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떠도는 개 한 마리. 집으로 데려왔다. 입양처를 찾을 때까지 잠시 보살피기로 했다. 몇 번의 입양과 파양을 경험하며 힘든 시간을 보낸 녀석이 마침내 새 가족 품에 안겼다. 훈훈한 마무리.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함께 보낸 시간이 짧은데도 같이 나눈 감정은 참 오래 지속된 것이다. 이 감정 뭐지? 나 왜 이러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얻은 해답. 그래, “Empathy(공감)!” 내가 ‘선행’을 베푼 대상이 아니라 나와 ‘동행’을 해준 친구로 기억되는 관계. 나를 더 일찍 만나지 못한 녀석이 ‘불쌍’한 게 아니라 너를 더 일찍 만나지 못한 내가 ‘불운’했다는 생각. 결국 ‘나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빌게 되는 마음.

그래서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배운 것을 관객과 나누고 싶어서” 개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구상했다. “아주 작은 것에서 찾는 행복”과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일의 소중함.” 잠시 머물다 떠난 녀석이 가르쳐준 두 가지를 영화에 담기로 했다. 마로나. 녀석의 이름이 주인공의 이름이 되었다.

루마니아 감독 안카 다미안이 씨를 뿌린 이야기를 아들 앙헬 다미안이 튼튼한 시나리오로 키워냈다.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있는 마로나가 첫 장면이다. “다들 괜찮다면 내 인생의 영화를 돌려보려고 한다. 죽을 때는 그런다고 들었다. 인생이 영화처럼 스쳐간다고.” 그리하여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이 처음 이 세상에 나오던 때로 돌아가 얘기를 시작하는 강아지 마로나.

마로나가 처음부터 마로나는 아니었다. ‘나인’이었다. 아홉 남매의 막내라서 원, 투, 쓰리, 포…, 나인. 부모와 떨어져 혼자 거리를 배회하다가 곡예사 마놀을 만나 ‘아나’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그러다 다시 거리로. 노동자 이스트반을 만나 ‘사라’가 되었다가 또다시 거리로. 어린 꼬마 솔랑주를 만나 비로소 ‘마로나’가 된다.

영화처럼 스쳐가는 그 모든 이야기

다행스럽게도 그의 곁엔 늘 인간이 함께 있었고, 불행하게도 그의 곁에 늘 인간이 함께 있는 건 아니었다. 인간은 마로나에게 삶의 상수이자 변수였고, 시작이면서 끝이었으며, 그가 달리는 이유이자 멈추는 원인이었다. 마로나의 기억 속에서 “영화처럼 스쳐가는”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소리 없는 흐느낌을 극장에 남겨둔 대신,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행복감을 가슴에 품고 나왔다. 애니메이션 〈환상의 마로나〉가 그렇게 나의 반려영화가 되었다.

그래픽노블 아티스트와 일러스트레이터가 애니메이터를 만나 협업한 그림은 말 그대로 환상적. 독특한 스타일의 선, 면, 색이 어우러진 이미지 덕분에 이야기가 더 황홀해졌다. 엔딩 크레디트에 흐르는 따뜻한 주제가 덕분에 영화의 여운과 잔상이 더 길어졌다. 이 영화 덕분에, 마로나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 우리 집 강아지를 쓰다듬는 마음이 더 애틋해졌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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