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 경제가 휘청이면서 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다. 직장을 잃거나 가족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았고 더러는 그 모든 걸 잃은 사람도 있었다.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이 그랬다. 광산이 먹여 살리는 도시에서 광산 덕에 먹고살았는데, 광산이 문 닫던 날 그의 삶도 함께 문이 닫혔다. 남편이 떠나고 이웃들이 떠나고 결국 펀도 도시를 떠났다.

갈 곳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동생 집에 들어가는 대신 낡은 밴에 짐을 실었다. 단기 알바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잠은 차에서 자고 변은 들에서 누고 밥은 땅에서 먹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엄마가 그러는데요, 아줌마가 홈리스래요. 맞아요?” 우연히 마주친 옛 이웃의 아이가 물었을 때 펀은 대답한다. “난 홈리스(homeless)가 아니야. 그냥… 하우스리스(houseless)지.” 갈 집은 없지만 갈 데는 많다. 몸 둘 곳이 아니라 마음 둘 곳이 집이다. 펀은 지금 ‘집’을 되찾고 싶은 게 아니다. ‘나’를 되찾고 싶은 거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가져갈 게 틀림없어 보이는 영화 〈노매드랜드〉는 같은 제목의 논픽션이 원작이다. ‘바퀴 달린 집’을 끌고 미국 전역을 떠도는 현대판 노마드(nomad) 무리와 3년을 부대끼며 쓴 책이다. ‘집’이 없어서 우는 대신 ‘길’이 있어서 웃는 사람들 이야기에 마음 빼앗긴 수많은 독자 가운데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있었다. 직접 제작자로 나섰고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에게 연출을 맡겼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영화

4개월여 동안 미국 서부 7개 주를 돌아다니며 길 위에서 찍은 영화는 경이로운 순간들로 가득하다. 하늘, 들판, 강과 산, 그리고 숲과 길이 만들어낸 시린 풍경 속을 펀이 한 마리 초식동물처럼 거닌다. 사막 지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찰나의 시간, 그 완벽한 석양을 등지고 펀이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 다만 풍경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나는 몇 번 눈물이 핑 돌았다. 영문도 모른 채 때때로 코끝이 찡해지던 오래전 배낭여행의 날들처럼 그랬다. 때로 어떤 풍경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법이다.

많은 영화가 ‘사건’으로 이야기를 쓴다. 어떤 영화는 ‘사연’으로 이야기를 빚는다. 많은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영화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주연배우 한두 명 빼고 주요 배역을 모두 실제 노마드가 연기한 이 영화는 정중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도 내 얘기를 들어주는 이가 한 사람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행복인지 관객도 함께 깨닫는 108분. 정처 없는 길 위의 삶을 ‘연민’의 눈으로 보지 않고 ‘연대’의 마음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 〈노매드랜드〉를 보는 동안이 내게는 올해 극장에서 맞이한 가장 충만한 시간이었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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