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역협회는 2월13일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을 차기 무역협회장으로 추천했다. ⓒ연합뉴스
한국무역협회는 2월13일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을 차기 무역협회장으로 추천했다. ⓒ연합뉴스

한 민간 경제단체 회장 직에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원회 출신 인사가 선임됐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정부가 영향력을 가진 민간기업 수장 후보로 이름을 올려오다가 경제단체장으로 선회해 낙점됐다. 인수위 또는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 캠프 출신 인사들이 공공기관장, 단체장 직에 오른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임자 임기 종료에 맞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대선 공신들에 대한 보은성 인사가 반복되어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공공기관 사장 약 150명이 임기 만료에 따라 교체된다. 이 가운데 절반은 교체 시점이 오는 4월 총선과 맞물려 있다. 일부 기관은 이미 공석이거나 사장 임기가 총선 전에 끝나지만 인선 작업을 4월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관가에선 여당 경선이나 총선에서 낙선한 유력 인사 등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우려한다.

2월13일 국내 경제 5단체 중 하나인 한국무역협회 임시 회장단 회의에서 협회장 구자열 LS그룹 이사회 의장이 연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구 의장은 2021년 무역협회 회장에 올랐다. 구 의장은 “LS그룹이 투자를 확대하는 시기에 이사회 의장 역할에 집중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협회장에 전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밝혔다.

무역협회 안팎에선 뜻밖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구자열 의장은 최근까지 재계 활동 보폭을 넓히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말 한일경제인협회 차기 회장에 내정됐고, 올해 1월에는 한국·아랍소사이어티 이사회 이사장을 연임했다. 무역협회 회장 연임 의사도 주변에 밝혀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구자열 의장 재추대가 예상됐던 올해 1월 중순 열린 무역협회 회장단 신년회에서는 연임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다음 회의(2월13일)로 미뤄졌다. 이후 무역협회는 구자열 의장 후임으로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선임했다.

보은성 인사라는 비판이 곧바로 나왔다. 윤진식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과 정책실장을 거쳐 제18·19대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을 지냈다. 2022년 3월, 공직을 떠난 지 10년여 만에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원회 특별고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정통 관료 출신인 윤진식 전 장관은 주로 금융·조세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공직 생활을 재무부에서 시작했다. 2002년 재정경제부 차관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관세청장과 세무대학 학장 등을 거쳤다. 무역협회 활동과 관련 있는 산업자원부 장관(2003년) 자리는 약 10개월간 맡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경제수석을 끝으로 특별한 경제 분야 이력이 없다. 무역협회 안팎에선 3년 임기 중 80세에 접어드는 윤 전 장관(현재 78세)이 협회 소속 회원사들이 요구하는 대외 활동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 섞인 지적도 나온다.

윤진식 전 장관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KT와 포스코 차기 회장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두 기업 모두 민영화가 이뤄진 지 20년이 넘었지만 대선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공행상이 이뤄지는 대표적인 자리로 통해온 곳이다. 윤 전 장관은 KT와 포스코 회장 낙선 이후 생명보험협회와 무역협회 회장 하마평에도 계속해서 올랐다. 재계와 관가 일각에선 분야 관계없이 이곳저곳에 수장 후보로 이름을 올려온 건, 전문성과 관련 없는 인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연봉 6억원과 관용차 받는 무역협회장

윤 전 장관이 회장을 맡으면서 무역협회는 다시 관료 수장 시대로 돌아갔다. 무역협회는 1991년부터 15년간 기업인이 이끌었지만 이후 다시 15년 동안은 한덕수 당시 전 미국 대사(현 국무총리) 등 관료 출신이 회장을 맡았다. 2021년 구자열 LS그룹 이사회 의장이 무역협회 회장에 선임되면서 국내 경제단체 모두 민간기업인 회장이 주도하게 됐지만 불과 3년 만에 과거로 회귀했다. 무역협회는 “윤 전 장관은 무역과 통상 현안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경제와 금융정책을 두루 다뤄본 분이다. 폭넓은 국내외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급변하는 통상 환경과 공급망 재편, 각종 규제 해소 등 한국 무역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적임자여서 추천됐다”라고 밝혔다.

무역협회 회장은 상여 등을 포함한 연봉 약 6억원과 관용차를 지급받는다. 퇴직금은 월 급여의 8배다. 그동안 기업인 회장들은 비상근일 경우 연봉을 받지 않는다는 협회 규정에 따라 무보수로 일했다. 전임 구자열 의장도 무역협회 회장 임기 중 보수를 받지 않고 관용차도 쓰지 않았다. 반면 대부분의 관료 출신 무역협회 회장들은 연봉·상여·관용차를 받았다. 다른 주요 경제단체인 한국경제인협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무보수 명예직이다. 관용차도 제공되지 않는다.

김동철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2023년 10월19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김동철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2023년 10월19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의 보은성 인사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창립 62년 만에 처음으로 정치인 출신 수장을 맞이한 한국전력공사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9월 선임된 김동철 사장은 광주 광산구에서 4선(제17~20대)을 지낸 국회의원 출신이다. 에너지 분야 관련 이력은 의원 시절 2년2개월간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산자위) 활동이 유일하다. 김 사장은 지난 대선 때 윤석열 후보 캠프에서 경제정책 상임고문,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원회에서 국민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김동철 사장은 과거 산자위 시절 공기업 낙하산 인사를 여러 차례 공개 비판한 적이 있다. 19대 국회 속기록을 보면 김동철 사장은 2014년 2월 임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업무를 모르는 정치인 공공기관장은) 출근시키지 말고 그냥 봉급만 줘라. 차라리 부작용이라도 없다. 일 잘하면 정권과 관계없이 몇 번이든 연임시켜주면 그게 공기업 개혁이다. 청와대에서 낙점 다 해놓고 무슨 놈의 공기업 개혁을 이야기하나.” 김 사장의 과거 발언들은 사장 선임 직후인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도마 위에 올랐다.

