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4월7일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실업수당을 신청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 모습.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상태다. 자산(주식, 부동산 등) 시장만 2008년 이전 혹은 그 이상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자산 가격이 오른다고 실물경제의 취약성이 극복되진 않았다. 기업들의 투자가 정체되어 있고, 따라서 물가도 오르지 않는다. 많은 나라에서 물가상승률이 중앙은행의 목표치(물가가 오르는 상태라면, 기업이든 소비자든 물자를 빨리 사들이는 쪽이 유리하고, 이렇게 되어야 경기를 살릴 수 있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들은 물가상승률 목표치를 정해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왔다)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저금리가 대세로 굳어졌다. 가계든 기업이든 부채비율이 증가하는 추세인데, ‘부채 대비 부가가치 생산’의 비율은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10원을 빌린 기업이 10원만큼의 부가가치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노동생산성 상승률도 정체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자산소득자들로 부(富)의 집중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경제가 나쁜 균형상태(bad equalibrium)로 진화한 국면이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저금리, 저물가, 저성장, 고부채, 불평등으로 요약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상태의 세계경제에 가해진 전례 없는 외생적 충격이다.

지난 세계 금융위기 때 미국 정부는 ‘당시’ 시가총액 1위 기업이었던 GE(제너럴일렉트릭)는 물론 씨티은행, AIG 등을 부분적으로 국유화했다. 이 기업들의 지분을 사들여 자금을 주입했다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해당 기업의 소유권 중 일부가 정부에 귀속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부분적 ‘국유화’가 이뤄진다. 다만 여기서 국유화는 ‘사회주의’ 같은 이념적 이유가 아니라 대기업들의 파산을 막기 위한 조치다. 비록 일시적이긴 했지만, 국유화 자체는 이미 새롭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의 연준(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과 유럽중앙은행은 시중은행이 보유한 국채와 부실자산(부도날 수 있는 증권)을 대량 매입했다. 은행에 유동성을 투입해서 도산을 막아주는 한편 은행 대출 촉진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이었다. 국가가 경제위기 관리의 전면에 나선 경험이다.

ⓒReuter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이 3월3일 금리 인하 조치 후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재정지출에 소극적인 한국 정부도 나서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는 세계 금융위기 당시보다 훨씬 크고 비중 높은 모습으로 복귀했다. 국가가 민간기업들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대출을 보증하는가 하면 소상공인이나 가계에겐 직접 현금을 지급했다. 코로나19로 휴업 상태에 들어간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서 고용을 유지하도록 했다.

스페인 보건장관은 지난 3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립병원들의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영국 국무부는 코로나19 충격으로 인한 항공사 등의 파산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주요 교통수단들을 국유화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 역시 대기업에 대한 국유화를 검토 중이다. 영국과 덴마크 정부 등은 코로나19로 인한 ‘록다운’ 상황(예컨대 휴업)에서 고용관계를 유지하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임금의 상당 부분을 보조해준다.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예금 및 대출 기능을 가진 금융기관) 이외의 부문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비전통적 통화정책’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미국 연준은 민간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민간기업이 빌린 원금과 이자)뿐만 아니라 가계대출까지 사실상 보증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중앙은행이 ‘기업이나 가계가 부도를 내지 않도록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할 것’이니, ‘시중은행들은 안심하고 민간 부문에 계속 대출하라’는 신호를 준 것이다(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

재정지출에는 언제나 궁색한 입장이었던 한국 정부마저 이번 코로나19 국면에서는 적극적 구제정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1차, 2차, 3차(6월17일 현재 국회 계류 중) 추가경정예산과 기타 금융지원(대출 등)을 합치면 ‘기업 지원’에 175조원, ‘민생안정 및 고용안정’에 47.8조원이 책정되어 있다(일부는 이미 투입).

