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요동칠 20대 국회 최대 사건
  • 천관율 기자
  • 호수 607
  • 승인 2019.05.0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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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선거제 개혁안이 국회 ‘패스트트랙’ 앞에 섰다. 민주당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바른미래당의 약한 고리를 잡았기에 가능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막간극일 뻔했던 20대 국회가 중대한 구조변동을 만들고 있다.
한국 정치가 트랙을 바꿨다. 4월25일 국회에서는 선거제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 등 3대 안건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에 올리는 문제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정면 충돌했다. 패스트트랙 안건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여야 합의 없이도 본회의에 올라갈 수 있다. 즉, 자유한국당의 합의를 구하지 않아도 입법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여당인 민주당과 야 3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은 지난 3월17일 국회의원 선출에서 비례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골자로 하는 선거제도 개혁안에 합의했다. 현행 선거제도에서 정당 득표를 10% 얻었다면, 이 정당은 비례대표 의석 47석 중 10%인 4~5석을 확보하리라 기대한다. 여기에 지역구에서 승리한 의석수를 단순히 더하면 총의석수가 나온다. 하지만 4당 합의안대로 하면 총정원 300석의 10%인 30석, 거기서 다시 절반인 15석을 ‘최소한’ 기대할 수 있다(지역구에서 얻은 의석수에 따라 총의석이 더 늘어날 수 있다). 정당 지지도가 의석에 반영되는 비율이 크게 늘어난다. 비례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유권자의 정당 지지 분포와 의회 의석 분포가 더 비슷하게 된다는 의미다.
ⓒ시사IN 이명익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심상정 정의당의원(가운데 왼쪽)이
4월26일 새벽 국회 회의실을 점거 중인 자유한국당 의원 및 보좌진들과 대치하고 있다.

이것은 권력을 배분하는 규칙을 바꾸는 거대한 변화다. 비례성이 높아지면 유권자와 정치가의 전략이 따라서 바뀐다. 유권자들은, 자기 표가 의미 없이 사라질 걱정을 덜 하면서 마음에 드는 정당에 투표할 수 있다. 작은 정당이 표를 얻기 쉬워진다. 정치인들도 새 정당을 만들기 편해진다. 1등을 못 해도 의석이 생긴다. 그 결과 여러 정당이 국회로 들어온다. 이런 구도를 ‘다당제’라 부른다. 반대로 소선거구제 지역구 선거는 1등만이 의석을 갖게 되므로 유권자도 정치인도 큰 정당으로 쏠린다. ‘양당제’다.

즉 선거제도가 비례제이면 다당제를, 다수제이면 양당제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뒤베르제 법칙’으로 알려진 원리다. 다수제 성격이 강한 선거제도 덕에 한국 정치는 민주당계 정당과 자유한국당계 정당 둘로 수렴할 운명처럼 보였다. 제도를 바꿀 권한이 있는 당사자인 국회의원들이 현재 선거제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므로, 웬만하면 국회는 현 제도를 유지하자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다수당일수록 현상 유지를 더 원한다. 국회는 구조적으로 현상유지파가 지배한다.

그런데 꽤 큰 변화를 예고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4당 합의로 나왔다. 심지어 이 합의를 주도한 민주당은 명백히 의석을 손해 본다. 원내 제1당이 자해에 가까운 의제를 입법 문턱까지 밀어붙였다. 자유한국당은 국회선진화법 이후 7년 만에 물리력을 꺼내드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시간 축을 달리하는 ‘3중 렌즈’가 필요하다.

■ 운명의 나흘:바른미래당이 약한 고리다

4당 원내대표가 3대 의제 패스트트랙에 최종 합의한 것은 4월22일이다. 4당은 4월25일 하루 종일 패스트트랙에 안착을 시도했다. 나흘 동안 바른미래당과 국회는 헌정사에 기록될 격동에 휘말린다. 4월23일 오전 10시. 바른미래당은 4당 합의안을 놓고 의원총회를 열었다. 의총은 네 시간 격론 끝에 결국 표 대결로 결론을 냈다. 12대 11, 한 표 차이였다. 패스트트랙 합의안은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찬성표 한 표만 마음을 바꿨다면 한국 정치는 ‘원래 가던 양당제의 길’을 계속 갔을 것이다. 이언주 의원이 당원권 정지로 의총 참석이 막혔는데, 이 의원이 들어왔다면 반대표를 던졌을 것이 확실하다. 이 의원은 패스트트랙 참여가 결정되자 바른미래당을 탈당했다.
ⓒ시사IN 이명익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4월25일 국회 의안과 문을 막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바른미래당은 4당 합의의 약한 고리였다. 3월17일 합의 이후에도 바른미래당만 패스트트랙 추인에 실패하며 상황을 한 달 더 공전시켰다. 바른미래당에서는 ‘야당 노선’과 ‘제3당 노선’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야당 노선을 주창하는 의원들은 민주당과의 4당 공조를 부담스럽게 여겼다. 박근혜 탄핵 이전 새누리당 출신 보수파들이 이 노선이고, 유승민 의원이 중심축이다. 반면 제3당 노선을 주창하는 의원들은 선거제도를 바꿔야 독자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2016년 총선 이전 민주당에서 쪼개진 옛 국민의당 계열이 주로 여기다. 당권도 잡고 있다. 손학규 대표, 김관영 원내대표가 이 노선이다.

