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위치한 KT광화문빌딩 EAST.ⓒ시사IN 신선영

임기 만료를 앞둔 대표이사의 연임은 기정사실이었다. 그가 대표로 있는 동안 회사의 매출·영업이익·주가 모두 신기록을 썼다. 업계·시장·언론·회사 다수 노동조합 어느 곳도 연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안정과 성장에 방점이 찍힌 회사의 청사진이 대표이사를 중심으로 그려졌다. 증권사들은 긍정적 전망을 담아 보고서를 쏟아냈다. ‘모두’의 예상대로 회사는 그를 차기 대표이사 후보로 선정하며 연임을 공식화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이사 후보 지명이 철회됐다. 선정 절차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대표이사가 후보자로 재선정됐지만 그는 자진 사퇴했다. 빈자리에 후보자 34명이 난립했다. 정치권과 회사 전현직 관계자 등이 경쟁을 벌였다. 새롭게 선정된 최종 후보자도 사의를 밝혔다. 대표이사 후보가 세 번이나 확정됐다가 백지화됐고, 이에 따라 회사는 사상 초유의 경영 공백 위기에 빠졌다.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3개월 사이, 국내 재계 서열 12위 KT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난해 12월8일, KT 이사회는 대표이사 후보 심사위원회를 소집했다. 위원회 소집은 KT를 이끌어갈 차기 수장을 뽑기 위한 절차다. 구현모 KT 대표의 임기(3년)가 정기 주주총회 개최일인 3월31일에 끝난다. KT 정관에 따르면, 대표이사를 새로 선정해야 할 경우 주총 3개월 전까지 후보자를 결정해야 한다.

구 대표는 앞서 열린 이사회에서 연임 의사를 밝혔다(2022년 11월9일). 이사회는 이후 그를 단독 후보자로 선정(우선 심사 대상자)했고, 대표이사 후보 심사위원회를 열어 구 대표의 연임 표명 이유와 사업계획, 구체적인 실천 방안 등을 들어본 뒤 연임 적격 여부를 최종 판단하기로 했다. 위원회 심사에서 구 대표가 차기 대표이사로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이사회는 다른 후보를 고려하지 않고 그를 최종 후보자로 결정해 주주총회 결의에 부칠 계획이었다.

구현모 대표의 연임은 KT 안팎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증권가도, 조합원이 1만6000명인 회사 다수 노동조합(전체 임직원 2만1000여 명)도 그의 연임을 환영했다. 구 대표 임기 동안 KT가 받아든 경영 성적표가 근거였다.

구 대표는 2020년 3월 취임과 동시에 KT의 변화를 이끌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오래되고 정체된 통신 기업’에서 ‘디지털 플랫폼 기업(DIGICO·디지코)’으로 전환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임기 중 약 4조원을 투자해 AI(인공지능)·빅데이터·클라우드 등 이른바 ‘ABC 사업’을 KT 미래의 핵심으로 띄웠다. 구 대표가 제시한 비전 일부가 현실화되면서, 회사 안팎에선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는 인력 구조조정이나 자산매각이 아닌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통해 양적·질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비전 일부는 구체적 숫자로도 나타났다. 구현모 대표 취임 이후 KT 매출은 꾸준히 오르면서 연결 기준 2022년 25조원을 넘어섰다. 상장 이후 처음이다. 영업이익은 2020년 1조1841억원에서 2022년 1조6718억원으로 약 41% 올랐다. 회사 성장세에 주가도 화답했다. 구현모 대표 취임 당시(2020년 3월) 1만9000원대였던 주가는 2022년 8월1일 3만8350원까지 오르면서 시가총액이 9년 만에 10조원을 넘어섰다. 주주 보상도 매년 늘렸다. 구 대표 취임 전 1주당 1350원이던 KT 배당금은 2022년 1960원까지 올랐다.

대표이사 후보 심사위원회는 지난해 12월8일 열린 회의에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일부 이사들이 구현모 대표만 단독 후보로 두고 연임 여부를 결정하는 것보다는, 여러 후보들까지 포함해 후보자를 정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례적으로 나온 목소리였다. 2011년 만들어진 KT 지배구조위원회 운영규정(제7조)에 따르면, 현재의 대표이사가 연임 의사를 밝힌 경우 이사회는 외부 공모 없이 적격 여부를 먼저 판단하도록 돼 있다. 대표이사 후보자 선정 절차 중간에 ‘룰’을 어기고 경선을 하자는 의견이었던 것이다.

