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를 미리 읽는 후각 하나는 정동영이 최고다.”

‘정동영계’에서 나오는 자화자찬이 아니다. 오랫동안 정동영 최고위원과 대립각을 세웠던 친노 진영의 좌장급 인사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내린 평가이다. 정 최고위원이 보여준 ‘중도실용’(열린우리당 당의장 시절)에서 ‘담대한 진보’(2010년 민주당 전당대회)로의 급격한 좌회전을 폄하하다가 나온 평가이기는 했다. 그러나 맥락이야 어쨌든 ‘후각’이라는 단어는 기자의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연평도 포격’이라는 시계 제로 정국에서 여야 모두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참여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 최고위원이 햇볕정책 수호자를 자처했다. “햇볕정책은 민주당의 정체성이다”라며 강하게 배수진을 쳤다. 반(反)북한 정서가 고조되는 시점에 정치인으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다. 정적조차 인정하는 그의 ‘후각’이 작동한 것일까,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 옳다고 믿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 정동영 최고위원을 12월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시사IN 백승기
위키리크스가 우리 외교관의 북한·중국 관련 발언을 폭로했다. 천영우 외교안보 수석은 외통부 차관 시절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는데. 자기 희망 사항을 많이 섞은 거 아닌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현 외교안보 수석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대통령이 그런 식의 보좌를 받는다는 얘기 아니냐. 예의 문제를 떠나서, 완전한 오판이다. 당장 내보내야 한다고 본다.

어떤 점을 오판이라고 보는 건가. 발언 시점이 올해 2월이더라. 작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중국에서 내부 논쟁이 진행된 건 맞다. 하지만 후진타오 주석이 직접 이끄는 중국 공산당 중앙외사영도소조(중국 내 최고 외교정책 결정기구)에서 7월 말에 입장을 정리한다. 북한을 안정화시켜라, 조·중 관계를 안정화시켜라 하는 게 핵심 결론이다. 중국 내에서도 북한 포기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북 정책의 핵심은 아니었다. 이걸 헛짚은 사람이 지금 외교안보 수석이라는 얘기이다. 이 판단이 한·미 양쪽의 정책 판단에 근거 자료로 활용됐을 것 아니냐. 끔찍한 일이다.

지난해 4월 중국이 중국·미국·북한 3자회담을 남한 몰래 미국에 제안한 내용도 폭로되었다.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이 우리 손을 떠났다는 얘기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한·중 정상회담을 하면 항상 조율된 합의문이 나왔다. 그러나 이 정부에서는 조율된 합의문이 한 번도 못 나왔다. 다 따로따로다. 남북관계가 통해야 한·중 관계가 통한다는 건 대전제다. 3년간 남북관계를 차단해 파탄이 났는데, 한·중 관계가 원활할 리 없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을 얼마나 절실하게 생각하나. 북한은 개성공단이 닫힐까봐 전전긍긍한다. 개성공단이야말로 햇볕정책의 가장 발전된 형태이다. 북쪽에는 개성공단같이 현대화된 공단이 없다. 일종의 모델하우스 같은 거다. 개성공단 문제라면 북한은 협조한다. 우리가 막는 거지. 지금 이 정부는 총력 봉쇄했으면 하는 생각인데 개성공단 하나 남아 있는 게 눈엣가시인 거다. 

개성공단이 우리에게 주는 효용은 뭔가. 개성공단은 경제사업 이전에 안보 전략사업이다. 개성공단 자리를 만들려고 북한 장사정포가 10㎞ 이상 뒤로 빠졌다. 이 차이는 서울이 장사정포 사정권 안에 드느냐, 밖에 있느냐를 가른다.