바른미래당은 20대 총선이라는 독특한 예외가 만들어낸 흥미로운 신생 정당이다. 양당제 압력이 강해지던 와중에, 20대 총선은 38석 국민의당이라는 강력한 제3당을 탄생시켰다. 또한 20대 총선은 보수가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선거다. 제2당으로 밀려난 당시 새누리당은 의회 주도권을 상실했고, 박근혜 탄핵 정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탄핵 충격파는 새누리당을 둘로 쪼개고 신생 보수당 바른정당을 탄생시켰다. 이후 헤쳐모여와 친정 복당 소동이 몇 차례 진행된 끝에, 안철수 의원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의당 주류와 유승민 의원을 주축으로 하는 바른정당 독자노선파가 합당한다. 이게 바른미래당이다.

20대 국회는 양당제 토양 위에 다당제 꽃이 피어난 이질적이고 어색한 동거가 특징이다. 20대 국회의 다당 구도는 제도와 구조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그에 역행한다. 민주당계와 새누리당계가 쪼개져서 다당 구도가 형성되었으되, 토양은 본질상 양당제다. 그래서 바른미래당은 아주 독특한 운명에 붙잡힌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균열선, 양당제적 경계 위에 바른미래당이 걸쳐 있다. 마치 한반도가 지정학적 단층선 위에 있듯 바른미래당은 양당제적 단층선 위에 있다. 다른 시기였다면 거대 양당의 충돌이었을 전투가, 이번에는 바른미래당이라는 제3정당 내부의 논쟁으로 달리 터져 나온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거대 양당이 국회에서 정면충돌하면 교착상태가 발생한다. 선거제와 공수처를 둘러싼 논쟁이 거대 양당 사이에서 일어났다면, 가장 가능성 높은 결말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헛돌기’다. 그런데 20대 국회의 독특한 구조 덕에 이 충돌이 바른미래당 내부에서 발생했다. 정당 내부의 의사결정 문제가 되어버리자 교착 대신 한 표라도 많은 쪽이 이기는 싸움이 되었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 제3당 노선이 그야말로 한 표 많았다.

4월23일, 김관영 원내대표가 의총에서 투표로 패스트트랙 합의를 관철한다. 4월24일 새벽,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이 소신에 따라 패스트트랙에 반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 의원은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 위원인데, 그가 반대하면 패스트트랙 의제였던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법안이 사개특위 문턱을 넘지 못한다. 김관영 원내대표는 이번에도 정면으로 돌파한다. 다음 날인 4월25일, 거센 반발을 뚫고 사보임(위원회 교체) 신청서를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낸다. 문 의장은 이를 승인했다. 같은 날 저녁에는 사개특위 위원인 권은희 의원도 임재훈 의원으로 교체했다.
ⓒ시사IN 이명익개혁 법안 패스트트랙 적용에 반대하는 유승민 전 대표(가운데) 등
바른미래당 의원들이 4월25일 국회 운영위원장실 에서 농성하고 있다.

패스트트랙 정국은 김 원내대표의 우격다짐에 가까운 돌파로 겨우 출발했다. 토론과 합의를 중시하는 김 원내대표의 스타일과는 크게 달랐다. 격동의 나흘을 이해할 만한 숨은 단서가 있다. 4월18일의 일이다. 이날도 바른미래당은 의총에서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날 의총에서 핵심 쟁점인 공수처 기소권을 놓고 민주당과 합의에 근접했다는 발언이 나오자,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즉시 찬물을 부어버린다. “당론을 변경해 합의한 것이 없다.” 이것으로 바른미래당 의총은 또다시 패스트트랙 추인에 실패한다. 판이 완전히 깨진 것처럼 보였던 장면이다.