‘최대 수혜자’ 국민연금이 연임 제동

KT는 닷새 뒤인 지난해 12월13일, 대표이사 후보 심사위원회를 다시 열고 구현모 대표 면접을 한 차례 더 진행했다. 이후 이사회는 위원회 심사 결과를 공개하며 “구현모 대표의 ‘연임 적격’ 판단을 내렸다”면서도 동시에 “사내외 후보 공모 절차도 진행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원점으로 돌아가 경선을 치른 뒤 후보자를 최종 확정하겠다는 뜻이었다. 구 대표가 직접 요청했다는 이유였다. 구 대표는 이사회에 “주요 주주가 제기한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한 우려를 고려해 복수 후보 심사 가능성을 검토해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 대표가 언급한 ‘주요 주주’는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KT의 1대 주주다(지분 10.35% 보유). KT가 구현모 대표 연임 적격 여부 판단을 미룬 날인 지난해 12월8일,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취임 100일을 맞아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소유분산 기업의 회장 등을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고착화하고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는다거나, 대표이사나 회장 선임 및 연임 과정에서 현직자 우선 심사 같은 내부인 차별과 외부 인사 허용 문제를 두고 쟁점이 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구현모 KT 대표와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언급한 소유분산 기업은, 쉽게 말해 재벌기업과 달리 ‘주인(오너) 없는’ 회사를 말한다. 금융지주사와 포스코, 그리고 KT가 여기에 해당한다. 정보통신(ICT) 업계와 증권가에선 김태현 이사장의 발언을 두고 국민연금, 나아가 정부가 KT에 보내는 ‘시그널’로 해석했다.

KT 대표이사 후보자 선정 절차 착수에 앞서 금융지주사 BNK금융은 ‘아들 특혜 의혹’으로 김지완 전 회장이 중도 사임하는 과정에서 승계 규정을 바꿨다. 계열사 CEO 등 내부 승계로만 회장직을 선임할 수 있었던 규정을 외부 추천 인사까지 후보군에 포함할 수 있도록 했다. 금융 당국의 지적에 따른 조치였다. 이 때문에 낙하산 인사가 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농협금융은 일찌감치 윤석열 대선 캠프에 소속돼 있던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을 최고경영자(CEO)로 맞았다.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은 기자간담회에서 특정 회사를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소유분산 기업의 대표이사 선임 및 연임 문제를 지적했다. 그리고 그가 기자간담회를 연 날, 대표이사 선임·연임 절차가 진행 중인 곳은 KT가 유일했다. 국민연금이 구현모 대표 연임을 반대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국민연금이 구현모 대표 연임을 반대할 명분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것도 ‘시그널’ 해석에 힘을 실었다. 구 대표 체제 KT에서 상당한 투자수익을 낸 1대 주주 국민연금이, 정작 구 대표 연임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내놓은 모양새가 되어서다. 구 대표 취임 이후 KT 주가가 오르면서 국민연금이 보유한 KT 주식 가치도 꾸준히 늘었다. 2021년 1월 7319억원(11.68%)으로, 구 대표 취임 당시(2020년 3월)보다 지분율을 2%포인트가량 낮췄음에도 비슷한 가치를 유지했다. 1년 뒤인 2022년 1월에는 지분율을 1%포인트만 높이고도(12.68%) 보유 주식 가치가 조 단위를 넘어섰다(1조12억원). 국민연금은 2022년 1년 사이 2%포인트가량의 지분을 매각했는데(12.68→10.35%), 실현한 차익은 약 2000억원에 달한다. KT가 주주 배당을 늘리면서 국민연금은 매년 수백억 원대 배당수익도 냈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기자회견에서 KT 대표 선임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연합뉴스

KT가 대표이사 후보자 심사 결과와 경선 결정을 발표하기 하루 전인 지난해 12월12일, 공정거래위원회 공시점검과가 KT 계열사인 KT텔레캅 본사에 조사관을 보내 현장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보안업체인 이 회사가 시설관리 사업을 외주하는 과정에서, KT 임원 출신이 대표인 특정 업체에 유리한 거래를 했다는 등의 의혹을 받았다. 공정위 조사가 KT 본사 차원의 개입 여부로까지 확대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시그널’ 해석은 KT를 상대로 한 정부의 전방위적 압박과 경영 개입, 즉 ‘관치’가 시작됐다는 의심으로 번졌다. KT와 대표이사의 역사를 보면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KT는 공공기업으로 설립돼 2002년 민영기업이 됐다. 정부 산하기관으로 탄생했고,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통신사업을 핵심으로 해온 만큼 민영화 이후에도 준공영기업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표도 바뀌었다.

