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너머를 말하는 SF 지금 여기에 우뚝 서다
  • 김영화 기자
  • 호수 643
  • 승인 2020.01.16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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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SF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미국의 유력한 출판그룹이 한국 SF 판권을 사간다. 한국 SF의 입지를 넓히는 데 한몫을 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임원진에게 한국 SF의 현재와 미래를 들어보았다.
ⓒ시사IN 신선영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제2기 임원진인 듀나 대표(가운데·얼굴을 비공개로 활동하는 듀나 대표는 토끼 인형 ‘듀나벨’로 대신했다), 전삼혜 부대표(오른쪽), 이산화 운영이사(왼쪽).

타임머신을 타고 도착한 2138년의 지구에는 남자가 없었다. 남녀 간의 오랜 전쟁 끝에 패배한 남성들이 화성으로 쫓겨난 후 여성들은 지구에 ‘여인천하’를 건설했다. 이들은 월경을 없애기 위해 난소 제거 수술을 받고, 부부의 개념이나 가족제도 등을 파괴한다. 1967년 문윤성 작가가 쓴 SF 소설 〈여인 공화국〉이 그린 미래 사회다. 50여 년 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그린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장편 과학소설이다. 2018년 〈완전사회〉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한국 SF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2019년은 특히 그동안 누적된 성과가 가시화된 해였다. 김보영 작가의 SF 소설 3편의 판권이 미국 출판그룹 ‘하퍼콜린스’에 팔렸고 2019년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출간 6개월 만에 3만3000부를 찍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다. 조남주, 장강명, 정세랑 등의 작가들도 SF 문학을 선보였다. SF가 소수를 위한 장르문학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출판시장에서 입지를 넓혔다.

“한국이 SF 불모지라고 말하는 것은 SF 작가들이 쌓아온 계보와 성과를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말이다.” SF 소설가 듀나 작가는 한국 SF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불모지론’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문학 장르에서 비주류였던 것은 맞지만, 장르의 성장을 순문학의 관점에서 저울질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1967년 첫 장편 과학소설이 발간된 이후로도 복거일, 김보영, 배명훈 등 한국 SF 작가들은 꾸준히 활동했다. 시간이 지나며 작품 수가 쌓였다. 어느 날 갑자기 유행한 게 아니라 한국 SF를 써온 작가들의 작업이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규모를 형성한 것이다.

PC통신이 시작된 1990년대부터 온라인에서 SF 작품 활동을 시작한 듀나 작가는 1세대 SF 작가다. 2019년 12월 그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작가연대)’ 대표로 취임했다. 작가연대는 신진 SF 작가들을 육성하고 SF 작가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2017년 12월 출범한 단체다. 현재 구병모, 김보영, 정세랑, 배명훈 등 SF 작가 52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신진 SF 작가를 육성하기 위한 소설 창작 워크숍을 열었고 웹툰 업계 창작자들의 불공정 계약 관행에 항의하는 등 연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2019년 6월에는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여해 ‘한국의 SF 소설’을 주제로 라운드 테이블을 개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국내 최초 SF 무크지 〈오늘의 SF〉를 발간했다. 지금의 SF에 대한 높은 관심과 작가연대의 창립은 무관하지 않다.

ⓒ시사IN 신선영편집위원 전원이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회원으로 구성된 SF 전문 무크지 <오늘의 SF>와 굿즈.

페미니즘과 만나면서 대중과 가까워져

작가연대 출범 2주년을 맞아 2기 임원진 세 명을 만났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듀나 작가는 텔레그램을 통해 인터뷰에 참여했다. 듀나 작가를 상징하는 토끼 인형 ‘듀나벨’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모두 작가연대가 자체 제작한 조끼를 입었다. “일단 연대가 가능해졌다. 지금까지 작가들은 각자 활동했고 그러다 보니 SF와 관련해 현실감각을 가질 만한 데이터도 부족했다. 지금은 보호막과 스피커가 생겼다.” 창립 멤버이기도 한 듀나 작가에게 작가연대가 생긴 뒤 달라진 점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작가연대 창립의 기본 취지는 작업자의 권익 보호다. 특히 출판사와 처음 계약을 앞둔 초보 작가들에게는 든든한 뒷배다. 작가들이 경험했던 부당한 관행 사례를 모으면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작가가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한국 SF의 미래와 맞닿아 있다는 게 작가연대의 철학이다.

