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충격과 분노가 가시지 않는 해였다. 매해 사건사고가 일어나지만, 어떤 사건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인장처럼 박혀서 사회의 행로를 바꾼다. 잘 알려진 연예인들이 여성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시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무원이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또 한번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환자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저지른 정신과 의사부터 불법 촬영을 저지른 ‘교사 지망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범죄자들이 터무니없이 가벼운 형량을 받았을 때, 사람들 앞에서 빛나던 이들이 연달아 우리 곁을 떠나갔을 때 여성 시민들은 마음속에 어떤 인장을 새겼을 것인가. 분노는 차곡차곡 모이고 있다.

하지만 분노만큼이나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비관이다. 부당한 일에 대한 분노는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동시에 정당한 결과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쉽게 지치게 한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라니, 세상이 바뀌기는 할까, 하는 하소연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현재와 싸우는 모든 이들의 한숨과도 같은 말이다. 그럴 때 우리에겐 인간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문학이 절실해진다.

새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 ‘지금 여기’가 아닌 ‘언젠가의 어딘가’에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가 있다면 SF가 아닐까. SF는 시대와 장소, 심지어 인칭까지 넘나들며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창조해낸다. 그런 SF 소설이 인간을 불신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에 빠지지 않고 따뜻한 ‘언젠가의 어딘가’를 그려낸다면, 그 이야기가 충분히 설득력 있고 심지어 아름답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힘을 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문학의 힘이란 그런 것이니까.

김초엽 작가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올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신인 소설가의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가장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해내는 책이다. 그가 그려내는 새로운 세계는 어떤 진입장벽도 없이 독자를 순식간에 끌어들인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인데도 어렵지 않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소설가의 뛰어난 역량 덕분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의 결함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이해하려 애쓴다. 그들은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닿지 못하는 곳에 가고자 하는 의지가 때로는 모든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모부터 가장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외계인에게까지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런 따뜻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더라도.

기자명 김겨울 (유튜브 ‘겨울서점’ 운영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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