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 제공스위스 베른에 위치한 바 ‘BAR’. 원래 이름은 ‘COLONIAL BAR(식민지 바)’였으나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 연대 행동과 함께 논쟁이 일자 ‘COLONIAL’을 뺐다. 이후 더 큰 논쟁이 일었다.

스위스 수도 베른의 코른하우스 광장에 카페가 하나 있다. 2016년 10월에 문을 열었는데, 커피와 빵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고 술도 판다. 유명하다고는 해도 동네 맛집 정도인 이곳이, 최근 몇 달간 여러 스위스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논란거리가 됐다.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미국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계기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시위가 급속히 번져나가던 지난 5월 말, 베른과 취리히 등 스위스 대도시에서도 같은 시위가 일어났다. 베른의 이 카페는 연대의 의미로 가게 앞 유리창에 검은색 종이를 붙였다. 그런데 시위 참가자들이 그걸 보고 힘을 얻기는커녕 이곳을 비난하고 나섰다. 카페 이름이 ‘식민지 바(COLONIAL BAR)’라는 게 문제였다.

먼저 ‘말과 소리(Wort+Laut)’라는 시민단체가 항의 편지를 보냈다. “가게에 ‘식민지 바’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뭡니까? 식민 지배를 해서 좋았습니까? 아니면 식민지에서 유럽으로 커피를 들여온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식민주의의 잔재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식민지 바’라는 이름은 과거 역사에 대한 무지와 나이브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이름을 바꿔라(Change Your Name)’라는 제목으로 항의 편지를 써서 식민지 바에 보냈다. 반응은 빨랐다. 6월3일, 이 가게는 ‘예전 이름을 쓰지 않겠다’ 공지하고 간판 글자 중 ‘식민지’를 떼어냈다. 새 이름이 정해질 때까지 당분간 그냥 ‘바’라고 불리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만족했을까? 아니다. 더 큰 논쟁은 그 이후 일어났다. 가게가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것을 두고 ‘비겁한 결정’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식민지라는 이름을 없앤다고 해서 식민 지배의 역사를 바꿀 순 없다는 것, 오히려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려는 시도라는 것, 일부 정치세력의 요구에 상업 시설이 굴복한 것이라는 이유였다.

급하게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결정이, 역사의식보다는 일단 비판 여론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베른의 지역 일간지 〈베르너차이퉁〉은 기사에서 “BLM 시위로 미국의 절반이 불타고 있고 여기 베른에서도 같은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인종주의자로 찍히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썼다. 카페 주인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알았더라면 나를 식민주의자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라면서도, “지금은 불에 기름을 부을 때가 아니다. 일단 불을 끄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논란의 와중에 ‘식민지 바’가 들어선 건물의 역사가 알려졌다. 1900년대에 같은 자리에는 ‘식민지 상점(Kolonialwaren-geschäft)’이 있었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들여온 이국적인 물건과 식품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커피·바닐라·시나몬 같은 식료품을 주로 취급했다. 스위스는 바닷길이 없는 국가라 직접 식민 지배를 한 적이 없지만, 스위스 상인과 투자자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식민 지배에 자금을 대는 등 간접적으로 동참함으로써 물품을 조달받았다. 세계 최고라는 스위스 초콜릿의 원재료인 카카오도 유럽이 식민지 삼았던 중남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식민지 상점’은 식민지의 독립과 함께 사라졌고 가게 간판은 다른 이름으로 덧칠됐다. 카페 주인이 그 이름을 가져온 건 건물에 깃든 이런 역사 때문이었다. 그 이름이 과거에 대한 송가(頌歌)인지 아니면 반성문인지는 보는 이의 해석에 달렸겠지만.

ⓒEPA취리히 중앙역에 세워진 철도산업의 선구자 알프레드 에셔 동상. 노예를 부려 부를 쌓은 것이 알려지면서 철거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름 지우면 잔재도 사라질까?

‘식민지 바’는 스위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름 바꾸기’ 논란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 앞에는 알프레드 에셔(1819~1882)의 동상이 서 있다. 에셔는 스위스 철도산업의 선구자이자 ‘크레디트 스위스’ 은행의 설립자다. 그런데 그가 쿠바에 소유한 커피 농장에서 노예를 부려 부를 쌓았다는 게 알려지면서 그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위스 근대사에서 에셔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그의 동상이 쉽게 철거될 것 같지는 않다. 스위스 알프스산맥에 있는 산봉우리 중 하나인 아가시호른(Agassizhorn)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산봉우리 이름은 스위스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지질학자 루이 아가시(1807~1873)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흑백 인종분리를 주장한 유명한 인종주의자였다. 그 때문에 시민운동가들이 아가시호른의 이름을 바꾸자는 청원을 했으나 무산됐다. 이 산봉우리가 속한 지역의 시장은 “아가시가 역사에 미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이름을 없앤다고 (부정적) 역사를 지울 수는 없다”라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스위스의 이 같은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미국의 BLM 시위다. 세계화는 물품과 서비스의 교역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상에도 힘을 발휘한다. 인종이나 과거사 문제에서 ‘세계 표준’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과, ‘역사와 전통’을 함부로 수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식민지 상점’이라는 간판이 덧칠된 지 반세기 넘게 흐른 지금, 같은 자리의 ‘식민지 바’가 이름을 바꾸게 된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나. 만약 ‘식민지 상점’ 주인이 2020년으로 살아 돌아온다면 뭐라고 할까. 픽션이긴 하지만 상황에 들어맞는 이야기가 있다.