민영화 이후 일부 KT 수장들은 연임을 시도했으나 배임 혐의 등으로 구속돼 자리에서 물러났고(남중수 전 사장), 배임 의혹으로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사퇴(이석채 전 사장)했다. 남중수 전 사장은 대법원을 거쳐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형을 받았다. 이석채 전 사장은 파기환송심에서 배임 혐의 무죄판결이 확정됐다.

2002년부터 20여 년간 연임에 성공하고 6년 임기를 모두 채운 사람은 구현모 대표의 전임자, 황창규 전 회장 단 한 명이다. 친박(친박근혜) 인사로 여겨지던 황창규 전 회장은 2016~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연임 결정 시기에 권력 공백기가 생겨 임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선명해진 ‘경고’ 메시지에 검찰도 수사 착수

구현모 대표 연임에 대한 국민연금의 메시지는 한층 더 선명해졌다. 지난해 12월27일 900조원의 국민연금 기금 운용을 총괄하는 자리에 임명된 서원주 기금운용본부장(CIO)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KT나 포스코, 금융지주 등 소유분산 기업들의 CEO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투명한 기준의 절차에 따라 인사가 이뤄져야 한다. 국민연금이 대주주 역할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행 중인 KT 대표이사 경선을 지목하면서 “셀프 연임 우려가 없어야 한다. 내부인과 외부인을 차별하면 최적의 최고경영자를 선정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①KT에서 ‘셀프 연임(구현모 대표)’은 안 되고 ②‘외부 인사로 대표이사가 선정돼야’ 하며 ③그렇지 않으면 ‘대주주로서 주주권 행사를 하겠다’는 분명한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날은 KT가 대표이사 후보자 경선을 거쳐 최종 후보자를 선정하기 하루 전이었다.

KT 이사회는 지난해 12월28일, 최종 대표이사 후보자를 선정했다. 구현모 대표가 재선정됐다. 경영성과와 비전을 확인하고 회사 노조와 내외부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구 대표가 적임자라는 판단이었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KT가 최종 대표이사 후보자를 선정하자마자 입장문을 냈다. “12월27일 서원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말한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다. 앞으로 의결권 행사 등에서 이러한 사항을 충분히 고려할 것이다.” 경고성 메시지였다.

지난해 12월27일 서원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KT 인사를 공개 비판한 날을 시작으로, 3거래일 동안 KT 주가는 10% 넘게 급락했다. 시가총액이 1조원 가까이 날아갔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 증권사들은 구현모 대표 연임을 전제로 ‘KT 주식을 매수할 적기’라는 리포트를 쏟아내고 있었다.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행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안정적인 연기금 운용 및 장기 수익과 주주 가치 제고에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민연금의 메시지는 반대로 움직였다. 여기에 ‘외부 인사 선정’이 강조되면서, 반대 목적이 과거부터 KT에서 이어져온 ‘관치’, 나아가 ‘낙하산 인사’에 있다는 의심에 불이 붙었다.

해를 넘겨 2023년 2월9일, KT는 또다시 대표이사 후보자 선정 절차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구현모 대표를 후보자로 선정한 기존 결과를 백지화하고, 공개경쟁 방식으로 대표이사 후보를 다시 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KT 내부에서는 ‘대국민 오디션이라도 보겠다는 것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국민연금과 여권 안팎에선 ‘환영한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KT의 공개경쟁 전환 결정은 ‘대통령 의지를 따른 결과’라는 해석이다. 앞서 대통령실은 지난 1월30일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뒤 “소유분산 기업들은 공익에 기여한 만큼 정부의 경영 관여가 적절하지 않으나, 공정하고 투명한 거버넌스를 만들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은 ‘소유분산 기업 지배구조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동섭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실장은 “재선임을 시도하는 임원의 기업 가치 훼손 이력을 주요하게 고려하고 있다. 지배구조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국민연금도 공감하고 있다”라며 구현모 대표 연임 반대 의사를 재확인했다.

국민의힘 박성중(가운데)·김영식(왼쪽) 의원은 KT가 ‘사장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박성중 의원실

KT는 2월20일 대표이사 후보자 공모를 마감했다. 외부 인사 18명이 지원서를 냈다. 구현모 대표를 비롯한 사내 후보자 16명과 최종 후보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됐다. 문제는 외부 지원자 면면이었다. ‘탈통신’을 선언하고 ‘디지코’로 전환한 KT에 수장 후보자로 지원한 18명의 평균연령은 만 64세(1959년생)였다. 13명이 60세가 넘었다.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과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각각 77세, 71세였다. 70대 지원자 두 명은 IT 관련 경력도 없는 여권 출신 인사였다.

