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에서 국가들을 새로 만들어냈다. 오스만제국이 해체된 자리에 새로 만든 국가가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국가라 해도 건국 과정에서 이런저런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하물며 급조한 국가는 어떻겠는가? 역사적 맥락도 없이 열강의 이익에 따라 그은 국경 사이사이마다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이 숨었다.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여파는 100년 넘도록 불안정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시사IN〉 제596호 ‘중동 분쟁의 뿌리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기사 참조).  

아랍 청년들의 분노와 회한은 깊다. 이들의 눈으로 중동 현대사를 본다고 상상해보자. 돌이켜보면 통일 아랍 국가를 세울 수도 있었다. 1차 대전이 치열해질 무렵 메카의 태수 후세인과 영국의 고등판무관 맥마흔이 주고받은 서신(‘후세인·맥마흔 서신’)대로라면 통일 아랍 왕국이 탄생할 뻔했다. 만일 영국이 약속을 지켜 단일 아랍 왕국이 건국되었다면 지금의 중동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아라비아반도와 레반트 지방(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아우르는 국가의 위용은 상상만 해도 벅찼을 것이다. 막대한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경제개발에 매진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G7에는 넉넉히 들어가 있지 않을까? 더욱이 역사 문명이 가득 담긴 유적의 보고가 아니던가?  
 

ⓒAP Photo2011년 1월 튀니지에서 수천 명의 시민이 벤 알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옛 생각을 하면 아쉬움은 더 짙어진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지중해 문명을 아랍이 이끌었다. 특히 이슬람의 탄생과 맞물려 시작된 ‘정통 칼리프’의 시대는 중동에서 아랍을 우뚝 세우는 계기였다. 이후 아랍은 일취월장 발전하며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문물과 제도가 공히 유럽을 압도했다. 번영을 추억하는 이들은 근대 이후 아랍의 몰락이 아쉬웠다. 유럽 열강이 자의적으로 아랍을 갈라놓은 데 대한 회한도 따라서 깊이 자리 잡았다.

“민중 속으로” 하나 된 아랍 꿈꾸다

분열된 아랍은 상흔을 남겼다. 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심리적으로 패배주의와 열패감이 대중을 지배했다. 일부 산유국을 제외하고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권위주의가 만연했다. 한마디로 준비되지 않은 국가들의 난립으로 인한 일대 혼란이었으며, 냉전의 진영론과 맞물리며 독재는 공고해졌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랍의 청년 지식인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땅에 떨어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아랍의 영화를 되살릴 길을 모색했다.

첫 시도는 시리아 출신 프랑스 유학생들이 1930년대부터 주도한 아랍 부흥운동이었다. 그들은 전통적 유목 부족주의나 유럽이 만들어놓은 꼭두각시 국가로는 아랍의 영화를 복원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소르본에서 유학한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는 아랍의 부흥을 위해 일치단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아랍 각성운동을 벌인다. ‘바트주의 운동’의 시작이다. 마치 제정 러시아 시대 “민중 속으로”를 외치며 계몽운동을 벌이던 지식인들의 ‘브나로드 운동’과 유사하다. 궁극적인 구상은 영국·프랑스와 맞서면서 아랍을 각성시켜 하나의 아랍 국가를 만들겠다는 시도였다. ‘통합·자유·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하나 된 아랍의 대의를 선포했다. 작지 않은 반향도 일으켰다. 마침 이집트에서 집권한 가말 압둘 나세르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새로운 동력을 얻기도 했다. 실제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 연합인 ‘통일아랍공화국’이 탄생하기도 했다.

파편화된 아랍 사회를 묶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아랍 대중은 부족 단위로 움직이고 생각했다. 이들을 속속들이 설득해 하나로 엮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통일아랍공화국도 권력을 둘러싼 갈등으로 곧 실패하고 말았다.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세속주의의 진보적 가치를 중심으로 아랍 부흥을 꾀했던 바트주의자들은 이렇게 좌절했다. 유럽이 갈라놓은 아랍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대중의 기대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나세르 사망 이후 이집트의 권력을 잡은 사다트 대통령은 아랍민족주의를 버리고 이스라엘과 수교를 택한다. 이로써 아랍 대의는 급격히 동력을 잃었다.

청년 지식인들은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아랍이 하나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각자 자기 나라에서만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강고한 아랍 권위주의 정권들은 민주주의의 씨앗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아랍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그렇게 냉전 반세기가 지났다.

