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성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신뢰와 사생활 보호라는 기본적인 인간성을 기대한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 인간성을 저버린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유포하는 행위가 부끄러운 것이다. 맞서 싸우기로 한 당신의 용기는 박수받아야 하며, 목소리를 내기 어렵더라도 당신을 도우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만이라도 기억하자.

신고나 법적 절차는 진행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피해자인 당신에게 달려 있다. 도움을 청한다면 당신이 받을 수 있는 지지는 다음과 같다. 전문 상담 활동가와 이야기를 시작하고, 필요하다면 전문 심리상담이나 의료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두려움이나 공포, 슬픔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당신을 잠식한다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다. 뇌의 회로를 재설정하는 치료, 점진적 근육이완법, 마사지, 운동치료, 개인상담, 그룹상담 같은 다양한 치료법과 당장에 이용 가능한 팁을 배울 수 있다. 섭식장애나 성교통, 만성통증증후군 같은 몸의 변화가 있다면, 만성화되기 전에 도움을 구하자.

기계와 이미지로 섹스를 배우고…

고통은 전염되어 여성들 모두가 집단적 우울 상태이다. 비혼·비연애를 결심할 수 있다. 그 결심이 바뀔 수도 있고 그런 자신에게 가혹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모두 크게 데고 나서도 같은 실수를 한다. 회복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단정적으로 나와 주변인을 가두지 말자. 이른바 ‘n번방 사건’ 관전자 26만명보다는 이 사건 해결 청원에 동참한 500만명을 생각하며 힘을 내자.

당장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떠내려온다면 상류로 올라가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해야 한다. 기성 언론이 아연실색해 조주빈의 학창 시절을 캐고, ‘성 갈등’이냐 ‘혐오 범죄’냐 갑론을박한다. 그런데 10대, 20대의 하위문화에서는 이게 ‘정상’이 된 지 오래다. 인간과의 접촉이 아니라 기계와 이미지로 섹스를 배우고, 고통스러운 표정이 즐거운 표정보다 성적으로 매력 있다고 생각한다. ‘처벌을 안 받는다면 강간하겠다’는 응답이 50%를 넘는다(〈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나오미 울프, 2016). 여성에게 섹스가 공포가 되는 동안 남성에게는 섹스가 지배와 동의어가 되었다.

성착취, 성폭력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 세계보건기구(WHO) 홈페이지에는, 우리가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것이라는 자기반성으로 시작한다. 보건의료 정책에는 위험 감축(risk reduction)과 사전 예방(primary prevention) 전략이 있다. ‘SNS에 개인정보를 올리지 말자’ ‘모르는 사람이 주는 술을 마시지 말자’는 등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책임을 강조하거나, 성범죄자 신상을 공개하고 처벌하는 등 악마화된 일부의 일탈로 치부하는 것은 뭔가 노력한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결국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방식이다.

사전 예방은 애초에 폭력과 불평등을 정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타깃으로 한다. 예방은 개인·관계·사회 모두의 영역에서 일어나야 한다. 노사가 합의해 성범죄자에게 고용 불이익을 주고 인사고과에 반영하자. 방송 출연자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먹이거나 굶기며 고통과 모욕을 주거나, 외모를 품평하는 대중문화에 항의하자. 강간과 폭력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동의와 신뢰가 섹시하고 뿌듯한 감정이고, 관계는 사거나 소유하는 게 아니라 맺는 거란 것을 스마트폰을 손에 쥐는 나이 이전부터 가르치자. 여성과 남성의 성·욕망이 똑같이 존중받을 때, 고통스러운 욕망과 불쾌한 쾌락은 순수한 즐거움으로 이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섹스를 합시다.’ 이 한 문장이 이렇게나 어렵다.

기자명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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