘 궁금했다. 그 말뜻을 알아내기 위해 아이는 계속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머리 위 별을 따라가는 동안, 발밑의 시궁창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별이란 그런 것이다. 꿈이란, 희망이란 그런 일을 한다. 어떤 반짝이는 것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굴뚝마을의 푸펠〉을 바라보는 100분이 내겐 제법 힘이 되었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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