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아랍 지역에서 가장 결속력이 강한 연합체는 걸프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 이하 GCC)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를 중심으로 쿠웨이트·카타르·바레인·아랍에미리트·오만 등 6개 걸프 연안 국가로 구성된 지역 협력 기구다. 대개 다자 연합체는 언어, 종교 및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느슨한 연대 이상을 넘어서기 어렵다. GCC는 달랐다. 아랍·왕정·산유국이라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6개국은 언어, 정치체제 및 경제구조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유사했다.

GCC는 1981년 사우디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냉전 시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석유 수출로 안온하게 살아온 사우디는, 걸프 건너편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국왕이 쫓겨나자 돌연 긴장했다. 이란발 혁명의 기운이 자국과 인근 왕정국가들을 타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특히 동부 해안지역에는 이란과 같은 시아파 주민들이 밀집해 있기에 더욱 민감했다.

여기에 이라크가 샤트알아랍 수로 영유권 분쟁으로 이란과 전쟁을 벌이자 또 다른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라크가 승리하면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뒤를 잇는 ‘아랍민족주의’의 맹주가 되는 셈이었다. 후세인은 늘 사우디나 걸프 왕실을 ‘왕좌에 앉은 난쟁이들’이라고 폄훼했다. 그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아랍 통일 공화정을 세우겠다고 공언해왔다.
 

ⓒXinhua5월30일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열린 걸프협력회의
긴급 정상회의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각국 정상들.

이란-이라크 전쟁은 누가 이겨도 걸프 왕정국가들에는 큰 위협이었다. 이란의 혁명 이슬람 사상이나, 이라크의 아랍 민족주의 모두 왕권에 치명적이었다. 위기의식은 GCC 결성의 배경이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 넘도록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만성적 전쟁(protracted war)은 그나마 걸프 왕정 처지에서는 다행이었다. 이란과 이라크 둘 다 지역 맹주로 자리매김하는 대신 전쟁의 상흔을 입고 좌절하게 된다. 오히려 GCC의 사우디가 막강한 석유의 힘과 정치적 안정, 그리고 미국의 후원을 내세워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냉전 내내 GCC의 연대 의식은 강하게 작동했고, 유럽의 사례를 좇아 궁극적인 정치연합체까지 미래 비전으로 상정하기도 했다.

지금 더 이상 GCC의 결속력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중동 분쟁의 갈등선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2017년 6월5일 사우디를 필두로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 등 걸프 왕정국가들은 카타르와 전격 단교를 선언했다. 표면적 이유는 카타르 국왕의 친이란 발언이었다. 내심은 다른 이유였다. 카타르가 이웃 걸프 왕정국가들의 위해 요인인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 극단주의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의 배경은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핵심은 사우디와 카타르의 오랜 분쟁이다. 견원지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쩌면 중동의 다양한 갈등 사례 중 가장 기이하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카타르 왕실인 알타니 가문의 조상은 사우디의 알사우드 왕실 가문과 매우 가까웠다. 18세기 중엽까지 아라비아반도 중부 내륙 네지드 지방에서 함께 살았다. 형제 관계에 비견될 만했다. 통치 이념에서도 GCC 6개국 중 사우디와 카타르 왕실은 유사하다. 두 나라만 이슬람 4대 법학파 중 가장 보수적인 한발리 학파를 따르고 있다(〈시사IN〉 제611호 ‘이슬람 분열시키는 내부의 칼날 3개’ 기사 참조). 어찌 보면 역사적으로, 이념적으로 가장 가까워야 할 두 나라다. 그런데 척을 지고 있다. 이에 맞물려 GCC 균열도 가속화되고 있다. 도대체 양국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AP Photo카타르는 이슬람 정치 세력을 후원해 아랍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한다. 위는 카타르 도하의 야경.

카타르는 1988년 소련과 독자 수교하면서 사우디와 마찰을 빚은 바 있다. 본격적인 갈등이 불거진 계기는 1995년 6월에 벌어진 카타르 왕정 쿠데타였다. 타밈 현 국왕의 아버지인 하마드 전 국왕이 자기 아버지 칼리파 국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사우디를 비롯한 GCC 국가들은 카타르의 정변을 규탄하고 나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정적 승계는 모든 왕실의 핵심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 권력 경쟁이 민감했던 사우디의 반발이 거셌다. 오만 한 곳만 예외였다. 카부스 국왕(술탄)은 1970년 영국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축출하고 왕이 되었다.