중국은 한국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지난 5월 양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회의) 기간에 중국 국무원은 재정적자 한도를 GDP 대비 2.6%에서 0.8%포인트 높인 3.4%로 상향 조정했다. 중앙정부가 민간에서 사들이거나 투자할 돈을 조달하기 위해 ‘특별 국채’를 발행했다. 세계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이후 13년 만의 일이다. 각 성(지역 정부)에도 5월 말까지 2900억 위안 규모의 ‘특수목적 채권’을 발행하라고 지시했다. 발행 시점까지 적시한 것은 개입 시기를 놓치지 말라는 의미다.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올해 들어 2차에 걸쳐 지급준비율을 낮춰 시중은행들에 총 1조3500억 위안의 유동성을 공급한 바 있다. 재정정책이든 금융정책이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태세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유럽연합도 달라졌다. 변화의 징후는 독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독일은 코로나19 이후 경제가 멈춘 상태에서 개인들에게 즉각 현금 지급을 단행했다. 또한 자영업 및 중소기업 지원, 고용유지 등에 GDP의 4.5%에 달하는 구제 방안을 제시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독일의 재정적자 규모가 GDP 대비 5.5%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그동안 독일은 다른 유로존(Eurozone) 국가들에게 엄혹한 재정준칙(유럽연합 회원국들의 정부지출을 일정한 범위 내로 묶는 원칙)을 강요해왔다. 이런 독일이 자국의 원칙을 파괴한 것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폰데어라이엔은, 코로나19로 타격받은 회원국을 지원하기 위해 7500억 유로(약 1020조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에게 ‘EU 보조금’ 형태로 4000억 유로를 ‘지급’할 예정이다. 반면 경제 상태가 양호하고 재정 여력이 있는 국가들에게는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기로 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국가부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경우, 두 나라의 EU 탈퇴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회원국들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처럼 군림하던 독일 메르켈 총리조차 두 나라의 이탈을 앉아서 지켜볼 용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EPA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5월4일 코로나19 봉쇄 조치 완화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EU 역사상 기금을 조성해서 어려운 회원국에게 무상으로 지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럽집행위원회가 EU 내에서나마 ‘회원국 간 재분배’를 시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재정정책은 경제학 교과서에서든 현실 경제 운용에서든 부차적인 정책 수단으로 간주된다. 특히 재정적자(국가가 세금 등으로 받는 수입인 ‘세입’보다 쓰는 돈인 ‘세출’이 더 큰 경우)는 금기로 전락했다. 오늘날 경제정책의 핵심 수단은 기준금리를 조정하는 방법으로 통화량을 늘리거나(불황 때) 줄이는(경기과열 때) 것이다(통화정책).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통화정책의 한계가 뚜렷해졌다. 2009년 이후 선진 각국은 통화정책을 극단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서 기준금리를 0%(제로금리)나 심지어 마이너스 수준으로까지 낮췄다. 이와 함께 중앙은행들은 양적완화로 민간은행이 보유한 국채와 부실자산(부동산 관련 증권)을 대량 매입했다. 그 덕분에 금융위기 이전엔 1조 달러 정도였던 미국의 본원통화가 2014년 말쯤에는 3조 달러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통화정책을 극단으로 몰아간 제로금리, 양적완화 등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는 침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불황기는 길고 호황기는 짧았다. 전형적인 장기침체의 특징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이런 현상을 ‘대불황’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케인스주의자’인 래리 서머스(미국 전 재무장관)는 ‘영속적인 장기침체’라는 명칭을 붙였다.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풀린 돈은 금융권에서 맴돌면서 주식, 주택, 파생금융상품 등 자산 가격만 크게 올려놓았다. 통화정책의 효과에 대한 회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실증 연구에서도 새로운 결과가 나왔다. 2015년 IMF와 OECD가 각각 발간한 〈세계경제 전망〉은 공통적으로 ‘재정정책은 총수요를 증가시킬 뿐 아니라 추가적인 기업투자를 촉진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유발한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정부 수요가 총수요를 증가시키고 총수요의 증가로 인해 설비가동률이 상승하면 기업투자도 확대된다는 논리다.

