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1호선 대방역 3번 출구로 나가 10분 정도 걸으면 공군회관이 나온다. 10차선 대로변에 자리 잡은 공군회관 바로 오른쪽 건물은 유독 담이 높다. 창문은 대부분 가려져 있고 곳곳에 CCTV가 달려 있다. 1970년대 탈북자가 남한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가야 했던 일명 ‘대성공사’다. 정식 명칭은 국군정보사령부 소속의 6073부대다. 당시 중앙정보부·국군정보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국방정보본부·경찰 5개 기관이 이곳에서 탈북자를 합동으로 신문했다. 지금은 ‘대방아트센터’라는 이름으로 위장해 있다. 여전히 군 시설이다.

탈북자 김관섭씨(83)는 대성공사에서 1974년 8월부터 1978년 3월까지 머물렀다. 법에 근거가 없는 불법 구금이었다. 그는 이를 두고 2015년부터 국가 대상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했다. 재판 과정에서 대성공사와 관련해 처음 공인된 사실이 여럿 밝혀졌다. 6073부대장 명의로 온 사실조회 회신서나, 대성공사 사장을 지낸 전직 직원의 법정 증언, 또 다른 직원의 진술서 등 지금껏 베일에 가려져 있던 대성공사의 역사가 드러났다.


ⓒ시사IN 윤무영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탈북자 조사시설 옛 대성공사(대방아트센터) 모습.

6073부대 사실조회 회신서에 따르면, 대성공사는 1954년 4월 미 8군 포로수용소 내에 설치됐다. 군정대 신문소라는 이름이었다. 대성공사 사장이었던 박신명씨(가명)는 김관섭씨 손해배상 1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군이 대성공사를 관리하고 조사는 각 정보기관이 같이 했다”라고 증언했다.

“탈북자 90%가 대성공사 거쳐갔다”

합동 신문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68년 김신조가 넘어와서 청와대를 폭발하려고 하니까, 모든 정보기관이 각자 정보를 수집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기관마다 틀렸다. 각자 다 옳다고 하니, 합동으로 조사해서 모든 정보기관이 의견을 종합해 보고하라고 해서 대통령 훈령 28호가 만들어졌고, 거기에 근거해 대성공사를 설치하고 운영했다.” 당시 만들어진 대통령 훈령 28호는 현재 비공개다.

1994년 4월 ‘중앙신문단’으로 정식 명칭이 다시 바뀌었다가 2008년 관련 업무를 모두 경기도 시흥에 있는 중앙합동신문센터(이하 합신센터)로 넘겼다. 합신센터는 국가정보원이 관리했다. 2010년 탈북자 급증으로 합신센터가 모든 인원을 다 수용하지 못하자, 대성공사는 2014년까지 4년 동안 탈북자를 다시 받았다.

모든 탈북자가 대성공사를 거쳐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박신명 대성공사 전 사장은 “당시는 귀순자의 90%가 대성공사로 왔다. 안 오는 사람은 고위층이다. 시설이 안 좋고 하니 특별하게 별도 관리했다”라고 증언했다. 그는 조사 완료 후 대성공사에 머무는 시간에 대해 “대통령 훈령 28호에 의해 위에서 결정한다. 보통은 1년 정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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