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풀고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기획한 ‘꿈이 있는 공부-부모학교’ 강좌를 〈시사IN〉이 지상 중계한다.

 

꿈이 있는 공부
①김진애-‘공부 생태계’를 꿈꾸는 공부 이야기
②황선준-스칸디 부모가 말하는 북유럽 학생들의 공부 이야기
③강영안-철학자가 말하는 공부 이야기
④황농문-공부하는 힘, ‘몰입’에서 찾다! 
⑤정기원-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공부:초등편 
⑥강영희-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공부:중등편  
⑦송인수-꿈이 있는 공부와 진로:오해와 진실 


공부는 무엇일까, 공부를 왜 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기획된 ‘꿈이 있는 공부-부모학교’ 3강이 4월10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강단에 선 강영안 교수(한국철학회 회장)는 철학자답게 공부의 본질을 파고드는 질문들로 강의를 이어갔다. 동서양의 고전과 역사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강의를 듣고 난 수강생들은 “아이보다 나를 먼저 돌아보게 된 강의였다” “이제까지 공부가 뭔지도 모른 채 공부를 해왔음을 깨달았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남은 강좌에 대한 수강 신청은 이 단체 홈페이지(www.noworry.kr)에서 하면 된다.

 

 

ⓒ시사IN 윤무영
강영안 교수(위)는 칠판을 이용하는 고전적 방법으로 강의를 펼쳤다. 칠판에는 라틴어, 히브리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자 등이 빼곡히 적혔다가 지워지곤 했다.

 

 

 

 

내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공부=입시 공부’라 생각한다면 더 그렇다. 시골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다시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총 4개 대학을 다녔는데 그사이 한 번도 입시 공부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다. 어쨌거나 이 자리에 선 사람으로서 오늘은 세 부문으로 나눠 공부 얘기를 해볼까 한다.

먼저 ‘우리 삶 자체가 모두 공부’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6~7년 전이었나? 우리 아이들이 밤늦게 음악을 듣고 있더라. 유튜브를 통해 유명해진 기타리스트의 연주였는데, 이걸 듣다 말고 작은놈이 “저 사람은 공부 안 해도 되니까 좋겠다”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받아쳤다. “왜 공부를 안 해도 돼? 학교 공부만 공분가?” 그날 밤 늦도록 아이들과 논쟁하면서 ‘아, 공부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다르구나. 아이들이 생각하는 공부는 오직 시험을 위한 공부뿐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소리를 구별하고, 엄마 젖을 찾는 일이다. 좀 지나면 걷겠다고 버둥댄다.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건을 찾고, 컵을 쥐고, 말을 배우고 하는 모든 과정이 공부다. 칸트는 이를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된다고 말했다. 칸트에 따르면 사람마다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소질(Naturanlage)이 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려면 이를 드러내 제대로 기능하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선생님한테 배우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되는 모든 활동이 공부인 것이다.
 

ⓒ시사IN 자료
동·서양에서 모두 강조한 공부법은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위는 서당에서 공부 중인 학생들.

그렇다면 공부란 무엇일까. 한자로 공부는 ‘工夫’ 또는 ‘功夫’라 쓴다. 이게 무슨 뜻일까. ‘힘쓰다’ ‘애쓰다’ ‘노력하다’라는 뜻이다. 영어로도 마찬가지다. 윌리엄 암스트롱이 쓴 책 제목이 〈공부는 어렵다(Study is hard work)〉인데, 어찌 보면 이는 ‘원은 둥글다’와 같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공부라는 어휘 자체가 어렵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 ‘스터디(study)’는 라틴어 ‘스투디움(studium)’에서 파생했는데, 그 동사형인 ‘스투데오(studeo)’가 ‘노력하다(to do effort)’라는 뜻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공부는 어려운 것임을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공부라는 게 쉽다고는 말할 수 없다. 처음부터 애써서, 집중해서, 힘들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아이가 처음 배밀이를 시작해 몸을 뒤집고 하는 과정을 지켜보라. 하나하나 얼마나 힘들고 애를 써야 하는 과정인가. 교육학자 피아제는 어린아이의 인지 발달 과정을 일종의 전쟁이자 투쟁 과정으로 봤다.

그런데 이렇게 애쓰고 힘쓰는 과정들을 거치고 나면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걷기에 숙달된 아이들이 더는 걷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을 하듯, 영어에 숙달된 이가 영어 대신 얘기하려는 내용에 집중하듯, 배우고 연습하는 과정을 통해 공부가 자동화·습관화되면 그때부터 비로소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대체로 이 단계에 해당하는 것 같다. 이렇게 습관화한 것들을 토대로 대학에서 자기가 업으로 삼을 것을 파고들면 된다. 율곡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 중 “공부에 대해 묻겠습니다. 하나에 집중해 마음을 붙들어놓되(主一無敵) 만 가지 변하는 일에는 수작을 하듯(酬酌萬變)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공부가 이를 수 있는 하나의 경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의 모든 순간이 공부라면, 학생을 가르치든 가구를 만들든 자기가 하는 한 가지 분야에 집중하되, 그 밖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듯(수작하듯) 여유 있게 대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문과·이과 나누는 학제 “재앙과 다름없다”

두 번째로는 가장 기본적인 공부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이제까지 우리 삶 전체가 공부라는 얘기를 했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과연 인문학의 자리는 어디일까.