〈립 밴 윙클(Rip Van Winkle)〉은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의 단편소설이다. 아직 영국 통치 아래 있던 시절의 미국 뉴욕에 립 밴 윙클이라는 한량이 살았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유령들을 만난 그는 유령들의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흰 수염이 가슴을 덮을 만큼 자라 있고, 갖고 있던 총엔 녹이 슬었다. 마을로 돌아가 보니 뭔가 달라졌다. 여관에 걸려 있던 영국 왕 조지 3세의 초상화는 다른 사람, 즉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로 덧칠돼 있었다. 립 밴 윙클은 아무것도 모르고 조지 3세에 충성하는 말을 했다가 왕당파로 몰려 곤욕을 치른다. 그는 다 커버린 아들과 딸을 만나고서야 그동안 20년이 흘렀다는 걸 알게 된다. 잠든 사이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그가 알던 세상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미국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세상이 바뀐 줄 모르고 영국 왕을 찾는 립 밴 윙클이나, 그 왕의 초상화 위에 급히 새 대통령의 얼굴을 덧칠한 마을 사람들이나, 현재 진행되는 역사에 대입해도 낯설지 않다. 분명 같은 시대를 살아도, 립 밴 윙클과 마을 사람들처럼 서로 다른 기억과 해석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흔하다. ‘식민지 바’ 이슈와 관련해 스위스 언론 〈NZZ〉의 일요판 매거진에 실린 글이 있다. 제목이 놀랍게도 ‘식민 지배를 받아 다행(Zum Glück kolonialisiert)’이다. 글쓴이는 “지난 3000년 세계 역사에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지배하고 정복하지 않은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지배가 나쁘게만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사의 최고 제국주의자인 이탈리아인, 즉 로마인은 유럽 다른 나라들에 철학과 와인, 문학을 전해줬다. 로마인 덕분에 스위스는 새로운 문명의 단계로 도약했다.” 이 신문의 또 다른 기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에 지금 세대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모국(Mutterland:식민지를 착취한 지배 국가를 의미)’이 아프리카에 전해준 것 중에는 트럭, 기차, 약품도 있다. 일부 지역엔 문자까지 알려줬다.” 마치 잠이 덜 깬 립 밴 윙클이 하는 말 같다.

무대를 동아시아로 옮겨보자. 여전히 진행 중인 과거사 이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그런데 몇 년 사이 있었던 일들을 보면 이것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제일 뿐 아니라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령의 당사자들은 세상을 뜨고 있고, 사과와 배상에 대한 요구는 계속 이어지는데, 요구 주체인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윤미향 전 이사장의 불투명한 경영이 문제가 되자 여론이 반으로 갈렸다. 위안부 이슈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쓴 전문가(박유하 교수)의 책은 위안부 명예훼손 혐의를 받아 매장됐으며, 반대쪽의 어떤 이들은 일본 총리로 암시되는 인물이 소녀상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는 조형물을 만들어 자위(自慰)했다. 대단히 오래된 일도 아닌데,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한국인의 시각이 왜 이토록 다른 걸까.

ⓒ시사IN 신선영일본이 한국 백색국가 배제를 발표한 후 첫 수요집회가 2019년 8월7일 옛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역사는 통역 필요한 과거와 현재의 대화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 이것은 영국 작가 L. P. 하틀리의 소설 〈중매인〉의 첫 대목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자신의 에세이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한국의 세대 갈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근접(近接) 과거에 관한 한 사람들은 그것을 낯선 외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기증 날 정도의 격심한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겪은 20세기의 한국에서 근접 과거는 원격(遠隔) 과거 못지않은 ‘외국’이 되어 있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세대 간 소통의 어려움을 얘기하는데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사실상 외국인끼리의 소통에서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안부’가 오래되지 않은 역사라 해도 변화가 빠른 한국 사회에선 사실상 낯선 외국의 일이나 마찬가지고, 그 역사를 제대로 보려면 외국어 통역 수준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이겠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라고 했지만,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통역이 필요한 대화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유종호는 같은 책에서 “과거가 외국이며 거기서 사람들이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고 거동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시키기 위해서는 정치 연대기가 아닌 사회사의 교육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당시 사람들이 뭘 먹고 살았는지, 먹고살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말을 썼고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정확한 통역이 된다는 것이다.

‘식민 지배를 받아 다행’이라고 했던 스위스 언론인도 노예나 다름없었던 식민지인의 하루 일과에 대해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지 모른다. 위안부의 당시 일상에 대한 꼼꼼한 재구성 없이 위안부를 하나로 뭉뚱그려진 이미지로 그리는 것은 통역이 아니라 혼잣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 붐이 일고 있지만, 철저한 고증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일부분만 부각하는 역사는 ‘강자와 약자 사이의 끝없는 대화’일 뿐이다. 힘이 역전되면 언제든 다시 뒤집어질 수 있는.

필자 김진경은 한국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해킹 대회를 취재하다 스페인 출신 해커와 만나 결혼했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스위스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산다. 한국과 유럽의 삶과 문화가 교차하고 충돌하고 뒤섞이는 장면을 잡아내 글로 풀어낸다. 독자들이 보내주는 반응 읽는 걸 좋아한다. 메일 주소는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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