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스웨덴대사관 제공백희나 작가(위)의 장점 중 하나는 독자들을 따뜻한 연대와 보살핌의 자리까지 데려간다는 데 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는 이름은 낯설어도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삐삐는 그저 유명한 캐릭터로만 받아들여질 뿐, 아동문학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부모 없이 혼자 살고, 보육원으로 데려가려는 경찰을 가볍게 지붕 위로 집어던지고, 가방 가득 금화를 가지고 있고, 말씨름으로 상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삐삐.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힘을 모두 갖춘 이 슈퍼히어로 이야기는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하다 1945년 출간되어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이 거침없는 캐릭터를 통해 어린이라는 존재도 힘과 자유를 꿈꿀 권리, 무거운 현실을 가볍게 넘어서게 해주는 환상을 누릴 권리가 있음이 선포된 것이다.

“단순히 누리기만 할 수는 없다” “그에 따른 책임을 다하며 강인하게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고난에 맞서 용기 있고 품위 있게 싸워야 한다” “용서하고 사랑하며 서로 화합해야 한다”…. 린드그렌은 삐삐 이후에도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왔다.

〈지붕 위의 카알손〉은 구소련에서 삐삐보다 훨씬 더 인기가 있었다. 지붕 위에 살면서 등에 달린 프로펠러로 날아다니는 꼬마 어른 카알손. 퉁명스럽고 제멋대로이고 잘난 체하면서 말썽만 부리는 이 남자는 공산 치하에서 억압받으며 숨죽여 살던 사람들의 해방구였다. 서슬 퍼런 당국의 검열이 ‘아동문학’을 건성으로 넘긴 덕분이었다. 원수지간인 두 산적 부족이 양 두목의 딸과 아들이 가출해서 함께 살 정도로 사랑에 빠진 덕분에 화해한다는 〈산적의 딸 로냐〉는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면서 동서독의 화합을 촉구했다는 평도 받는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죽음 이후 환생 이후 또 죽음이라는 ‘무서운’ 모티프로 평론가들을 바쁘게 만들었다.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걸어가야 하는 칼날 같은 고난의 길을 그린 〈미오 나의 미오〉는 모호한 결말과 동성애적일 수 있는 코드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연합뉴스백희나 작가는 그의 대표작인 〈구름빵〉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위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구름빵〉의 한 장면.

〈구름빵〉은 한국 그림책의 분기점

세계 아동문학사에 깊고 넓은 족적을 남긴 린드그렌이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아동·청소년 책만 쓴 이 작가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대신 2002년 린드그렌 사후 스웨덴은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며, ‘린드그렌의 정신 안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작품’에 수여하는 알마상(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을 제정했다. ‘아동·청소년 문학에 대한 흥미를 고취시키고 아동 인권을 높이는 작품과 작업’이 기준이다. 각계 전문가들이 1년 내내 꼼꼼히 참여하는 심사, ‘아동문학상으로는 가장 부유’하다는 상금(500만 스웨덴 크로나. 6억원이 넘는다), 왕실까지 참여하여 일주일가량 축제처럼 진행하는 시상식 등으로 이 상은 명실상부한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자리 잡았다.

2003년 첫 수상자는 미국의 모리스 센닥과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해마다 글 작가, 그림 작가, 스토리텔러, 독서운동가 중 하나 이상에게, 활동 한 가지나 작품 하나가 아니라 업적 전체에 대해 주어진다. 남아프리카 대안교육연구회 같은 낯선 단체가 숀 탠, 볼프 에를브루흐, 필립 풀먼, 재클린 우드슨 같은 세계적 작가들과 함께 수상자 대열에 들어가 아동문학을 대하는 우리 눈을 넓혀준다. ‘스웨덴 국민이 세계에 주는 상’이라며, 어떤 기업이나 부호의 스폰서가 아니라 국민 세금으로 제정했음을 밝히는 대목에서는 알마상에 대한 모든 스웨덴 사람들의 자부심이 넘치는 듯하다.

수상 이후에는 세계 최고 작가 반열에 확고히 서게 되는 이 상을 한국의 그림책 작가 백희나가 받는다는 소식에 K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지부, 알마상 추천권이 있다)는 얼떨떨해졌다. 그를 2014년 후보로 올린 적은 있으나, 후보군에 6년간 머물러 있다가 수상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가장 얼떨떨했던 사람은 아마 수상자 본인이었으리라. 철저한 비밀유지 정책에 따라 공식 발표 30분 전에야 연결 상태도 좋지 않은 전화로 수상 소식을 들은 작가는, 뭔가 다른 상이려니 하면서 감사를 표하면서도 “잘 안 들리니까 메일로 주세요” 하며 경쾌하게 마무리 지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사상 초유의 온라인 중계 발표는 이런 청량한 순간도 만들어냈으니, 유머와 파격을 좋아했던 린드그렌도 즐거워했을 듯하다.

백희나 작가의 2004년 첫 책 〈구름빵〉은 린드그렌다운 자유정신과 환상성을 훌륭하게 구현한 작품이었다. 삐삐가 스웨덴 아동문학의 분기점이었다면, 〈구름빵〉은 한국 그림책의 분기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그림책은 교육과 계몽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구름으로 만든 빵을 먹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고양이 남매 이야기는 어린이다운 유희 정신의 숨통을 시원히 틔워주는 물꼬였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이 작품에 열광한 이유는 그 스토리와 입체 비주얼이 주는 감각적 즐거움과 해방의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감각을 통해 우리는 그림책이 교육과 계몽은 물론 장유유서라는 유교 질서,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라는 짐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책읽는곰 출판사 제공〈장수탕 선녀님〉(위)은 선녀나 여자의 몸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생물학적 혹은 왜곡된 사회적 욕망 모두를 단번에 깨뜨린다.

