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내리는 오후.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벤치에 누운 여자. 다가와 말을 거는 경찰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일어나 별안간 가방 속 물건을 꺼내 내던진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관객은 여자의 내레이션이 시작된 뒤에야 상황을 파악한다.
“생리가 시작되기 전부터 불안해지거나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리는 일은 흔하지만 그 증상이 심하면 월경전증후군, PMS라고 진단받는다. 내 경우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갑자기 분노가 치밀고 공격적이 된다. 25일에서 30일에 한 번, 생리 2~3일 전, 난 짜증이 나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짜증이 나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신입사원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기는 회사도 매한가지. 입사 두 달 만에 실직자가 되고 알바를 전전하다 간신히 새 직장을 구했다. 아이들을 위해 현미경이나 천체망원경 공작 키트를 만드는 작은 회사 ‘구리타 과학’. 더 많은 성과를 내는 것보다 늘 같은 일과를 지켜내는 게 더 중요한 사장님과 직원들. 후지사와(가미시라이시 모네)의 PMS도 이곳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월례 행사일 뿐이다.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그를 다 함께 잘 견뎌준다.
새로 들어온 직원 야마조에(마쓰무라 호쿠토)만 이 사정을 모른다. 갑자기 폭발해버린 후지사와를 처음 겪고 당황한다. 그러다 곧 알게 된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후지사와라는 걸. 공황장애로 하루아침에 모든 일상을 잃고 도망치듯 이 회사로 숨어든 자신에게 또다시 발작이 찾아왔을 때, 그 다급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줄 동료가 바로 그녀라는 걸.
공황장애 남자와 월경전증후군 여자. “내 몸인데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 마음조차 제어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그렇게 차츰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이야기. 소설 〈새벽의 모든〉의 이 흥미로운 설정이 영화 〈새벽의 모든〉에서 한층 더 근사한 관계로 각색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 두 영화로 단숨에 나의 ‘최애 일본 영화감독’이 된 미야케 쇼는, 모든 문제를 “연애로 해결하는 이야기가 아니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사는 것이 괴롭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진 않다”라고 말하는 “한 쌍의 유니크한 남녀“가 “연애가 아닌 방법으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원작엔 없는 정말 아름다운 클라이맥스를 두 사람에게 선물했다.
“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구 밖 세계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밤이 찾아와줘서 우리는 어둠 너머 무한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어둠 속, 후지사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밤이 와야만 별이 보이는 거라고, 이 캄캄한 어둠 덕분에 기필코 우리의 세계가 더 넓어질 거라고, 야마조에의 어깨를, 또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어둠 속으로 들어갈 차례다. 불 꺼진 극장 안에서 〈새벽의 모든〉 이야기를 맞이할 때다. 생의 밤길을 휘청이며 걷는 모든 이들이 이 영화로 조금 든든해질 것이다. 그들의 ‘연애’가 아닌 그들의 ‘연대’를, 참 많이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계속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아 다행이다’ 혼자 속삭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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