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대선주자들의 ‘총선나기’

절박한 ‘무대’의 일보후퇴

오세훈의 대선방정식, ‘정치 1번지’에서 풀릴까

광주 찾은 문재인의 배수진

4년 ‘벽치기’한 김부겸, 새로운 도전 나서나

일석이조 노리는 ‘안길동’의 도전

기자들은 의석수를 어떻게 예상할까

 

흰색 벤츠가 유세차량 앞에 멈췄다. 차 문이 열리더니 “김부겸 파이팅”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뒤따라오던 차 운전자도 “힘내세요”라며 손을 흔든다. 응원의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차도 여러 대였다. 한 식당에서는 점심 식사를 하던 이들 서넛이 숟가락을 놓고 밖으로 나와 박수를 쳐댄다. 만촌동의 한 사거리에서는 지지자가 매실 음료 한 박스를 건넸다. 말린 감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어느 주택가 골목에서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젊은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노트에 김부겸 후보의 사인을 받아갔다. 집 앞에서 연설을 듣던 70대 노부부는 “이번에는 김부겸이 된다카데요. 지난번엔 안 찍었는데 요번에는 찍을라꼬요”라고 말했다. 총선을 8일 앞둔 4월5일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대구 수성갑)의 유세를 쫓다 목격한 장면이다.

ⓒ시사IN 조남진4월5일 범어역에서 유세하는 김부겸 후보(맨 오른쪽)에게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이가 많았다.

놀라운 광경이다. 보수 진영의 본진인 대구에서 유권자들이 제1야당의 정치인에게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하고 있었다. 정치인 혐오가 극에 달한 요즘 수도권에서도 보기 힘든 풍경이다.

4년 전 19대 총선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명함을 건네면 눈앞에서 조각조각 찢어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대구 전역이 들썩들썩했다던 2014년 대구시장 선거 때와 비교해도 확실히 달라졌다. 김부겸 후보에 대한 대구 수성갑 유권자의 호응은 글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김부겸은 민주당만 아니면 찍어줄 낀데…”라는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정작 김부겸 후보는 조심스러웠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그가 완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지지자와 선거운동원이 마음을 놓지 않도록 다잡았다. 2014년 대구시장 선거 때도 박빙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었지만, 결과는 15%포인트 차이 패배였다. 4월6일 저녁 유세에서는 더블스코어까지 격차를 벌린 것으로 나오는 〈문화일보〉 여론조사 결과를 언급하며 “술자리에서 선거 끝난 것처럼 ‘김부겸이 이겼다’고 떠들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철저한 ‘로키(low-key) 전략’이다. 조용하면서 신중하게 유권자에게 ‘침투’하고 있다.

압권은 ‘벽치기 유세’다. 인적이 드문 주택가 골목이나 아파트 단지에서 담벼락을 향해 혼자 독백하는 유세다. 길거리 행인이 아니라, 집에 있는 유권자를 공략하겠다는 유세 방법이다. 소음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듯 유세를 진행하고, 길어야 10분이면 자리를 뜬다. 이런 방식으로 하루 50군데씩 선거운동 기간에 같은 골목을 세 차례 방문한다. 하루 한 차례 정도 열리는 집중 유세를 빼면, 후보의 일정은 전부 벽치기에 몰려 있다.

언뜻 보면 허공에 대고 떠드는 것 같지만, 집안에 살고 있는 주민을 ‘세 번이나’ 만나는 효과가 있다는 게 김 후보의 생각이다. 골목 동선을 잡고, 유세 차량의 위치를 정하는 것도 모두 김 후보가 판단한다. 취재기자들이 김 후보의 위치를 묻기 위해 수행비서에게 문의하면 “어디로 갈지 후보만이 안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다.

ⓒ시사IN 조남진김부겸 후보는 대규모 유세보다는 인적이 드문 주택가 골목이나 아파트 단지에서 담벼락을 향해 혼자 독백하듯이 하는 ‘벽치기 유세’(위)에 집중했다.