홍영표 원내대표와 호흡을 맞춘 이철희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에게 이 ‘판 깨기’ 발언이 나온 맥락을 물었다. “일부러 그랬다더라.” 그 민감한 시기에 일부러라니? “바른미래당 갈등은 근본적으로 민주당계와 자유한국당계 갈등 전선이 변형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협상이 합의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파국으로 가더라도 감당하겠다는 각오가 손학규·김관영 투톱에게 있느냐의 문제라고 봤다. 홍 원내대표는 ‘그런 각오가 있다면 우리도 함께 가겠다’(바른미래당의 공수처 수정안을 받겠다)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런 방향으로 일이 전개됐다. 4월18일의 판 깨기 이후, 4당은 바른미래당의 요구가 꽤 반영된 공수처 합의안을 나흘 만에 도출해낸다. 이 안을 들고, 김관영 원내대표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당내 추인과 사보임 과정을 돌파한다. 바른미래당은 같은 정당이라고 보기 어려운 갈등 국면으로 진입했다. 김관영 원내대표는 이 결과를 각오하고 선거제 개혁을 관철하는 노선을 택했다. 이 과정 어느 것도 필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자리에 누가 서 있는지, 그가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지는 어느 정도는 우연의 산물이다. 이번에는 우연이 ‘일이 되는 쪽’으로 굴러갔다.

■ 역설의 넉달:민주당은 왜 ‘자해’를?


민주당은 왜, 선거제 개편에 동의하는 것은 물론 협상을 주도하기까지 했나? 선거제 개혁안은 내년 4월에 있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의석을 줄일 것이 확실하다. 기존 제도에서 제1당은 득표율보다 많은 의석수를 얻는데, 비례성이 강화될수록 그런 보너스는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진다. 민주당 내에서는 4당 선거제 합의안이 좌초되기를 바라는 의원이 적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정당득표대로 의석이 배분되는 제도)는 민주당이 비례 의석을 얻기 어려워 받아들이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3월17일 4당 선거제 합의가 바른미래당 내분으로 좌초 위기에 몰리는 동안, 몇몇 민주당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 등에서 선거제 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식으로 말했다.
ⓒ연합뉴스지난해 12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이 질문은 지금 시기의 구체적인 질문인 동시에, 고전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선거제도가 크게 바뀌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다. 기존 제도에서 이익을 얻는 정치세력이 그를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제1당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나?

대체로 나오는 설명은 이렇다. 민주당은 어떻게든 공수처와 검경 수사권 조정을 따내고 싶었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중에서도 상징성이 높은 검찰 개혁의 핵심이라서다. 이를 위해서는 큰 선물보따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게 선거제 개혁이었다. 이걸로 3·4·5당을 유인한다. 민주당은 선거제도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검찰 개혁에 집중한다. 틀린 설명은 아니다. 하지만 부족하다. 다당제 구도로 한번 물꼬가 트이면 민주당은 21대 총선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그 피해를 누적해 받는다. 무엇을 받아오든 간에, ‘카드’로 내주기에는 선거제도의 덩치가 너무 크다.

심상정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위원장이 논의 초기부터 불안 요소로 본 정당도 자유한국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비례성이 높아지면 가장 손해를 보는 정당이 민주당이라서다. 심 위원장과 정의당의 초기 구상은 자유한국당을 끌어들여서 민주당을 4대 1로 포위하는 그림에 가까웠다. 당시만 해도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바닥을 길 때였다. 자유한국당도 전망 없는 소선거구제보다는 비례제에 관심을 보일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심상정 위원장은 같은 노동계 출신인 자유한국당 김성태 당시 원내대표에게 공을 들였다. 비례성 강화를 가장 못마땅하게 볼 정치세력이 민주당이라는 것은 당시 구도에서 합리적인 예측이었다.

