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일 하는 사람이라서였을까. 대중교통에서, 길거리에서, 카페에서 책 읽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웠다.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서 자꾸만 목이 길어졌다. 그런 사람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수년간 온라인으로만 독서 모임을 진행해오던 출판 편집자 김지은씨(32)는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외국에서 진행되는 ‘사일런트 북클럽’에서 힌트를 얻었다. 각자 가져온 책을 같은 장소에서 읽는다는 규칙 말고는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았다. 참가비도 없다. 인스타그램 침묵독서클럽(@chimdokle) 계정을 열고 ‘나 같은’
주인 없는 개는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최근 정윤영씨(46·왼쪽)가 들개를 만난 곳은 전주의 작은 시보호소다. 주민들이 “들개가 돌아다닌다”라고 민원을 넣으면 지자체·국립공원 담당자들이 개를 포획해 시보호소에 맡긴다. 정윤영씨가 찾아간 시보호소는 작은 동물병원에 딸린 어두운 창고였다. 정씨는 이틀 후면 안락사될 어린 개들에게 가족을 찾아주기로 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시보호소의 법정 보호기간은 약 10일이다. 그 기간에 입양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개들은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잃는다.혜리씨(35)는 짧은 줄에 묶인 마당개 옆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합작 공영방송 채널인 아르테 TV의 10년 차 영상기자 아녜스 나밧(33)과 마리안 게티(31)가 올해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대상 ‘기로에 선 세계상’을 수상했다. 5·18기념재단과 한국영상기자협회가 공동주최하는 힌츠페터 국제보도상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잠입해 영상으로 현장을 담아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기리며, 2021년부터 매해 진실을 알리고자 분투하는 영상기자에게 시상해오고 있다.두 사람은 2020년 11월2일부터 2022년 11월3일까지 ‘티그라이 전쟁(Tigray war)’에서
서울대-하버드 대학 졸업, 스타트업 ‘퍼블리’ 창업, 국내 최초 유료 디지털 콘텐츠 시장 개척, 유료 멤버십 ‘일 매출 1억원’ 달성···. 박소령 전 퍼블리 대표(44)와 ‘실패’라는 단어는 사실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이런 커리어를 밟아온 그가 첫 책으로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콘텐츠업계에서 퍼블리라는 브랜딩 자체로 깊은 인상을 남긴 그였다. ‘실패했다면 얼마나 실패했다는 건가’라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가, 설득당해버렸다.2015년 창업한 퍼블리를, 2024년 7월 콘텐
‘글쓰기는 노동이다. 작가도 노동자다.’ ‘작가노조 준비위원회(작가노조)’ 홈페이지에 쓰인 글귀다. 작가들의 권익을 향상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꾸려진 작가노조는 2023년 한 텔레그램 방에서 시작되었다. 소수였던 인원이 점점 늘어나 현재 85명이 소속되어 있다. 오빛나리 작가(33)는 올해 초 작가노조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016년, 문단 내 성폭력 고발자 지지연대 ‘탈선’의 대표였던 이 위원장은 문단 내 위계와 권력을 어떤 형식으로 풀어내야 하나 늘 고민이었다. 노동권으로 접근했을 때 일이 좀 더 용이해지지 않
10년을 버틴 유튜브 채널이 있다. 구독자 43만명인 CBS 유튜브 채널 ‘씨리얼(www.youtube.com/@creal.official)’이다. 2015년 인턴 8명이 청년들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영상을 만든 게 시작이었다. 2016년부터 정치 사회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씨리얼이 만드는 영상은 좀 다르다. ‘왕따였던 어른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그때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용돈 없는 청소년’과 특성화고 학생들, 자살 유가족, 조현병 환자 등 기성 언론에서 짧은 리포트나 멘트로 ‘처리’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그간 2