IMF의 수석 경제학자였던 올리비에 블랑샤르 MIT 교수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조달한 자금을) 공공정책에 쓰는 쪽이 민간이 채권을 발행해 자율적으로 투자하는 것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과거에 지배적인 견해는, 정부가 자금을 빌리면 민간기업들이 빌릴 수 있는 돈이 줄어들어 경기가 침체된다는 것이었다. 블랑샤르 교수는 정부가 돈을 빌려 지출할 때 민간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전체 경제에 더 효율적일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이었던 제이슨 퍼먼 역시 2016년 한 심포지엄에서 ‘재정정책이 통화정책보다 경기부양에 효과적’이며 ‘부채비율이 높은 국가들은 재정적자 정책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저성장으로 총수요가 증가하지 않는 지금 같은 세계경제 환경에서는 재정정책이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IMF 소속 연구자인 옵스트펠드 등은 재정지출로 투자와 경제성장을 달성하면 GDP 대비 부채비율이 오히려 낮아질 수 있다는 실증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2016년). 부채가 많고 적고를 따지기보다는 정부가 빚을 내어서라도 적극적인 경기부양을 하는 쪽이 시장을 활성화하고, 기업투자를 유발하며,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취지다.

경제학계는 재정적자 누적, 정부 파산 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재정정책보다 통화정책을 선호했다. 그러나 이제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도 경기부양에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새로운 정책수단을 갈구하게 된 상태다. 경제학이 케인스를 다시 호출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가 시장경제 주체들의 행위를 규제할 뿐만 아니라 직접 링에 올라서 뛰는 선수가 된 것이다.

ⓒEPA5월28일 리커창 중국 총리가 제1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식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 중계되고 있다.

기업과 금융 살리는 데만 몰두한 과거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우리는 세계의 실상을 낱낱이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전염병은 보편적 위기다. 그러나 전염병의 충격은 계급적이고 인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기관인 엠브레인퍼블릭에 따르면 코로나19로부터 가장 큰 소득 감소를 겪은 계층은 프리랜서·특수고용직, 파견용역 사내하청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아르바이트 순서로 나타났다. 상용직이 가장 적게 피해를 보았다. 미국에서는 흑인 저소득층의 감염률 및 사망률이 다른 비교 집단에 비해 현격히 높게 나타났다. 시장은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이나 감염병에 따른 사회적 위기에서 특별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경제학 교과서든 대중의 통념에서든 정부의 경제 개입은 비효율적인 반면 시장은 효율적이라는 개념이 지배해왔다. 그러나 2009년 세계 금융위기는 그와 같은 신화를 무너뜨렸다. 시장은 고위험을 동반하는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무분별한 투자를 부추겼을 뿐이다. 이로 인한 위기는 결국 ‘보이지 않는 손(시장)’이 만들었지만, 위기 수습은 ‘보이는 손’인 정부가 감당했다. 그러나 정부는 기업을 구제하고, 금융 시스템을 살리는 것에만 몰두했다. 경제위기 때마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켜 기업과 은행을 살렸다. 개인은 파산해도 되지만 은행이 파산하면 충격파가 너무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위기를 초래한 1%가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양상이 반복되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는 이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생태적 균형과 불평등 해소, 공동의 번영을 위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만이 기업을 살리면서도 일자리를 유지하고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 위기에 대한 대응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번영의 주체로서 ‘국가의 역능’은 결코 무시해서 안 된다. 정부의 역할은 단지 총수요를 자극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제도를 잘 설계해서 시장에 유인을 제공하거나 벌칙을 통해 민간 부문의 행위를 규제할 수 있다. 잘 설계된 제도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하고,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도록 하며 친환경 분야에서 수만 개 일자리를 만들 수 있게 한다. 국가를 통해 실현 가능한 수많은 정책 수단들을 선택지에서 배제할 이유는 없다. 다만 국가의 역능을 어떤 방향으로 활용할 것인가는 온전히 그 사회의 세력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정부의 ‘선한 의지’만 믿는다면 과거가 반복될 뿐이다. 세계의 시민들이 거리로 달려 나왔듯이, 한국 사회 역시 노동조합, 시민사회, 정치사회의 능력이 국가의 역능이 어디로 발현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기자명 남종석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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