권력을 잡은 카타르의 하마드 국왕의 명분은 국가 개발이었다. 이란과 공유하는 걸프 해역에서 대규모 가스전이 발굴되자 하마드는 몸이 달았다. 결국 정변을 일으켰다. 선왕이 개발에 나서지 않고 걸프의 보수적 질서에 안주하려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란이 먼저 사우스파 가스전에서 개발 계획을 세우고 채굴을 시작하면 이를 공유하는 카타르의 노스필드 가스전의 매장량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 것이 뻔했다.

카타르, ‘알자지라’ 통해 사우디 왕실 공격

사우디를 비롯한 역내외 국가들의 퇴위 압박이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압박을 견뎌내며 왕실을 안정시킨 카타르는 달라졌다. 더 이상 사우디에 고분고분한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발전을 가로막는 GCC 왕정국가들의 간섭에 염증을 느꼈다. 이후 카타르의 행보는 전통적 GCC 노선을 탈피한다. 나아가 걸프 왕실에 부담이 되는 노선을 펼치며 탈(脫)걸프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카타르는 걸프 해역에 갇힌 반도 국가다. 물리적으로는 대국 사우디와 접경하고 있다. 지리적 제약이 많다 보니 지정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일단 국제사회에서 지명도를 높였다. 굵직굵직한 국제행사를 지속적으로 유치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2006년 아시안게임, 2012년 18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는 물론 2022년 월드컵 등 숨 가쁜 유치 외교에 나섰다.

외교 전략도 독특하다. 전방위 등거리 외교를 천명했다. 누구와도 친할 수 있지만 누구와도 대립할 가능성을 높이는 움직임이었다. 카타르의 대외정책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친미 기조가 한 축이다. 중동 전역을 관할하는 미국의 중부군 현지 작전사령부가 도하에 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때 극단주의자들의 눈치를 보며 사우디가 축출한 미국 공군기지를 카타르가 유치했다. 알우데이드 공군기지다. 이쯤 되면 미국의 군사 동맹국에 가깝다. 한편 이스라엘 대표부가 최근까지 도하에 상주했다. 브루킹스 연구소나 유명 미국 대학도 연이어 세워지고 있다.
 

ⓒEPA알자지라 방송(아래)은 카타르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대적하기 위해 만든 소프트파워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친미 카타르는 과격 이슬람 정치단체를 돕는 데도 앞장선다. 특히 반미의 핵심 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의 실질적 최대 후원국으로 알려져 있다. 무슬림형제단의 후예인 팔레스타인 하마스도 전폭 지지한다. 심지어 레바논의 시아파 정치 세력인 헤즈볼라와의 연계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란과 나름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이란 핵 개발의 자주권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까지 이어지면서 사우디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결국 2017년 단교로 이어졌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왕실의 권력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GCC 국가에 대한 정면 도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GCC 보수 왕정들에 카타르가 눈엣가시인 또 하나의 이유는 ‘알자지라’다. 알자지라는 하마드 국왕이 권력을 잡자마자 1996년에 세운 방송사이다. 기존 형제국이었던 사우디 및 GCC 국가들의 왕실과 대립하게 되면서 독자적 소프트파워 수단으로 방송국을 세운 것이다. 사우디는 카타르에 비해 인구가 10배 이상 많고 국력은 비교가 불가능하게 강하다. 물리적 국력 격차를 상쇄하기 위해 카타르 왕실은 소프트파워에 주목했다.

새 미디어의 효과와 영향력은 놀라웠다. 하마드 국왕은 알자지라를 세울 때 아랍 권위주의 국가에서 통용되던 방송 문법을 완전히 갈아치웠다. 정치적 금기를 없애버렸다. 아랍 및 이슬람권의 시선을 미국 CNN이나 영국 BBC처럼 속보성과 투명성을 갖추어 세상에 내보내겠노라 천명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중동 출신의 민완 기자 스카우트에 나섰다. 그리고 아랍 왕정과 권위주의 국가들의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왕실 내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전파를 탔다. 특히 메카와 메디나, 즉 이슬람의 양대 성지 수호자를 자임하는 사우디 왕실의 타락상과 일탈이 날것으로 전파를 탔다. 알자지라 효과의 절정은 ‘아랍의 봄’이었다. 아랍 각처에서 벌어지는 시위들이 생중계되자 대중은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알자지라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GCC 국가들의 공포 역시 커졌다. 권위주의 정권들은 알자지라가 부담스러웠다. 뒤에 카타르 왕실이 있다고 보았다.