민주당 기류가 비례성 강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당에서 선거제를 다룰 핵심 인사들의 성향은 좀 달랐다. 정개특위 민주당 간사로 선임된 김종민 의원은 신념형 비례성 강화론자다. 그는 노무현 정부 5년을 총정리하는 <참여정부 국정운영 백서> 편집총괄을 맡았었다. 그의 정치관과 신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 스스로도 정치이론에 관심이 많은 학구파다. 그의 의원실에 들르려면 한 시간 넘게 붙잡혀서 민주주의와 통치이론 강의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정개특위 논의 초기, 김종민 의원은 “심 위원장이 자꾸 자유한국당을 끌어들여서 우리를 포위하려고 한다. 우리랑 손잡고 자유한국당을 포위해야 일이 풀릴 텐데 반대로 가고 있다”라고 답답해하곤 했다. 반면 정의당 쪽에서는 “김종민 의원이 처음 보는 신기한 제도를 자꾸 만들어온다. 협상 진척을 방해하려는 것 같다”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었다. 아직 양자 사이에 신뢰가 구축되기 전의 일이다. 결국 그 ‘처음 보는 신기한 제도’ 중의 하나인 ‘절반 연동형’이 4당 합의안의 기반이 되었다. 정의당은 민주당이 비례성 강화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했고, 민주당 정개특위 간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관과 개인 신념을 따라 비례성 강화를 관철하고 싶어 했다. 이 묘한 어긋남은 한동안 풀리지 않았다.
ⓒ시사IN 조남진2016년 4월13일 치러진 20대 총선에서더불어민주당이 새누리당을 누르고 원내 1당이되었다.


지난해 12월15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를 포함하여 5당 원내대표가 합의문을 발표한다. 합의문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고 되어 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한 지 열흘 만이었다. 이것으로 자유한국당을 끌어들이는 전략이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상황은 곧 뒤틀렸다. 자유한국당은 나흘 후인 12월19일 의원총회에서 연동형 비례제 반대로 뜻을 모으고, 정개특위에 김재원 의원을 투입한다. 전임 간사인 정유섭 의원은 “김재원 의원이 하면 연동형 비례제의 문제점을 좀 더 잘 지적해주지 않을까 한다”라며 자리를 넘겼다. ‘판을 깰 선수’로 교체한다는 의미다. 자유한국당의 노선이 분명해지면서 민주당 포위 전략도 소멸했다. 이제 민주당이 주장했던 4대 1 자유한국당 포위 전략이 유일한 선택지로 남았다.

이 무렵,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탄핵 동맹을 입법 동맹으로 진화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20대 국회에서 국정과제 핵심 입법이 거의 처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탄핵찬성파 세력을 결집시켜 자유한국당을 돌파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홍 원내대표는 2018년 5월에 취임했지만 이 구상은 한동안 작동하지 않았다. 4당이 연대해 자유한국당과 대치할 계기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선거제도에서 3·4·5당을 입법 동맹으로 엮을 기회를 읽었다. 자유한국당을 돌파해야 했으니 고리는 패스트트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거제를 패스트트랙에 태우면서, 핵심 개혁 입법을 묶어 같이 올리는 그림이 가능해 보였다. 4대 1 자유한국당 포위 전선을 만드는 넉 달 여정의 시작이었다. 올해 1월, 홍영표 원내대표는 초선 비례대표인 이철희 의원을 원내수석부대표로 발탁한다. 큰 협상을 앞두고 호흡이 맞는 전략통을 앉혔다(원래 재선 의원이 가는 자리다. 원체 파격이라 이철희 의원은 한동안 ‘대행’ 꼬리표도 못 뗐다). 이것이 또 다른 묘한 국면을 만들어낸다.

이철희 의원의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정치학 논문 하나가 깔려 있다. 제목은 ‘Electoral Institutions and the Politics of Coalitions:Why Some Democracies Redistribute More Than Others(선거제도와 연합정치: 왜 어떤 민주정부는 다른 민주정부보다 더 많이 재분배하는가)’이다. 학계의 거장인 토빈 아이버슨(하버드 대학)과 데이비드 소스키스(듀크 대학)가 2006년에 쓴 영향력 있는 논문이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 이철희 의원은 생각날 때마다 이 파일을 열어봤다.

ⓒ연합뉴스총선 이튿날 과로로 입원한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어두운 표정으로 퇴원하고 있다.
논문은 1945년부터 1998년까지 여러 민주정부의 선거제도를 비례제와 다수제로 나눠 분석한다. 그 결과 다수제 국가에서 우파 정부가 등장할 가능성은 75%인 반면, 비례제 국가에서 우파 정부가 등장할 가능성은 26%에 그쳤다. 결정적 차이는 중산층이 만들어낸다. 다수제 국가는 주로 양당제로 귀결되는데, 양당제에서는 중산층이 진보 쪽에 투표하기를 두려워한다. 진보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인데, 그 비용을 중산층이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다수제에서 중산층은 보수 쪽으로 움직인다. 반면 비례제 국가에서는 다당제가 등장한다. 이제 중산층은 마음 놓고 신념에 맞는 정당에 투표하는데, 부자들의 정당과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 이러면 중도 좌파를 중심으로 연립정부가 구성될 가능성이 올라간다.