한대웅 작가(56)는 한때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역량을 굳게 믿었다. 구성원들이 협의하고 짐을 나누면 공동의 이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과 국가 등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의 신념을 배신했다. 함께 꿈꾸던 친구들마저 ‘공유지의 비극’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원을 공동으로 소유·사용하면 집단적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이른바 ‘선의야말로 지옥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그 모델 말이다.그런데 지난 1~2년 사이 한 작가는 세상에 대한 예전의 낙관주의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제 간판 주문하려고 해요.” 이가희 여성청소년건강지원단 ‘나는봄’ 활동가(41)가 멋쩍게 웃었다. 9월18일 무료 진료소 나는봄이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도보 5분 거리에 문을 열었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갈 수 없는” 여성 청소년이 진료 대상이다. 아직 진료소 간판은 물론 공식 연락처도 없다. 당분간 문의는 사회복지사인 이가희 활동가 개인 전화번호로 받는다. 진료 준비 외 모든 게 완전히 갖춰지지는 않았지만 일단 진료를 시작했다.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어서 마음이 급했다.나는봄은 원래 서울시가 2013년 성매매·성폭력·
‘금사과’ ‘금배추’ 등 농산물 가격 폭등으로 사회적 논란이 일 때면 호출되는 사람이 있다. 백혜숙 ‘지속가능 국민밥상 포럼’ 대표(58)다. 백 대표는 가락시장 경매제도의 문제점과 농산물 유통 문제를 공론화한 인물이다. 경매제도는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 시스템을 만들자는 취지로 40년 전에 도입됐지만, 점차 부작용이 심각해졌다. 가격변동이 심해 농민과 소비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대신 수수료를 받는 가락시장 내 도매시장 법인만 살찌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쿠팡 같은 온라인 직거래 시장이 커졌다고 하지만, 가락시장은 여전히 연간 거래금액이
진부한 표현이지만 ‘천재’라는 말만큼 피차몬 여판통(36)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 위원장의 유년을 잘 설명하는 수식어도 드물다. 열세 살에 타이 명문 탐마삿 대학에 들어갔다. 4년 뒤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국제관계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이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1년씩 공부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대학(UNSW)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스물여섯 살이었다. 2022년부터 유엔에서 일하고 있다. 재능을 공공선 구현에 쓰기 위해서다.여판통 위원장이 속한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은 2011년 설립
7월7일 경북 구미시 한 공사장에서 23세 베트남 노동자가 온열질환으로 사망했다. 기자는 사망한 베트남 노동자 A씨에 관해 수소문하다 우연히 임소현씨(39)를 만났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인 임씨는 A씨의 친척과 직접 연락하고 지내는 거의 유일한 이였다. 사건 발생 초기 A씨의 국제 운구 절차를 대신 알아봐주기도 했다. 임씨는 사망한 A씨뿐 아니라 다른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일에도 관여해서 돕고 있었다. 당시 임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의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울렸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은 베트남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니.” 돌아보니 오래 품고 살아온 말이었다. 힘들어도, 고민이 있어도 안 됐다. 늘 착하고, 잘해야 했다. ‘중증 발달장애를 가진 여동생을 둔 언니’로서 부모님을 위해, 동생을 위해 이은아씨(36)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김신영씨(32)는 어린 시절부터 완벽한 아이여야 했다. 자폐 스펙트럼 중증 장애를 가진 동생을 돌보는 엄마와 아빠를 돕고, 동생 몫까지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마음의 규칙이 있었다. 집을 넘어 직장까지 따라 나온 완벽주의는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갉아먹는 습관이 되었다. 작은 업무
개나 고양이는 사람보다 작다. 몸 크기가 사람의 20분의 1 혹은 10분의 1에 불과하다. 동물 사체를 들여다보는 부검대도 그만큼 작다. 양팔 너비도 채 되지 않는다. 이 작고 차가운 테이블 위로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댄다. 서울시보건환경연구원 동물위생시험소 동물질병진단팀에서 수의법의 검사를 담당하는 이현호(49)·유지숙(46)·이현경(33) 주무관(사진 왼쪽부터)이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죽은 사람이 부검대에 오르듯 의문사한 동물도 부검대에 오른다. 죽은 사람을 위한 학문이 법의학이라면 죽은 동물을 위한 학문은 수의법의학이다.이들이