이후 쏟아진 한국의 자유로운 그림책들 전면에는 항상 백희나 작가가 있었다. 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장수탕 선녀님〉에서는 전설 속 선녀와 현실의 모녀가 대중목욕탕에서 어울린다. 시대와 세대의 경계,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바탕 펼쳐지는 놀이판. 늙은 여자, 중년 여자, 어린 여자애의 벗은 몸이 한 권에 가득하다. 이 나신의 향연과 쭈글쭈글 그로테스크한 선녀의 얼굴에 어떤 독자들은 깜짝 놀라거나 화를 내기도 했다. 선녀나 여자의 몸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생물학적 혹은 왜곡된 사회적 욕망 모두를 단번에 깨뜨리는 이 책은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백희나 작가의 장점 중 하나는 이런 파격의 즐거움을 넘어서 따뜻한 연대와 보살핌의 자리까지 독자를 데려가는 데 있다. 너무 더워 달까지 녹아내린다는 설정이 기발한 〈달 샤베트〉. 뚝뚝 떨어지는 달물을 받아 늑대 할머니가 샤베트를 만든다. 그걸 나누어먹는 아파트 단지의 동물 주민들. 백희나 작가는 거의 언제나 이 (나누어)먹기 모티프로 우리의 기본 욕망을 감각적으로 만족시키고 거기서부터 공동체 의식이나 연대감을 끌어올리는 차원까지 나아간다.

〈구름빵〉에서 회사에 가는 아빠와 빵 굽는 엄마, 남매라는 딱 떨어지는 가족공동체가 마음에 걸렸던 백희나 작가는 이후 작품에서는 가족 형태의 범위를 다양하게 넓힌다. 한때 ‘결손’이라고 불렸던 형태의 가정, 일상이 험난한 워킹 맘 가정, 혈연이 확실치 않은 가정, 인간과 동물이 결합한 가정에 천적관계인 두 종의 동물이 이루는 가정까지 담아낸다.

ⓒ책읽는곰 출판사 제공너무 더워서 달이 녹아내리고, 뚝뚝 떨어지는 달물을 받아 늑대 할머니가 샤베트를 만들고, 이를 주민들이 먹는다는 설정이 기발한 〈달 샤베트〉.

백희나 작가의 도저한 장인정신

종이, 트레이싱 페이퍼, 라이트박스, 스컬피 등 각종 재료로 만든 캐릭터와 배경을 영화적으로 촬영해 만든 비주얼은 그 다양한 소재를 다이내믹하게 전달한다. 무엇보다 일종의 찰흙이라는 스컬피로 정교하게 빚어낸 형상은 그의 도저한 장인정신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인체가 표현할 수 없는 자세와 표정까지 한껏 증폭시켜 보여주는 그 조각 작품들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든 백희나만의 독특한 그림책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인공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백희나 작가의 작품세계, 린드그렌과 알마상의 의의를 마음껏 논하고 싶은 이 시점에 우리 이목은 그보다 〈구름빵〉 저작권에 쏠려 있다. 이 지면이 그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이런 가정을 해보자.

가난한 싱글 맘이 출판사에 투고한다. 검증 안 된 작가의 책을 내줬다가 안 팔려서 입는 손해는 어떡하나. 대충 팔리더라도 출간 경비, 홍보비, 회사 운영비가 충당되어야 한다. 잘 팔리더라도 그 이익으로 안 팔린 책의 손해를 메워야 한다. 출판사는 작가와 매절로 계약한다. 신인은 다 이렇게 하는 거라면서. 영문 모르는 작가는 책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사인을 한다. 그런데 책이 엄청나게 성공한다. 수십 개국에서 출간되고, 2차 3차 저작물과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시리즈 영화가 제작된다. 작가에게는 이미 지불된 원고료와 병아리 눈물만큼의 지원금 외에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는다. 캐릭터는 별별 양상으로 변형되고 온갖 스토리가 딸려 나와도 작가는 입 한번 뻥긋할 수 없다. 절망한 작가가 불공정계약에 의한 저작권을 돌려달라, 캐릭터에 대한 권리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한다. 하지만 법원은 그 계약이 불공정하지 않다며 2심까지 작가 패소 판결을 내린다.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에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를 얹어본 것이다. 〈해리포터〉는 영국의 어떤 부분을 세계적으로 만들었지만, 우리는 〈구름빵〉으로 한국의 어떤 부분을 세계적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 스웨덴의 린드그렌, 영국의 조앤 롤링 같은 어린이책 분야의 국가대표 문화 아이콘이 싹부터 이렇게 짓밟히는 현실. 백희나 작가의 수상 소식은 기쁨 끝에 찌르는 통증을 부른다. 작가들은 무엇을 꿈꾸며 무슨 힘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역설적이게도 백희나 작가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지독한 절망 속에서도 유쾌하고 따뜻하게 빚어낸 최근작 〈나는 개다〉에서 작가가 가장 사랑한다는, 강아지가 아이를 향해 기쁨과 갈망에 넘쳐 달려가는 장면이 답이 될 것이다. 그 장면은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자리에 놓이더라도 어린이책을 향해 달리는 작가의 모습이다.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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