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쉬기로 결정했다. 잔병치레가 늘더니 급기야 대상포진을 진단받고 나서야 이게 ‘알람’이구나 싶었다. 직장과 활동가 동료들에게 ‘번아웃’을 선언하고 퇴직과 휴식을 준비 중이다.

번아웃이라는 단어는 일터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요구받는 상황에서 불만·피로가 누적되고 좌절감·냉소에 빠지며 효율성이 저하되는 현상으로 정의된다. 어떻게 노동조건을 개선할지, 어떻게 하면 노동자가 건강을 유지하면서 지속 가능한 노동을 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의료계에서도 의료인의 직무 스트레스와 에너지 소진이 공중보건의 중요한 이슈이다. 고 박선욱·서지윤 간호사를 극단으로 내몬 ‘태움 문화’에 대한 공론화, 전공의들의 근무시간을 주 88시간으로 제한한 전공의특별법 등이 그 한 단면이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피로한 의료인은 처방이나 투약 오류를 많이 낼 수밖에 없고, 기력이 소진되어 우울한 의료인은 건성으로 환자를 보게 된다.  

최근 미국 공중보건학계에서는 ‘도덕적 부상(Moral injury)’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 단어는 베트남전쟁으로부터 복귀한 군인들에서 기인한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가 겪는 악몽이나 과각성, 신체 통증 같은 증상과는 조금 다르고 치료법에도 반응하지 않는 군인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인의 신념에 반해 강제로 총을 들고, 상부 명령이지만 민간인을 죽인 ‘나’는 계속 도덕적인 인간인가를 고민한다. 신체 안전에 대한 위협과 고통을 계속 느끼는 PTSD에 비해 도덕성과 가치체계에 내상을 입은 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도덕적 부상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미국 의료계에서 번아웃을 대신할 단어로 도덕적 부상을 쓰자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도 비슷하다.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면 의료인 개개인에게 스트레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책임을 부과하는데, 이는 망가진 시스템을 반영하지 못한다. 환자에 대한 최선의 진료를 우선순위의 맨 앞에 두라고 훈련받아온 의료인이 여러 이해당사자(경영자· 제약회사·보험회사·사법 시스템 등)에게 영향을 받을 때, 이 반복적인 타협과 체념은 내상을 입힌다. 이를테면 한 달에 진료회의보다 경영회의 시간이 더 많다. 환자와 눈을 마주치는 시간보다 차트를 작성하느라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더 많고, 건강보험공단에 진료비를 청구하기 위한 전산작업, 보험회사 제출용 서류를 써주는 시간이 진료시간을 좀먹는다.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과 의료기록은 믿지 않고 굳이 한 번 더 써달라는 법원용 소견서까지 작성하고 나면 ‘저녁이 있는 삶’은 요원해진다.

“혼자 앓다 사라지진 않겠다”

특히 내가 천착해온 영역의 일은 더 막막하다. 성폭력 피해자를 치료하고 사회로 복귀시켜도 자꾸자꾸 온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 후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이 어두운 얼굴로 임신중지를 상담하거나 불법 약을 먹고 온다. 남편의 구타가 일상이라 흡연과 음주를 줄일 수 없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골반염이 자꾸 재발하는 환자에게 콘돔을 사용하라는 처방을 내려도 씨가 안 먹히면, 항생제를 처방할 수밖에 없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모토는 ‘사회가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이다. 묻지마 폭행과 자살을, 산업재해를, 부정의와 환경오염을 보는 의료인과 활동가들은 지금 너무 아프다.

‘힘들었다’고 말하고 다닌다. 다시 일을 할 때 더 많은 동료와 연결되고 싶다. 마음 수련을 하고 체력도 챙기려 한다. 업무를 줄이고 좀 더 환자에게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지 궁리 중이다. 혼자 앓다 사라지진 않겠다. 다들 힘들다고 서로 말하고, 한걸음 쉬었다가 어떻게 완주할지 같이 모색하자.

기자명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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