상황이 마지막 고비를 향해 가던 4월24일, 이철희 의원은 기자와 만나 이런 얘기를 했다. “비례성이 올라가면 민주당은 다수파가 못 되지만, 진보파 전체는 넉넉한 다수파가 될 수 있다. 단독 집권해봤자 100석 넘는 제1야당이 막아서면 아무것도 못한다. 지금 그렇잖나. 진짜 20년 집권을 하려면 진보파가 넉넉한 다수파가 되고, 민주당은 진보파 연정을 주도하는 길로 가야 한다. 이거 하면 우리 의석은 손해다. 그래도 담대하게 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바꿀 힘이 생긴다.” 이것은 ‘민주당이 검찰개혁을 위해 선거제도를 내줬다’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다. 협상의 핵심 포스트에 있는 원내수석부대표가, 검찰개혁 문제를 논외로 하고 선거제 개혁만 놓고 보아도 “하는 게 맞다”라는 확신 위에 전략을 짰다.

홍영표 원내대표의 제1 관심사는 물론 검찰개혁 입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거제 개혁이 ‘내주는 카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해야 할 의제라는 독특한 의견그룹을 핵심 포스트에 앉혔고 뚝심 있게 힘을 실어주었다. 정개특위 간사 자리에는 이론에 밝고 신념이 강한 김종민 의원이 앉아서, 민주당 내부에서 수용 가능한 창조적인 협상안을 쏟아냈다. 4당 협상을 진행할 원내수석부대표 자리에는 전략과 기획에 특화된 이철희 의원이 앉아서, 이것이 가야 할 길이라는 거시적 판단으로 선거제 협상을 관철했다. 이철희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삼각편대가 선거제 협상의 핵심이었다. 나를 여기 앉힌 사람이 누구야? 김종민 의원이 간 정개특위 간사, 거기도 원래 초선이 가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 누가 보냈지? 원내대표다.”

이렇게 해서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협상, 그러나 어쩌면 가장 중요했던 협상이 드러난다. 민주당의 삼각편대와 민주당, 둘 사이에 벌어진 ‘협상’이 그것이다. 이 ‘협상’은 실체가 없다. 이런 테이블이 차려진 적도 없고 당연히 회의록도 없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존재했다. 민주당 삼각편대는 선거제 개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민주당 의원들의 여론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삼각편대는 야 3당과 민주당 양쪽이 모두 받을 만한 접점을 모색했다.

삼각편대는 양쪽 상대를 반대편에 대한 지렛대로 썼다. 공수처와 검경 수사권 조정은 국정과제인 동시에 이 ‘숨겨진 내부 협상’의 중요한 지렛대였다. 핵심 국정과제가 선거제 개혁과 연동되자, 민주당 의원들도 선거제 개혁을 반대하기 매우 어려워졌다. 이 연동의 고리가 풀리면 선거제 합의도 엎어질 수 있다. 야 3당도 선거제 개혁을 따내려면 검찰개혁법을 외면하기 어려워졌다. 선거제와 검찰개혁을 묶은 패키지는 결국 양쪽 협상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숨겨진 내부 협상’에서 삼각편대가 거둔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이것으로 민주당은 선거제도를 현상 유지하는 ‘합리적 선택’을 버리고 손해를 보는 현상 변경에 가담했다.

바탕에는 대통령의 지원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고비 때마다 “비례성 강화를 지지한다”라고 천명해온 소신파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단식 중이던 지난해 12월15일, 문재인 대통령은 임종석 당시 비서실장을 농성장에 보내 “국회가 비례성 강화 합의안을 도출하면 지지하겠다”라는 뜻을 전달했다. 대통령이 여당의 손해 보는 선택에 제동을 걸지 않고 꾸준히 지원사격을 했다. 이게 없었다면 현상 변경은 불가능했다.

■ 역사적인 4년:구조적 다당제로?