인천공항공사는 지난해 6월 이학재 전 의원을 사장으로 선임했다. 이 사장은 국민의힘 전신인 새누리당과 한나라당 소속으로 제18~2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공항공사 관리·운영 관련 경력은 없다. 제21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윤석열 대선후보 캠프 정무특보를 맡았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인천시장 후보로 나섰다가 경선에서 탈락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KAI) 수장도 보은성 인사 논란을 겪었다. KAI는 2022년 9월 강구영 전 공군참모차장을 사장으로 선임했다. 강 사장은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 캠프의 안보 분야 주축인 ‘국민과 함께하는 국방포럼’에서 위원장을 맡았다. 윤석열 캠프 예비역 장성들의 좌장으로 통한 김용현 현 경호처장이 이 포럼의 공동위원장이었다. 강 사장은 취임 직후 임원 19명을 해고하고, 실장·팀장 등 중간 간부 60여 명을 보직 해임했다. 빈자리 일부에는 강 사장 측근으로 통하는 공군 등 군 출신 인사가 영입됐다.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KAI)는 2022년 9월 강구영 전 공군참모차장을 사장으로 선임했다.ⓒ연합뉴스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KAI)는 2022년 9월 강구영 전 공군참모차장을 사장으로 선임했다.ⓒ연합뉴스

KAI는 최근 내부 직원 문제로 논란이 불거졌다. 진주고용노동지청은 공군 예비역 장성 출신 간부의 갑질 의혹과 관련해 조사에 나섰다. 이라크 출장 중 한 식당에서 직원이 술잔에 물을 채웠다는 이유로 술잔을 던지고, 퇴근 후 무전기를 이용해 사적 심부름을 시켰다는 의혹 등이다. 비슷한 시기 인도네시아 출신 직원이 자료를 유출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이 직원이 유출한 USB에서 미국 정부의 수출 승인 관련 문건 등 49종이 발견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 한국가스공사(최연혜 사장), 한국도로공사(함진규 사장), 한국수자원공사(윤석대 사장) 수장들도 보은성 인사 논란이 불거졌다. 최연혜 한국가스공사 사장은 제20대 국회 새누리당 국회의원, 한국철도공사 사장, 한국철도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에너지 분야 관련 활동은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 정책 저지, 독일의 에너지 전환 정책 문제점을 분석한 책 〈대한민국 블랙아웃(부제:독일의 경고-탈원전의 재앙)〉을 펴낸 것 외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선에서 윤석열 캠프 탈원전대책 및 신재생에너지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나눠 먹기 안 된다” 했던 윤 대통령

함진규 한국도로공사 사장은 새누리당 소속 제19·20대 국회의원으로, 윤석열 캠프에서 수도권대책본부장 등을 맡았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활동 외 도로공사 관련 경력은 없다. 윤석대 한국수자원공사 사장은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을 지냈다. 대선 과정에서 윤석열 캠프 비서실 정책위원을 맡았다. 수자원공사와 연관된 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 밖에 공공기업의 자회사 사장과 이사·감사 등으로 범위를 넓히면 대선 후 직책에 오른 윤석열 캠프, 인수위 출신 인사들은 더 늘어난다. 보은성 인사 논란이 불거진 기관, 기업 관계자들은 “정해진 인사 절차에 따라 선임됐다”라고 밝혔다.

〈시사IN〉이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알리오)’을 분석한 결과, 올해 공공기관 346곳 가운데 150여 곳의 기관장이 교체된다. 기관장 임기가 이미 만료됐지만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은 곳이 있어서 이를 포함하면 새로 선임될 기관장은 더 늘어난다.

사장 임기 만료를 앞둔 공공기관들은 이사회를 열고 임원추천위원회 구성 논의 등에 착수했지만 일부 기관은 인선 작업을 미루고 있다. 오는 4월10일 국회의원 총선거가 그 배경으로 지목된다. 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경선에서 탈락 또는 험지에 출마해 낙선하는 등 ‘희생’한 여권 인사들이 대거 낙하산을 타고 내려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오는 4월 말까지 임기가 만료되는 공공기관은 68곳이다. 특히 한국전력공사의 5개 자회사 한국남동·동서·서부·남부·중부발전 등 5곳은 4월25일 사장 임기가 일제히 만료된다. 이 회사들에선 이미 총선 이후 내부 승진과 낙하산 인사 가능성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공공기관 및 지분 보유 등으로 정부 영향력이 있는 민간기업과 단체에 대한 보은성·낙하산 인사는 역대 정부에서도 제기되어온 문제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전 정부의 공공기관 인사를 ‘낙하산’으로 규정하며 “캠프 인사 안 시킨다(2021년 10월)”라고 밝혔다. 2022년 3월에는 “최고의 경륜과 실력 있는 사람으로 모셔야지 나눠 먹기식으로 해서는 국민통합이 안 된다”라며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를 원천 차단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기자명 문상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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