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이 한국에 제기한 ISDS(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에서, 한국(정부)이 엘리엇에 5358만여 달러(약 690억원)를 지급하라는 국제중재 판정이 나왔다.
엘리엇은 지난 2018년 7월, 한국에 7억7000만여 달러(약 9917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ISDS를 신청한 바 있다. ‘한국 국가’가 한미 FTA로 규정된 ‘미국 투자자에 대한 보호 의무’를 위반하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었으니, 이를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양측은, 한국이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지, 그래야 한다면 어느 정도 액수를 배상해야 하는지 등을 따지는 ‘중재’ 절차의 진행을 PCA라는 국제기구에 맡겼다. PCA 중재판정부는 6월20일, 한국이 ‘5358만6931달러(청구 금액의 7%) 및 지연이자를 엘리엇에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엘리엇 ISDS의 기원 :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한국 대 엘리엇’ ISDS는 지난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의 주주총회(제일모직과 합병 여부를 결정)에서 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이하 연금공단)의 찬성 표결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당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1 대 0.35’의 합병비율로 하나의 회사가 될 예정이었다. 이 합병비율에 따르면, 제일모직 주주는 자신의 1주를 신생 합병회사(현 삼성물산)의 1주와 교환할 수 있지만, 삼성물산 1주로는 합병회사의 0.35주밖에 받지 못한다. 제일모직의 기업가치를 삼성물산 기업가치의 약 3배로 평가한 것이다.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으므로, 이 합병비율은 자본시장법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다.
이로 인해 삼성물산 주주들의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엘리엇이 돌연 이 회사의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다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2015년 6월4일). 이후 주총일인 2015년 7월17일까지 삼성과 엘리엇은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주주들을 대상으로 치열한 위임장 대결을 펼쳤다.
엘리엇의 입장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주주는,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인 연금공단(9.92%)이었다. 연금공단은 삼성 측(정확하게는 삼성 창립자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주총에서 삼성 측은 참석 주주의 69.53%를 얻어 합병을 가결시켰다. 엘리엇은 국민연금공단의 찬성 표결에 시비를 걸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을 받은 대가로 합병을 도왔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쳐 국민연금공단 수뇌부를 압박한 결과로 합병이 성사되어 엘리엇에 엄청난 투자 손실을 입혔으며, 이는 한국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한국(박 전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같은 개인이 아니라)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8년 11월 국제중재가 PCA를 통해 개시된 이후, 한국과 엘리엇은 여러 차례 서면과 반박서면을 제출하며 공방을 벌였다. 엘리엇 측은 서면에서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비율부터 엉터리였고, 연금공단은 박근혜 개인과 삼성 창립자 가족의 사적 이익을 위해 합병을 찬성했다고 주장했다. 즉, 연금공단의 찬성 표결엔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같은 공익적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의미다. 더욱이 연금공단이 내부적으로 ‘합병 찬성’을 결정하는 절차 역시 철저히 불법적이었으며 대통령의 압력과 합병 찬성을 유도하기 위해 꾸민 서류에 지배되었다고 썼다. 이같은 한국의 “상당히 터무니없고 충격적인 짓”으로 인해 엘리엇은 한미 FTA로 금지된 ‘국제적 관점에서 외국인 투자자에게 용인되지 않는 부당한 대우’를 감당하면서 한국 돈으로 1조원에 가까운 손실을 보았다고 했다.
한국의 입장
이에 대해 한국 측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설사 비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것은 해당 개인들의 행위지 ‘한국이라는 국가의 조치’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한국의 조치’가 아니라면 엘리엇은 한국에 손해배상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더욱이 엘리엇은 기업이나 국가(국채)에 투자하면 그 대상이 망하든 말든 악랄한 방법으로 초과수익을 올려온 것으로 유명한 사모펀드다. 국가 경제의 장기적 미래를 고려해야 하는 한국 정부는 엘리엇 같은 사모펀드가 한국 경제의 중추 중 하나인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을까? 그래서 한국 측 서면은 박근혜 등 당시 한국 정부 인사들의 행위가 부적절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공익적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즉, ‘상당히 터무니없고 충격적인 짓’이 아니었으므로 ‘국제적 관점에서 외국인 투자자에게 용인되지 않는 부당한 대우’로 간주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미국이 자국의 테크 기업들에 대한 중국의 투자를 규제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또한 한국 측은 대통령-보건복지부 장관-연금공단 수뇌부 등의 압력이 연금공단 투자위원회의 합병 찬성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당시 회의록 등의 자료를 통해 주장했다. 예컨대 연금공단은 삼성물산뿐 아니라 삼성그룹 17개 계열사의 대주주였다. 만약 합병이 성사되지 않는 경우 여러 계열사들의 주가 폭락으로 연금공단 역시 큰 재정적 손해를 볼 수 있었다.
물론 합병비율이 엘리엇의 말대로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엉터리라면, 이런 엉터리를 지지한 연금공단의 결정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측 서면은 이 합병비율이 자본시장법에 합치하는 것이며, 당시의 기업가치평가 기관들 역시 다양한 합병비율을 제시했던 사례를 서면에 썼다. 기업가치 평가는 기관과 기준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엘리엇의 삼성물산에 대한 가치 평가 역시 다양한 평가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 지급액은 1000억원을 웃돌 것
‘한국 대 엘리엇’ ISDS는 3년10개월 만에 마무리되었다. 법무부에 따르면, 한국은 5358만여 달러의 손해배상금과 함께 이 금액에 대한 지연이자(2015년 7월16일부터 판정일 사이)를 복리로 내야 한다. 또한 엘리엇이 이번 ISDS를 진행하기 위해 지출한 법률비용 2890만 달러(약 372억5000만원)를 엘리엇에 지급해야 한다. 엘리엇 역시 한국 정부의 법률비용을 내야 하지만 345만 달러(약 44억5000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한국 정부가 이번 ISDS로 지출해야 하는 돈은 1000억원을 훨씬 웃돌 전망이다.
중재판정부가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의 7%를 손해배상금으로 인정한 이유는, 엘리엇이 주장하는 손해 가운데 한국 정부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6월21일 현재, 판정문이 배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한 국제중재의 두 당사자인데, 엘리엇의 법률비용(372억5000만원)이 어떻게 한국의 8배(44억5000만원)에 달하며, 중재판정부는 왜 한국에 그 돈을 모두 지급하라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시사IN〉은 판정문을 입수한 직후, 구체적 내용을 다시 보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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