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풀고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기획한 ‘꿈이 있는 공부-부모학교’ 강좌를 〈시사IN〉이 지상 중계한다.

꿈이 있는 공부
①김진애-‘공부 생태계’를 꿈꾸는 공부 이야기
②황선준-스칸디 부모가 말하는 북유럽 학생들의 공부 이야기
③강영안-철학자가 말하는 공부 이야기
④황농문-공부하는 힘, ‘몰입’에서 찾다! 
⑤정기원-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공부:초등편 
⑥강영희-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공부:중등편  
⑦송인수-꿈이 있는 공부와 진로:오해와 진실 


‘꿈이 있는 공부-부모학교’ 마지막 강좌가 5월7일 열렸다. ‘공부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 기획된 이 강좌는 ‘왜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 강의로 이어지며 많은 이의 호응을 얻었다. 공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통념 또한 일곱 차례의 강좌를 거치며 하나하나 깨져나갔다. 이 강좌를 기획한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송인수 공동대표의 마지막 강의를 지상 중계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이번 강좌를 준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수단이 된 공부, 욕망의 공부가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공부 담론 내지 방법론은 주변에 차고 넘친다.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 ‘20대, 공부에 미쳐라’ 하고 몰아치다 결론은 ‘공부하다 죽어버려라’ 하는 식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의식 있다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잘 안 한다. 교사 시절 가르친 학생 중 아버지가 공부를 못하게 해서 고민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세상은 나쁜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갔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기여는 내 자식이라도 공부 안 시켜 세상에 더는 나쁜 짓 하지 않는 거다.” 그런 아버지 눈을 피해 몰래 공부하느라 학생이 고생을 많이 했다. 필사적으로 공부하더니 결국 서울대 사범대에 가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버지가 고도의 작전을 쓰셨던 것 같기도 하다(웃음).

그런데 공부란 게 사실 학교 공부나 시험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삶이 공부다. 곧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은 삶을 끝내라는 의미인 것이다.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사교육 받지 말고 당신의 진로를 스스로 찾아라’ 하는 식으로 개인에게 모든 걸 맡겨둘 게 아니라, 공부라는 주제에 대해 좀 더 책임감 있는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제공
송인수 공동대표는 교사 출신이다. ‘좋은교사 운동’을 하다 학부모 운동의 중요성에 눈뜨고 2008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창립했다.

‘꿈이 있는 공부’ 하면 많은 분이 몇 가지 오해를 하는데, 그것부터 정리하고 넘어가보자. 먼저, ‘성공을 위한 공부가 왜 문제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가겠다는 데 뭐가 잘못됐냐는 거다. 사실 그간 우리가 생각해온 공부는 이처럼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학벌, 일자리, 승진, 출세 등등. 그러나 나는 이를 ‘욕망을 위한 공부’라 정의하고 싶다. 욕망이 뭘까? 타인은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 유지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세월호가 상징적이다. 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원칙·가치관·직업윤리 다 필요 없다는 자세. 이것이 지금의 비극을 낳았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시중에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처럼 이른바 ‘공부의 신’들의 책이 수두룩하다. 이들은 심지어 직업을 가진 뒤로도 공부법 강의를 계속하곤 한다. 직업조차 공부법 세일즈를 위한 스펙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삶은 양파 껍질이나 다름없다. 벗기고 또 벗겨도 입시 공부, 취업 공부밖에 없다. 곧 자신의 성공을 위한 시험공부 외에는 삶이 없다. 삶이 없는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라고 나는 다시금 강조하고자 한다.

‘강남좌파’ 꿈꾸는 이율배반 부모들

두 번째로 ‘성공과 행복(가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다. 실제로 많은 부모는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사회적·직업적으로 성공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나아가 사회 약자를 돌보며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누리기를 희망한다. 이런 삶을 네 글자로 줄인다면? 아마도 ‘강남좌파’가 되지 않을까?(웃음) 다시 말해서 삶은 강남에 뿌리내리고 사고는 진보적으로 하길 바라는 건데, 이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타자에게 관심을 두면서 자신의 성공을 중심으로 공부한다는 건 어찌 보면 이율배반이다. 그럼에도 이런 삶을 꿈꾸는 것이 우리의 이중성이다. 이를 인정하되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연합뉴스
삶이 곧 공부다. 삶이 계속되는 한 공부 또한 계속된다.

세 번째로 많이 받는 질문은 ‘시험을 위한 암기식 공부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이다. 물론 암기식 공부에도 강점은 있다. 메가스터디 손주은 대표 같은 이는 암기식 공부 예찬론자다. 〈천자문〉 〈사자소학〉을 외우게 했던 옛 서당식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인지력이 확대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그는 고교 과정까지는 배운 지식을 고스란히 잘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암기식 교육이 지난 몇십 년간 우리 국가 능력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도 18세기 이전까지는 암기식 교육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몰입〉을 쓴 칙센트미하이는 19세기 들어 활자화된 지식의 가치가 떨어지고 기억의 중요성이 극적으로 감소하면서 암기식 교육이 학교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됐다고 말한다. 그 뒤 서양은 원인과 이유를 탐구하는 학문 중심으로 선회한다. ‘왜(Why)’라고 묻고 토론하는 것이 학문의 중심이 된 것이다.