인문학은 ‘더 휴머니티즈(the human ities)’ 또는 ‘리버럴 아트(liberal arts)’라 번역된다. 그렇다면 리버럴 아트란 무엇일까? 리버럴 아트의 반대말이 세르빌 아트(servile arts)임을 알면 개념 파악이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세르빌은 라틴어 세르부스(從)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까 세르빌 아트를 직역하면 ‘종(從)의 기술’이 될 것이다. 그 반대가 자유의 기술(리버럴 아트)인 셈이다. 쉽지 않은 개념이지만 좀 더 들어가보자. 종의 기술은 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기술이다. 이를테면 빵 굽고 옷 짓고 도로를 내는 기술, 곧 유용성에 기여하는 기술이 종의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사람됨과는 무관하다. 반면 자유의 기술은 그 자체가 목적인 기술이다. 한마디로 사람을 사람답게, 자유롭게 만드는 기술이다.

이건 또 무슨 뜻일까.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온 ‘트리븀(trivium)’과 ‘쿠아드리븀(qua drivium)’ 개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트리’는 숫자 3, ‘쿠아드리’는 4를 의미하고, ‘븀’은 길(道)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고하고, 다른 사람과 교류하려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하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된 세 가지 학문, 곧 문법·수사학·논리학이 트리븀(3과)이다. 쿠아드리븀(4과)은 수를 다루는 네 가지 학문, 곧 산수·기하·천문·음악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이 중 트리븀을 가장 기초적인 학문으로 생각하고, 대학까지 이를 교육했다. 곧 무슨 학문을 하든, 어느 직업을 선택하든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자유롭기 위해 필요한 학문이 문법·수사학·논리학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등학교 과정부터 문과·이과를 나눈다. 이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본질로 따져 인문학은 ‘리버럴 아트’보다 ‘휴머니티즈’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이는 라틴어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 itatis)’를 영어로 번역한 것인데, 직역하자면 인간에 대한 공부를 뜻한다. 여기서 파생된 휴머니즘을 우리는 흔히 인본주의 또는 세속적 인간중심주의로 해석한다. 이는 휴머니즘의 원뜻과 거리가 멀다. 휴머니즘은 본래 사람이 어떻게 살지, 사람의 길을 묻고 찾는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르네상스 인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인물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인데, 그가 1336년 쓴 책이 〈방투산 등정기〉이다. 알프스 산맥에 속하는 방투산(Mont Ventoux)에 힘겹게 올라 펼쳐든 책의 한 구절에서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경험한다. “사람들이 산의 웅장함이나 바다의 광활함에는 놀라고 경탄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는다”라는 대목에서다. 이렇게 방투산 정상에서 ‘나 자신이 누구인가’ 묻는 것을 배움의 시초로 삼는, 르네상스 인문학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동양에서는 〈역경〉에 인문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 “천문(天文)으로 시절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문(人文)으로 사람을 바꿔 천하를 이룬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산화비괘’ 편). 천문이 하늘이 만든 무늬를 의미한다면, 인문은 사람의 생각이나 고통·희망·좌절을 표현한 무늬 곧 음악·무용·시·소설·역사·종교 등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면 사람들을 잘 교육시켜 좀 더 살 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사고가 이 구절에 담겨 있다.

이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인간의 삶은 시간 축과 공간 축 사이에서 나와 타자가 상호 관계하는 방식을 통해 빚어진다. 그런 만큼 나와 타인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대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한 축의 철학자들은 나와 타인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관계도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나고, 타인은 타인일 뿐이라는 식이다. 다만 타인이 당하는 억울함을 나도 당할 수 있는 만큼 타인에게 일정한 관심은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다른 한 축의 철학자들은 나를 나 되게 만드는 데 타인이 본질적 기여를 한다고 본다. 마르틴 부버는 “나는 너에게서 내가 된다”라고 했다(〈나와 너〉). 타자를 무시하고 배려하지 않는 삶에서는 나조차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나는 너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이것이 인문학이 있어야 할 자리다.

“공부가 재미없는 건 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

마지막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책 읽고 글 읽는 것이 공부에서 가장 중요할까? 주자는 〈주자어류〉에서 “책을 읽는 것은 배우는 사람에게 두 번째 일이다(讀書乃學者第二事)”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는 뭘까? 타인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배우는 것이다. 동·서양 공히 가장 본질적인 공부로 꼽는 것이 위기지학(爲己之學), 곧 자기를 세우는 공부다. 이것과 대비되는 것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爲人之學), 다시 말해 스펙을 쌓으려는 공부다. 물론 입시나 취업이 걸려 있는 만큼 이런 공부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주자는 위기지학에 70%, 위인지학에 30%가량을 할애하라 하기도 했다. 그래도 공부의 본질은 위기지학인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되, 동·서양에서 모두 강조한 것이 소리 내어 읽기이다. 요즘은 묵독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고 안중근 의사는 말했다. 왜 눈곱이 낀다고 하지 않고 가시가 돋는다고 했겠나. 당시의 공부는 귀로 들으면서 하는 공부(廳讀)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수도원도 마찬가지였다.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고전을 외우고, 이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그러지 않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옛 사람들은 알았던 것이다. 지금도 사람을 사람답게 형성시키는 텍스트는 소리 내어 외우는 게 좋다고 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공부란 정보를 습득하고 책만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자전거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자전거의 구조에 대해 아무리 상세한 설명을 듣는다 한들 자전거를 탈 수 있나? 아니다. 직접 올라타 페달을 밟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넘어지고 다치기도 하면서 자전거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듀이는 행함으로써 배운다고 했다. 뭔가 배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실행(practice)이 필요하다. 실행을 하다 보면 결국 내가 바뀐다. ‘자전거 보는 사람’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다음에는 즐거움(enjoyment)이 따라온다. 이 단계가 되면 “공부가 쉬워” 내지 “맛있어” “재밌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결국 공부가 재미없는 건 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 또한 힘들고 어렵지만 이 단계를 거치고 나면 “인생도 선물이야” 하면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이 단계가 되면 공부가 더 이상 경쟁이 아니라 즐기는 것,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될 터이다.

정리·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기자명 강영안 (서강대 철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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