TV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송지연 언론노조 TBS 지부장(47)이 ‘콜록’ 하고 기침을 했다. 오래 쓰이지 않아 먼지가 쌓였다. 높은 층고 아래로 프롬프터며 LCD 모니터와 같은 방송 장비가 그대로 있었다. 한때 〈정준희의 해시태그〉 등 인기 프로그램을 촬영하던 곳이다. “기계도 안 쓰면 망가지잖아요. 이거야말로 세금 낭비 아닌가요?” ‘혈세 낭비’는 오세훈 서울시가 TBS 예산 지원을 끊으며 내세웠던 말이다. 8월5일 송지연 지부장이 “놀고 있는” 스튜디오를 소개해주다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ON AIR’ 표시에 불이 켜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에 있는 아트팩토리에서 미술작가 박들씨(41)의 개인전 〈내 섬의 집〉이 열린다(8월31일까지). ‘박들’은 작가의 활동명이다. 20대에 수원 지역 환경운동단체에서 회원으로 미술교실 등에 참여하며 붙은 이름이다. 자연(들)을 담은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목판화와 염색 천 콜라주로 제주의 풍경을 담은 작품 38개를 전시한다.홍익대 판화과를 다니던 시절, 다큐 사진 수업을 듣던 박씨는 평택시 대추리에 갔다.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큰 갈등을 겪던 곳이다. 그곳에서 평화운동, 미술운동 하는 이들을 만
7월24일,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가 공개한 영상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었다. 영상에는 스리랑카 출신 한 외국인노동자가 벽돌 화물 더미에 비닐 래핑으로 결박된 채 지게차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전남 나주의 한 공장에서 지게차 운전자는 화물을 들어올리며 피해자를 괴롭혔고, 동료들은 웃으며 이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영상이 공개되자마자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페이스북을 통해 진상규명을 지시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영상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와 괴롭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교회에는 언제나 여성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내려온 예수의 몸을 받아안은 이들도 여성이었다. 하지만 종파를 막론하고 여성 성직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천주교는 여성의 사제 서품을 허용하지 않는다. 개신교에서도 목사 안수를 받은 여성은 흔치 않다. 최소영 목사는 그 흔치 않은 길을 걸어왔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량을 키우고, 성폭력에 맞서고, 교회의 자성을 외쳐왔다.스무 살, 고민 끝에 신학교 진학을 선택했다. 원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법을 배워서 힘없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가지 않은 길이지만 방법이 달라졌을 뿐,
깃발이 차가운 공기를 가른다. 응원봉은 새카만 밤을 밝힌다. 누군가는 플루트로 혁명의 노래를 연주하고, 누군가는 열 번째 멜로디언을 분다. 그 사이를 분주히 헤치고 다니는 몇몇 사람들. 가슴팍에 ‘민주주의 기록단’이라는 명찰을 단 채 불쑥 내민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증받습니다.’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54)과 동료들은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시민들이 윤석열 탄핵 집회에 가져온 ‘시위 용품’을 모집했다. “1월부터 이 명함을 들고 나가기 시작했어요.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증받습니다. 시위 용품을 기증
부산에서 태어나 100일 만에 광주로 이사왔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83년, ‘고교야구 광팬’이던 큰누나의 ‘강권’으로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에 가입했다. 연회비 5000원을 내고 빨간색 야구 모자와 점퍼, 사인볼, 라디오를 받았다. 그해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1년 광주에 자동차 공장이 있는 현대기아차그룹이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해 ‘기아 타이거즈’가 되었을 때, 그는 타이거즈 팬으로 기꺼이 남기로 했다.황승식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52)는 유명한 야구광이다. 그리고 역학자다. 역학이란 질병의 원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전쟁은 언제나 곁에 있다. 죽고 죽이는 일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완벽한 평화는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무기 박람회에 전시된 장갑차 위로 뛰어올라 바이올린을 켰다. 시민단체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로, 활동 목표는 단체 이름과 같다.전쟁없는세상은 2003년 5월15일 세계 병역거부의 날에 맞춰 창립했다. 햇수로는 20년도 넘었다. 처음에는 전쟁에 동참하기를 반대하는 병역 거부자를 후원하는 활동으로 시작했지만, 단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