2012년 19대 총선에서 양당제는 완연히 뿌리를 내렸다. 2016년 20대 총선은 대선을 코앞에 둔 일정 때문에 제3당 국민의당이 깜짝 출현했다. 하지만 양당제 압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특히 보수는 재통합의 길로 확실히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김무성 의원 등 탈당파 주력은 하나둘 복당하고 사실상 유승민계만 자유한국당 밖에 남았다. 정치권의 분석가들 대부분은 ‘양당 구도로의 회귀’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2016년 총선이 만들어낸 다당제는 짧은 막간극이 될 운명으로 보였다. 4당이 합의한 선거제는 이 당연해 보이는 방향에 결정적인 변수를 만들어낸다.
ⓒ시사IN 포토국민의당은 제3당으로 크게 약진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유승민계가 주장하는 “선거법은 게임의 규칙이므로 합의 처리가 원칙이고, 선거법 패스트트랙은 이 원칙 위반이다”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패스트트랙은 그 자체로 본회의 의결을 보장하지는 않지만(패스트트랙에 올린 채로 계속 협상이 진행된다), 이제 시간은 ‘막는 자의 편’에서 ‘하려는 자의 편’으로 바뀌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현상 변경 세력이 유리해진다. 숫자의 힘으로 상황을 바꾸려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의회주의를 훼손한 폭거”라는 자유한국당의 주장에 여론의 지지는 제한적이다. 자유한국당은 친박계가 당의 다수파로 돌아온 이후로 강경 우파 노선을 걷고 있다. 나경원 원내대표와 황교안 대표가 연이어 친박계의 지원을 받아 지도부가 됐다. 당 지지율은 복원되고 있으되, 극단화의 함정이 함께 작동한다. 핵심 지지층은 돌아왔으나 확장력에는 물음표가 따라다닌다. 박근혜 탄핵을 잘한 일이라고 보는 여론은 시간이 지나도 70% 이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자유한국당 노선이 이들에게 먹혀들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2016년 총선과 탄핵 정국을 거치며 중도층을 대거 잃어버린 탓에 지지층 자체가 오른쪽으로 크게 쏠렸다. 이러면 당의 극단화를 제어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이런 국면에서 자유한국당이 비빌 언덕은 양당제를 복원하는 구조적 압력이었다. 자유한국당이 양당제 압력을 김새게 만들 4당 합의안에 결사 항전하는 이유다. 공직선거법이 패스트트랙에 올라타는 데 성공하더라도,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270일 심사기간(이론상 180일로 단축도 가능하다)을 거치는 동안 정치협상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긴 과정에서 자유한국당이 새로운 안을 들고 나올 수 있고, 4당에서 내부 반발이 일어나 합의가 깨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심지어는 최종 본회의 단계에서, 지역구 축소로 피해를 보는 의원들이 반란표를 던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상상 가능한 암초와 아직 상상조차 어려운 암초가 모두 남아 있다.

서울대 박원호 교수(정치학)는 2016년 총선을 정치 지형이 재구성되는 결정적인 선거, 그러니까 ‘정초선거’가 될 후보로 평가한다. “이 총선에서 보수당 지지 블록이 심대하게 흔들렸다. 비례대표 투표에서는 상당한 숫자가 당시 국민의당으로 빠져나갔다. 이때부터 보수 정당 우위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2016년 총선에서 180석까지 노린다던 새누리당은 122석으로 제1당까지 놓치는 참패를 당했다. 이 참패 때문에 새누리당은 의회의 주도권을 놓쳤고, 이후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탄핵의 충격파는 보수 정당을 둘로 쪼개는 힘을 발휘했다. 2016년 총선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한국의 강고한 보수 우위를 해체했다. 이때 잃어버린 지지층을 자유한국당은 아직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2016년 총선이 만들어낸 ‘우연한 다당제’가, 여러 암초를 피해 제도 변경까지 도달하면 그때는 ‘구조적 다당제’로 바뀐다. 20대 국회는 바로 이 시도를 하는 중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2016년 총선은 그야말로 거대한 변화의 서막으로 평가받게 된다. 이 에너지가 하도 거대해서, 국회는 선진화법 통과 이후 7년 만에 물리적 충돌을 겪었다.

어정쩡하게 사라져갈 운명으로 보였던 제3당이 정국의 방향을 결정했고,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게 당연한 제1당은 현상 변경 노력을 주도했으며, 여당을 막아설 힘이 충분한 제2당은 오히려 4당 공조에 포위되는 처지로 내몰렸다. 그저 그런 막간극으로 남을 뻔했던 20대 국회는 정치의 구조변동을 만드는 중대한 국회로 돌변하는 중이다. 그것도 제1당 민주당과 제2당 자유한국당이 모두 손해를 보는 구조변동이 본회의를 통과할 가능성이 열렸다. 보통은 불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이야기가, 일단 현실의 출발선에 섰다. 20대 국회는 지금 막 절정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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