 

 

 

ⓒWikipedia1992년 알제리 시가전 모습. ‘이슬람 구국전선’은 지하로 숨어들어 폭력 투쟁에 나섰다.

 


두 번째 좌절은 냉전 해체와 더불어 찾아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무너졌다.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각 진영에 편입되기만 하면 독재정권이라도 든든하게 지켜주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자유민주주의 선도 국가를 자임하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영향력만 남은 시기였다. 사람들은 중·동부 유럽처럼 중동의 권위주의 정권도 바뀌리라 믿었다. 곧 민주화의 물결과 마주하리라 기대했다.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중동의 권위주의 정권은 단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다. 동유럽 독재의 상징과도 같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퇴진했지만, 중동의 독재자 리비아의 카다피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은 끄떡없었다. 왕국은 왕국대로, 공화국은 공화국대로 폭압적 전제정치를 유지했다.

이 와중에 변화를 시도한 나라가 있었다. 알제리였다. 정치체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거리 혁명이 아닌 선거 혁명의 모습이 보였다. 제도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고 민주주의 절차를 따라 정파들은 선거에 참여했다. 1990년 6월 지방선거에 나선 알제리의 신생 정당 ‘이슬람 구국전선(Front Islamique du Salut·FIS)’은 예상을 뒤엎고 약진했다. 이듬해 총선에서도 FIS는 압도적 지지를 획득했다. 오래 집권해온 군부 기득권 정당인 민족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FLN)은 실각 위기에 놓였다. 여기서 일이 엇나간다.

1992년 권력을 잃기 직전에 몰린 FLN은 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집권을 일방적으로 연장했다. 비록 FIS가 전통적 이슬람 노선을 추구하는 원리주의 정당이었으나, 합법적 선거를 통해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일어나기 직전에 좌절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알제리 신드롬’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집권을 눈앞에 두고 권력을 빼앗긴 FIS는 지하로 숨어들어 폭력 투쟁에 나섰다. 알제리는 준내전 상태로 치달았다. FIS는 세속주의 자유주의 정파가 아니었다. 개방된 민주주의를 원하는 대중에게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냉전 해체의 시기에 선거를 통해 권력이 교체되는 경험은 분명 소중했다.

냉전 해체의 격변기를 숨죽이며 지켜봤던 아랍의 지식인들은 알제리 신드롬에 또다시 좌절했다. 이후 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새로운 담론을 꺼내들었다. 이른바 ‘중동 예외주의’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중동, 특히 아랍에서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논지였다. 정교일치 이슬람, 집단을 우선하는 부족주의 정치문화, 그리고 조세 없는 산유국의 지대 추구 행태 등이 예외주의의 근거였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는 봄이 찾아왔으나 아랍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셋째 좌절은 9·11 이후의 미국이 안겨다주었다. 미증유의 공격을 당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실제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하던 미국은 새 구상을 던졌다. 민주화 카드였다. 2004년 6월 미국 조지아주 시아일랜드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확대 중동 구상’이다. 한마디로 중동 전역에 민주주의를 이식해서 지역을 관통하는 평화체제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민주평화론’이라는 이론이 있다. 민주주의가 안착된 국가들은 서로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다는 이론인데, 이에 근거한 접근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민주주의 이식 프로그램에 순순히 응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과 대립하면 최악의 경우 전쟁을 통한 정권 교체도 불사하겠노라 압박했다. 실제로 바그다드와 카불 정부를 제거하지 않았던가. 미국은 먼저 동맹국을 압박했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선거법을 개정하고 복수 대선후보 제도를 받아들였다.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 출마도 허락했다. 이집트발 정치 개혁의 바람은 좌절에 빠져 있던 아랍 청년들의 관심을 끌었다. 거리에서는 ‘키파야(충분하다) 운동’이 일어났다. 독재는 이제 그만하라는 정치 시위였다.

 

 

 

 

ⓒEPA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이 2010년 12월 분신자살을 시도한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병실을 찾았다.