나는 두 가지 공부 방법을 통합한 유대인의 교육방식에 주목하고 싶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토라〉(모세오경) 등 경전을 완벽하게 암기하게끔 가르친다. 그런 한편으로 토론과 질문이라는 서구식 교육방법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곧 경전 구절에 대해 여러 랍비의 상이한 해석을 제시한 다음 학생들에게 어느 쪽 견해가 더 타당한지 토론해보게 하는 식으로 학생들의 질문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이때는 랍비라 하더라도 정답을 제시할 권한이 없다. 토론 과정에서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는 유럽과는 또 다른 것이다. 유대인들은 1948년 이전까지 전 세계를 떠돌며 유랑 생활을 했다. 배척도 많이 당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스펙이라는 게 이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능력, 곧 문제를 제기하고 지식을 창의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도 소통하고 자립하는 능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지식도 이와 유사할 것이라 본다. 한국뿐 아니라 동양 국가 대부분은 지금도 암기식 교육 중심이다. 중국, 일본, 북한 다 마찬가지다. 2007년에 북한의 한 중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는데, 교실 한편에 전교생 석차가 1등부터 꼴찌까지 순서대로 붙어 있었다. 심지어 사진도 함께. 나는 왜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들을 빨갱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빨갱이 국가가 일제고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말이다(웃음). 이런 식의 교육은 오늘날처럼 팽창하는 지식의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어차피 한국은 수출로 먹고살아야 한다. 국가 간 유동성은 더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처럼 암기식 교육과 토론식 교육의 강점을 잘 절충해 스펙 없이도 버틸 수 있는 능력, 내일 갑자기 세계 어느 곳에 떨어지든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부에 대한 오해들과 관련해 내 생각을 말씀드렸으니 이번엔 ‘꿈이 있는 공부’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한다. 흔히 ‘꿈=직업’을 떠올리는데, 특정 직업이 꿈이 될 수는 없다. 첫 강좌를 맡은 김진애씨는 ‘우리에게는 개인을 넘어서는 더 큰 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꿈을 위해 작은 역할이나마 자신이 참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질 때 공부의 동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내 방식으로 정리하면 △재능·적성에 맞는 공부로 직업을 선택하되 △그 직업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약자를 돌보며 공동체의 관계를 복원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보람을 경험하며 △경제적으로 자립적인 생활을 가능케 하는 것이 ‘꿈이 있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80대 노인이 아침마다 수학문제 푸는 이유

그렇다고 공부가 꼭 뭔가를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한 80대 노부부 얘기를 인상 깊게 들은 일이 있는데, 이분들이 은퇴한 뒤 아침마다 하는 게 수학문제 푸는 일이라고 한다. 아내는 프랑스어 배우기에도 도전했다. 이분들이 다시 직업을 얻으려고 이런 일을 하겠나? 아니다. 이분들은 “세상일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워서 공부한다”라고 말한다. 과거에서 뭔가를 배우며 적극적으로 살아갈 때 ‘아, 나도 세상의 일부구나’ 느끼면서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멋지지 않나? 한국 사회에서는 은퇴하면 초라하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 걸 불우해하면서 정신적으로 퇴행하는 삶을 사는 분도 많다. 그런데 이 노부부는 실용성·유용성과 무관한 공부를 하면서, 은퇴가 주는 비루한 삶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과 관계 맺을 때 우리의 삶에 더 이상 은퇴는 없다면서.

욕망이 있는 공부는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멈춘다. 반면 꿈이 있는 공부는 공부와 삶이 일치하기에 멈추는 법이 없다. 그런가 하면 욕망이 있는 공부는 성취를 이룬 뒤 공허함이 찾아온다. 반면 꿈이 있는 공부는 자긍심과 보람을 가져다준다. 앞으로는 욕망이 있는 공부에서 꿈이 있는 공부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게끔 사회 분위기를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일곱 차례 강좌를 거치며 꿈이 있는 공부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첫째는 자녀 스스로 꿈을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일찍부터 자기 진로를 정하는 일은 경계하고 싶다. “한 가지 패로 인생을 사는 것은 위험하다. 직업을 일찍 정해놓고 그 직업을 위해 매진하다 보면 나중에 당황하기 쉽다. 물론 진로를 상상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학습 의욕을 키워주는 장난감에 불과하다”라고 최영우씨(도움과나눔 대표)는 말한다. 한 가지 장난감을 갖고 10년씩 노는 아이는 없다. 

다음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자긍심이다. 자신에 대한 긍지가 있고, 다른 사람의 관심이나 시선에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타인을 돌아볼 수 있다. 지금의 나도 지키지 못해 힘겨운 사람이 어떻게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인가. 부모는 자녀가 이런 자긍심을 키울 수 있게끔 지켜보고 지지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밖에 △정신의 자유를 주는 독서 능력 △문제를 제기하고 푸는 힘 △생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힘 △공부하는 기쁨과 행복 △자립하고 독립하는 능력, 이 모두가 꿈이 있는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하자면, 우리 부부는 아들이 어릴 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결과 나중에 많은 홍역을 치렀다. 지금 아이가 고3인데, 자라는 동안 정말이지 별별 말썽을 다 피웠다. 감정 표현을 잘 못하고, 타고난 감수성을 잃은 채 기계적인 삶에 집착하는 아이를 보며 눈물 흘린 날도 많았다. 그래도 아이를 포용하고 허용하려 노력하자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어느 날은 이 녀석이 갑자기 시를 써와 나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시를 잘 써서가 아니라 시를 통해 이제껏 하지 않던 감정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최근에는 자기주장을 담은 긴 글도 곧잘 쓴다. 그렇다고 ‘공부 잘하나 봐요’라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성적 들으면 웃음이 터지실 거다(웃음).

그렇지만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삶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부모가 이런 믿음을 갖고 있어야 아이를 지켜줄 수 있다. 아이의 안전한 미래를 위해 스펙을 키워주는 데 집착하는 부모가 많은데, 솔직히 지금 같은 세상이 계속된다면 우리 아이들 중 태반은 정규직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해서도 물론 노력해야겠지만 그보다 아이들이 가난한 삶 속에서도 행복을 누리고 타인과 연대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걸 키워주는 것이 꿈이 있는 공부다.

정리·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기자명 송인수(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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