카타르는 왜 이웃 왕실과 각을 세우면서까지 이슬람 정치집단을 지원하고 알자지라 같은 매체를 활용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이슬람권에 대한 정지 작업으로 보인다. 카타르는 중동 아랍권에서 앞으로 이슬람 세력이 득위(得位)하고 집권하는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았다.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들 이슬람 정치 세력을 입도선매하듯 후원함으로써 카타르의 영향력을 미리 담보하려는 것은 아닐까?

카타르는 이슬람 입헌왕정을 추구하는 듯 보인다. 이슬람 이념과 정치인에 의해 지지되는 입헌왕정 모델을 설정하고 동시에 서방과도 잘 지내면서 온건함을 추구한다면 대단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절대왕정이 스스로 입헌왕정으로 전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하마드 전 국왕은 입헌왕정을 천명하며 아들 타밈 국왕에게 생전 양위를 완결했다. 이는 아랍 내부 거대한 판의 흐름과 시세를 읽고 있음을 의미한다. 민주화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면, 이란이나 과거 이집트·이라크·시리아의 왕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시대가 올 수 있음을 예견했다. 그에 앞서 선도적으로 입헌 모델을 만들고, 정치변동의 주요 세력인 이슬람 집단을 도우며 마음을 사려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카타르가 이집트의 유수프 알카라다위 같은 반체제 인사를 내세워 무슬림형제단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이집트,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튀니지와 리비아에서도 이슬람 세력을 왜 적극 후원하는지 설명이 된다. 더욱이 시리아 반군 세력 중 무슬림형제단을 도우며 사우디와 갈등관계를 불사하는 이유도 전략적 관점에서 이해가 간다. 인근 왕정에게 미움받기 딱 좋은 입장이다.

사우디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성지의 수호자이자 수니파 이슬람의 종주국을 자임하는 사우디로서는 카타르로 인해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역사적 전통이나 국가 규모, 영향력 면에서 비교도 안 되는 소국 카타르가 정면으로 대들고 나서며 역내 판도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지금 손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 속에서 단교 조치에 나섰지만 카타르는 사우디의 숙적 이란과 협력하고 터키 등의 지원으로 버텨내고 있다. 2022년 월드컵까지 개최되면 전 세계의 이목은 카타르의 발전상에 집중할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압박하면서 극도의 대치만 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일단 서방세계와의 관계, 특히 미군의 주둔이라는 엄청난 담보물을 카타르가 쥐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카타르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사우디의 배척은 힘을 잃는다. 이는 카타르 처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외교 전략적으로 걸프 지역에서 벗어나는 행보를 한다 해도 물리적 환경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결국 지리적 공간이라는 불변의 변수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일정 정도 거리두기를 하면서도 극한 대치에 나서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면피용으로 GCC 정상회의에서 포옹하고 악수를 하겠지만 한번 자신의 목을 조르며 생명을 위협했던 이웃과 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아랍 유목 부족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사우디 처지에서는 카타르가 가장 위험한 적인 이란 편에 섰다고 보고 있고, 카타르는 사우디가 육로 국경 봉쇄를 통해 생필품을 끊었다는 것을 절연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현 시점에서 사우디-카타르 관계는 겉으로는 복원 절차가 이어진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서로에 대한 경원과 질시는 꽤 오래 지속되리라 보는 것이 맞다.

이와 연동되는 GCC의 미래 역시 불투명하다. 일단 숙원이었던 정치연합은 이미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다. 결국 느슨한 형태를 띠며 동력을 상실한 연합체 정도에 머무르지 않을까?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바레인이 한 축을, 그리고 반대편에 카타르가 서는 형태로 나뉘었다. 이 사이에 오만과 쿠웨이트가 좌고우면하며 중립 또는 독자적 노선을 걸을 것으로 보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프 왕정의 연합체는 점차 힘을 잃고 있다. 유가 하락으로 인한 영향력 변화가 외부 원인이다. 내부적으로는 가장 가까워야 할 두 나라 간 반목이 연대의 동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과연 카타르의 실험은 성공할까? 이슬람 통치이념과 전방위 외교를 결합하여 국제사회의 유력 행위자로 등장하고 싶어 하는 왕실의 꿈은 이루어질까? 아니면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사우디가 카타르를 다시 우방국으로 끌어와 옛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기자명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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