 


미국의 민주화 프로젝트는 아랍 대중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부시 정부가 제국주의 야욕을 민주화로 포장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잇따랐다. 결국 이라크 전쟁에서 수렁에 빠진 미국은 중동 전역을 민주화하기는커녕 서둘러 빠져나가야 하는 현실에 마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이 주도하는 외부 압박의 시도도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초강대국이 전면전을 치르면서까지 민주주의를 이식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아무리 열강이라고는 하나 봄을 인위적으로 견인해올 수는 없었다. 아랍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중동 예외주의의 그림자는 길었다. 프랑스 유학파들의 꿈 ‘하나 된 아랍’의 좌절, 냉전 해체 후 선거를 통한 변화 시도의 이탈, 미국의 민주화 프로젝트의 실패 등이 아랍 대중을 괴롭혔다. 아랍은 정치 발전의 불모지였다. 그러나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상황이 벌어졌다. 무기력했던 아랍에 급작스러운 정치 변동이 도미노처럼 일어난 것이다. 2011년 아랍의 봄이다.

이집트에서만 900명 넘게 목숨 잃어

튀니지의 소도시에서 일어난 한 청년의 분신자살은 튀니지뿐 아니라 전 아랍을 뒤흔들었다. 냉전의 해체에도, 미국의 민주화 압박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강고한 독재정권들을 추풍낙엽처럼 무너뜨렸다. 권력 내부에 무슨 변고가 일어났던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상황은 그대로였다. 청년들은 별 희망 없이 살고 있었다. 저항의 동력을 이끌어낼 만한 계기도 딱히 없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의 정권을 붕괴시켰다. 아랍 대중에게 스며 있던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힘 때문이다. 이 힘은 예상외로 컸다. 주어진 상황은 그대로였지만 그간 독재의 위세에 눌려 고분고분하던 시민들이 달라졌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된 계기는 바로 인터넷을 통한 독려와 동원에 있었다.

처음이었다. 군부나 친위 쿠데타도 아니고 순수한 시민들의 힘으로 기존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화의 계기를 맞은 경험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래가지 못했다. 기대는 컸으나 곧 길을 잃고 말았다. 아랍의 봄은 너무 전격적으로 찾아왔고,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할 깜냥은 아무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랍의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아랍의 변화를 꿈꾸고 다양한 시도를 해왔지만 마치 도적처럼 찾아온 급변 사태에 내심 당황했다.

정치적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전국적 연계망을 갖춘 이슬람이 떠오르게 된다. 이슬람을 기치로 새 정치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이집트에서는 살라피스트(전통주의자)가 주도하는 정파가 국회를 장악했다. 튀니지도 무슬림형제단 계열의 정당이 세를 모았다. 급기야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대통령이 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 강경 사상을 집대성한 세력이다. 중동 내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 세력의 주요 뿌리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방의 시각에서는 알카에다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위험 세력이 이집트의 정권을 잡은 것으로 보였을 터이다.

이집트 내부가 받은 충격도 작지 않았다. 무바라크의 하야를 위해 이집트에서만 900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 그 결과는 중세적 이슬람 질서로의 회귀처럼 보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에서 동료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목도했던 청년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독재와 싸워 이슬람 근본주의에게 정권을 갖다 바칠 수는 없다는 정서가 거리에 가득했다. 이 혼란을 계기로 미소 지으면서 다시 권력 전면에 나선 것이 군부다. 현 압둘파타흐 시시 대통령은 이렇게 이집트의 권좌에 올랐다.   

아랍의 청년 지식인들은 여기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 질서의 근간인 선거를 통해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받는 세력은 세속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쪽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성 이슬람 교리를 설파하며 대중에게 강경하고 선명한 투쟁을 독려하는 이들이 선거를 통해 대거 제도권에 들어왔다. 어떻게 독재자를 쫓아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귀결되는지 좌절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최선을 다해서 살던 청년이 정부의 부정부패에 희생되어 분신자살한 이후 수많은 청년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길에서 스러져갔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독재와 부패와 무질서가 창궐한다. 시리아와 예멘에서는 21세기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다. 민주주의의 희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아랍은 이제 혹한기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는 아랍의 지식인들이 있다. 민주주의는 생각만큼 빨리,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다. 한국의 역사를 살핀 이들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이 곧바로 민주주의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보았다. 광주의 비극과 엄혹한 군부정치를 다시 경험해야 했음을 안다. 7년의 시간을 더해 6월 항쟁을 거치면서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게 되었던 한국의 역사를 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뚜벅뚜벅 걸어온 한국의 민주화 여정도 아직 갈 길이 남았음을 보는 아랍의 젊은이들이 있다. 필자가 만난 아랍의 지식인들은 한국이 걸어온 긴 길에서 아랍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자명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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