부대표인 전삼혜 작가와 운영이사를 맡은 이산화 작가는 2010년대에 데뷔한 신예다. 전 작가는 스스로를 1.5세대 혹은 2세대 작가라고 말한다. 1세대와 달리 이들은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이 등장하는 한국어 SF 소설을 읽고 성장했다. 이들이 보기에 지금 한국 SF의 붐은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이 작가는 “세대를 거치면서 1세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신예 작가들이 두드러지게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장르의 양적·질적 성장을 이룬 결과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 작가는 극장에서 〈어벤져스〉를 보고 자랐고 손 뻗으면 닿는 곳에 SF가 있었다. 그만큼 SF를 접하기에 자연스러운 환경이었다.

세 작가 모두 공통적으로 체감하는 변화가 있다. 국내 독자들이 한국을 배경으로 한 SF를 더 이상 낯설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흥행한 영화 〈인터스텔라〉 〈그래비티〉처럼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의 무대는 보통 백인 중심이었다. 정세랑 작가의 ‘리셋’에서는 문명을 파괴하는 거대 지렁이들의 첫 습격 장소로 경주가 나오고, 김초엽 작가의 ‘나의 우주영웅에 관하여’에서는 ‘재경’이라는 한국인 우주비행사가 등장한다. 예전에는 과감한 설정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니다. 실제로 한국인 우주비행사가 나왔고, 2016년 알파고 대전이 열린 곳이 한국이다. 듀나 작가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전 세계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영어를 쓰는 백인 남성의 미래가 아닌 각자의 미래를 다양하게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SF 소설은 ‘공상’과학소설로 오역되곤 했다. 시간여행이나 외계인 등 현실과 동떨어진 소재를 다룬다거나 근거가 없는 상상이라는 오해 때문이다. 작가연대의 1대 대표였던 정소연 작가는 〈오늘의 SF〉 창간사에 SF 장르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SF는 지금 이곳 너머를 말하는 장르지만, 한편으로 SF라는 장르는 지금 여기에 있다. 독자도 창작자도 비평가도 엄연히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주류였던 장르문학은 ‘지금 이곳’의 화두 중 하나인 페미니즘과 만나면서 대중에게 좀 더 가까워지게 된다. 실제로 고전 페미니즘 SF 소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부터 페미니즘 SF 소설이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다. 최근 몇 년, 1960년대부터 여성 작가들이 써온 SF 단편을 모아서 펴낸 〈혁명하는 여자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체체파리의 비법〉, 마거릿 애트우드의 1985년작 〈시녀 이야기〉 등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가부장적 질서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SF 소설은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적절한 도구가 되었다. 여자들이 권력을 쥔 세상이나 동성혼을 포함한 대안 가족은 SF에서 활발하게 실험되어온 주제다. 그중에서도 파시즘이 창궐하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페미사이드(〈체체파리의 비법〉)와 여성이 출산의 도구로 통제되고 관리되는 현실(〈시녀 이야기〉)을 다룬 작품들은 강남역 살인사건, 낙태죄 폐지 논란 등 한국 사회의 뜨거운 화두와 만났다. 듀나 작가는 “지금 이 시대에 페미니즘의 흐름을 무시하고 이 장르를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얼굴을 비공개로 활동하는 듀나 대표를 대신한 토끼 인형 ‘듀나벨’. 듀나 대표는 텔레그램 채팅방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국내 SF 작가들도 ‘페미니즘’이라는 사회적 의제에 반응했다. 김보영 작가는 ‘얼마나 닮았는가’에서 표류하는 우주선에 탄 AI가 목격한 인간의 여성혐오를 그렸고, 김초엽 작가는 ‘관내분실’에서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를 보여줬다. 김초엽 작가는 이 작품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한국 여성 SF 작가들의 작품 중에는 여성, 노인, 장애인이 우주과학의 주체가 되는 서사가 자주 눈에 띈다. SF는 다수자와 소수자의 위치를 전복시키고 지금과 다른 시공간을 구현하기에 유리한 장르였다. “SF는 가능성의 세계를 그리기 때문에 소수자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파괴하는 것이 터부시되지 않는 영역이다. SF가 꼭 진보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 장점을 이용하지 않는 건 장르의 가능성을 낭비하는 것이다.” 전삼혜 작가가 느끼는 SF 장르의 매력이다.