ⓒ뉴시스정동영 최고위원은 “북한은 개성공단(위)이 닫힐까봐 전전긍긍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기본 전제는 ‘조금만 더 봉쇄하면 붕괴한다’처럼 보인다. 중요한 건 전략이다. 북은 생존이라는 자기들 목표가 있고,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설정한 전략이 있다. 미국으로부터 인정과 존중을 받고 체제 보장을 받아야겠다는 것이다. 우라늄 시설을 공개하고, 연평도 포격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카드 두 장을 쓴 거다. 반면 우리 정부의 목표는 붕괴론 아닌가. 그런데 목표를 뒷받침할 전략이 있나? 이번에 폭로된 외교 문건을 보면 “김정일 위원장이 2015년에는 살아 있지 않을 거다. 사후 몇 년 안에 북한이 무너질 거다. 중국은 포기할 거다”라는 식이다. 근거는 없고 희망 사항만 있다. 이런 정부가 어디 있나. 이 정부 사람들은 상식 범위를 벗어났다. 그 결과 금강산에서, 천안함에서 그리고 연평도에서 우리 국민이 60명 넘게 사망했다. 남북 문제에 대한 내 전략은 개성공단이다. 개성공단을 열 개, 스무 개 만들자. 그 과정에서 평화를 제도화하고 핵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봉쇄하면 붕괴한다’라는 기대는 부시 정부와도 닮았다.

한국판 네오콘 정부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군사적 행동이다. 그런데 자식 군대 보낸 부모치고 전쟁을 해서라도 북을 응징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두 번째는 3년 동안 해온 봉쇄를 더 조이는 건데, 정책 수단이 사실상 소진되고 없다. 마지막 남은 개성공단을 없애자? 북한뿐만 아니라 우리 기업인도 죽이자는 거다. 개성공단에만 공장이 121개 있고, 협력업체를 포함한 관련 업체가 6000곳이다. 실업자 수만명이 쏟아진다. 더욱이 북한 붕괴를 원하지 않는 중국이라는 뒷마당이 열려 있다. 앞에서 조여봐야 실효가 없다. 결국 남는 건 대화를 통한 평화 관리다. 정부는 햇볕정책 탓만 한다. 사실은 햇볕정책 포기하고 3년간 봉쇄한 결과 이런 상황이 된 거다. 오바마 정부는 출범 때까지만 해도 부시 정부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 2년 동안 미국은 한반도 관리에 실패했다. 단적으로, 북한의 핵능력이 늘어났다. 오바마 정부의 전반기 2년은 클린턴 때보다 오히려 부시 정부 1기와 비슷하다. 국내 정치에 매몰되기도 했지만, 대북 강경책을 편 일본과 한국 노선에 편승한 탓이다. 반(反)북한 여론이 높다. 부담스럽지 않나? 이럴 때 정치인의 이성이 중요한 거다. 국민이 이성적 판단과 대응을 할 수 있으려면, 정치인이 흥분하면 안 된다. 중국의 6자 회동 제안도 그렇게 단칼에 거절할 일이 아니었다. 대화를 통한 평화 관리 능력을 보여줘야 했고, 최소한 신중하게 고려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속도 조절론이 나온다. 자기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이고, 또 왜 이런 사태가 빚어지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닌가. 김대중 정부에서는 2000년 북·미 공동 코뮤니케를 후방 지원했다. 북·미 간 적대 해소와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합의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북에 현존하는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한다는 6자회담 공동성명이었다. 그런데 2010년 연평도는 뭐냐. 햇볕정책을 한 정부와 하지 않은 정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런데 그걸 햇볕정책 책임이라고 우기니까 주눅이나 들고. 이 신념을 포기하는 순간 민주당의 길을 포기하는 거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온 10·4 선언을 보면 서해에 공동 어로구역과 평화 수역을 설정한다고 되어 있다. 현재도 유효한가? 그렇게 돌아가야 한다. 공동 어로구역이라는 건 고기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꽃게가 북쪽, 조개가 남쪽에 있다든지 하면 왔다 갔다 하면서 같이 잡아서 나누는 식으로 공존하자는 거다. 북쪽 땅인 개성공단에 우리가 출퇴근하면서 공장 돌리니까 긴장이 내려가지 않느냐. 총 쏘는 일도 없고. 그 모델로 가야 한다. 바다에도 개성공단을 만들자.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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