야권에게 ‘험지 중의 험지’인 대구에서 보낸 김부겸의 4년은 그야말로 ‘벽치기’였다. 나 홀로 동네를 다니며 바닥을 다졌다. 저녁마다 술집을 돌며 막걸리 잔을 마다하지 않았고, 한밤중에도 유권자가 오라면 달려갔다. 당 차원의 지원은 전무했다. 오히려 대구·경북 몫 비례대표였던 홍의락 의원을 공천 탈락시키며 김 후보의 고군분투에 찬물을 끼얹었다. ‘헌신’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그의 대구 도전. 이쯤에서 궁금증이 인다. 그는 왜 대구를 택한 것일까. 김부겸에게 이번 대구 총선은 어떤 의미일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김부겸이 대구 출마를 선언한 때가 2011년 12월이었다. 경기도 군포에서 3선을 지낸 그가 2012년 4월 총선에서 대구 출마를 선언하자 지역 정가가 발칵 뒤집혔다. “군포에서 4선을 하는 건 월급쟁이 하겠다는 것이다.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민주당의 마지막 과제인 지역주의를 넘어서겠다”라는 것이 그의 출마 일성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있다. 당시 대구 출마를 선언한 이후 김부겸 후보는 당권 도전 의사도 함께 밝혔다. 당대표 출마 선언에서 그는 자신의 당인 민주통합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자신의 이익에는 약삭빠르고, 공공선을 실현하는 데는 너무나 무능하다. 그래서 국민들이 안철수 현상을 좇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1월15일 전당대회에서 그는 한명숙-문성근-박영선-박지원-이인영 의원에 이어 턱걸이로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당을 바꾸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워낙 당내 소수파였다. 대중적 지지는 높았지만, 당내 기반은 약했다. 학생운동 시절부터 투옥을 거듭한 강성 운동권 출신이지만, 현실 정치에 뛰어든 이래 줄곧 진영을 가르는 정치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선명한 이념 대결보다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제3지대론자였고, 야권 일부는 그를 ‘회색’이라고 비판했다.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제정구 전 의원을 따라 한나라당에서 처음 배지를 달았던 경력도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김부겸 의원과 오래 일한 캠프 관계자는 “사실상 왕따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당내에서 입지가 약했다”라고 말했다.

“총선 이후 정치판을 바꾸기 위한 도전에 나설 것”

그에게 대구는 숙명의 도전지다. 대구라는 보수의 벽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비로소 당내에서도 자신의 정치를 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험지 승리를 통한 체급 상승’ 따위가 정치적 목표가 아니다. “대구를 녹인 방법으로 야권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라는 게 김부겸의 목표다. 대구 도전은 헌신이자, 정치적 명운을 건 승부수인 셈이다.

김부겸 캠프의 핵심 관계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서 내려온 이들이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대구에서 선거운동을 해보니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보수층)의 마음을 잡는지 알겠다”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누구를 공격하고 비판해봐야 아무런 호응이 없다. 무엇을 어떻게 이루어낼지 이야기를 해야 먹힌다. 나는 비록 야당이지만 여당과의 협력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할 때 유권자들이 귀를 기울이더라.”

확실히 대구에서 보낸 4년은 김부겸의 위상을 바꾸어놓았다. 2012년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벌써부터 20대 국회에 입성할 경우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리라는 전망이 쏟아진다. 든든한 우군도 생겼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김부겸 바람을 타고 당선된 더민주 기초의원 13명이다. 강민구 대구 수성구의원의 말마따나 “김부겸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라는 각오를 다진 이들이다. 야당의 험지에서 더욱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김부겸 후보를 지원하고 있다.

김부겸 캠프의 핵심 관계자는 “대구에서 통하면 더민주에서도 통한다는 걸 보여주겠다. 총선 이후 지리멸렬한 정치판을 바꾸기 위한 도전에 나설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김부겸의 도전은 이번 총선의 승패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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