“SF는 허구의 미래에 현재를 투영한다”

SF 작가들의 대화 주제에 ‘인류 멸망’이 단골 소재로 오르는 건 필연적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언젠가 문명이 파괴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은 SF 작가들 사이에서 공유된 감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듀나 작가에게 지금의 불행은 이미 ‘SF의 렌즈’를 통해 본 결과물이기도 했다. 실제로 고전 SF 소설 중에는 현실이 된 예언이 많다. 1972년 미국의 미래학자 데이비드 굿맨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예측을 137개로 분류하고 이 중 80개가 실현됐다고 밝혔다. 50년이 지난 지금,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소설 속 빅브라더는 현실이 되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의 출현도 2020년을 사는 우리에게 더 이상 SF적 상상이 아니다. 듀나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미래에 현재를 투영한다.”

SF 작가 중에는 과학도가 적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SF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이산화 작가는 최신 과학기술 소식을 챙겨 보는 편이다. 신경은 쓰지만 그걸 소재로 소설을 발표할 때쯤엔 이미 구시대 기술이 되어 있어 곤란할 때가 있다. 현실에 없는 기술을 상상하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든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너머를 상상해야 한다는 고민이 생긴다. 듀나 작가는 문학의 본질을 강조한다. “이야기꾼들은 현실에만 갇힐 수 없다. 다른 세계, 가능한 세계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 과학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하지만 SF 장르는 그 시대의 과학 발전에 갇히지 않는다.” 자신의 창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과학기술로는 인터넷을 꼽았다. “내가 창작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고 인터넷을 통해 상상력을 키웠다. SF는 존재하는 과학기술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더 매료되는 장르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제공2019년 6월21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국의 SF 소설’을 주제로 라운드 테이블이 열렸다.

작가들이 최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문제는 기후변화 위기다. 듀나 작가는 “기후변화 위기로 인한 재난은 더 이상 SF가 아니다. 그레타 툰베리는 이미 아포칼립스를 목전에 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SF 장르에서 경고해왔던 오래된 미래다”라고 말했다. 디스토피아가 이미 현실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SF 작품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기후변화 위기로 인한 재난을 막는 건 여전히 SF의 영역”이라고 이산화 작가는 말한다. 위기를 경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재난을 막을 수 있는 긍정적인 답을 찾는 것도 SF 작가들의 몫이라는 의미다. 현실 세계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방법들도 SF 세계에서는 실험이 가능하고,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다. 이산화 작가는 “지금보다 한 발짝 나아간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고, SF는 이것을 하기에 좋은 장르다”라고 말했다.

세 작가는 앞으로 2년간 작가연대를 이끈다. 한국 SF 장르가 추구하는 하나의 큰 그림은 없다. 작가 개개인이 그리는 ‘작은 그림’들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SF 작가들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지면을 확보하고, 적정 고료를 제때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부당한 관행이 드러나면 언제든 작가연대 조끼를 입고 다 같이 깃발을 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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