정치권 인사들은 이들 외에도 대거 지원했다. 1호 지원자임을 공개한 권은희 전 의원, 그리고 김성태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이들 모두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국회의원이었다. 권은희 전 의원은 KT 출신 정치인이다. 김성태 전 의원은 한국정보화진흥원장을 지내고 제20대 국회에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2021년에는 윤석열 국민캠프 미래전략위원장을 맡았다. 현재는 대통령 직속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다른 KT 임원 출신 인사들 일부도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캠프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거나 통신사업에서 떠난 지 오래된 인물이었다.

공모 마감 직후 구현모 대표가 후보자에서 자진 사퇴했다(2월23일). 이사회에 차기 대표이사 후보군에서 사퇴한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이사회도 구 대표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구 대표는 사퇴 사유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다만 구 대표 사퇴 당일 곧바로 여권 출신 외부 지원자가 유력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KT를 둘러싼 ‘낙하산 인사’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KT 이사회는 2월28일, 최종 후보자로 4명을 선정해 명단을 공개했다. 모두 KT 임원으로 근무 중인 내부 인사였다. 그리고 3월2일, 국민의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박성중·권성동·김영식·윤두현·하영제·허은아·홍석준)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의원들은 내부 출신 인사들로 최종 면접자가 추려진 것에 대해 “내부 특정인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이권 카르텔’을 유지하려는 전형적인 수법”이라며 “KT가 자기들만의 잇속을 차리기 위해 ‘사장 돌려막기’를 고집한다면 국민들은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검찰과 경찰은 KT의 구현모 대표와 일당들에 대한 수사를 조속히 착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의원들의 기자회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주인 없는 회사, 특히 대기업은 지배구조가 중요하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기업 중심의 시장경제라는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공정하고 투명한 과정이 없으면 모럴해저드가 일어나고 결국 피해는 국민이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이런 시각이다”라고 답했다.

KT는 이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다만 회사 내부 곳곳에서는 그동안 삼켜온 불만이 터져 나왔다. 특히 ‘충분히 눈치를 봤는데도’ 압박이 거세지는 것에 대해 답답함도 숨기지 않았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비판 메시지를 낸 3월2일, KT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절차대로 진행하고 정해진 선정 기준에 따라 결과를 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여권에서 ‘어떤 후보를 지지한다’ 등의 언질도 없었다”라고 토로했다.

3월7일, KT 이사회는 차기 대표이사 최종 후보로 윤경림 KT 트랜스포메이션 부문장(사장)을 선정했다. 윤 사장은 앞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기자회견에서 이름을 특정해 ‘구현모 대표의 아바타’라고 비판한 인물이었다. KT의 최종 후보자 선정 이후 대통령실과 여당, 국민연금은 앞서와 같은 ‘분명하고 선명한’ 수준의 메시지는 내지 않았다. 다만 윤경림 사장이 최종 후보자로 선정된 날, 보수 성향 시민단체 ‘정의로운 사람들’은 서울중앙지검에 구현모 대표와 윤 사장의 배임 의혹을 담은 고발장을 제출했다. 검찰은 곧바로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부장 이정섭)에 배당했다. 공정거래조사부는 중앙지검 내에서 특수부 성격이 강한 곳으로 통한다.

구현모 대표와 윤경림 사장에 대한 의혹은 앞서 공정거래위원회가 현장 조사한 KT텔레캅 일감 몰아주기 의혹이다. 구 대표와 윤 사장이 이사회 장악을 위해 사외이사에게 향응을 제공했다는 내용도 담긴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고발장 내용 외에도 그동안 두 사람에 대해 제기된 의혹 전반을 모두 수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구 대표의 경우 ‘쪼개기 후원’ 사건과 관련해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앞서 황창규 전 회장 시절 구 대표를 포함한 임원들이 국회의원 99명에게 쪼개기 방식으로 후원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2022년 6월16일, 항소하지 않아 선고 확정). 구 대표 등 다른 고위 임원 10명은 쪼개기 후원 당시 명의를 빌려준 혐의로 약식기소 됐는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이 사건을 근거로 과징금 83억원을 징수했다. 이것이 배임에 해당한다는 의혹이다. 구현모 대표는 약식기소 후 벌금 1500만원이 부과됐으나 불복해 정식 재판을 받고 있다.

인사 논란으로 1분기 날린 KT

여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정부와 여당이 소유분산 기업에 대해 제기한 문제는 이미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여러 차례 지적해온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여권 관계자는 “주인 없는 대기업에서 특정인이, 특정 세력과 여러 차례 연임을 거쳐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게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구현모 대표 연임 과정에서는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내부 인맥 관계도가 작동했다는 의심도 하고 있다. 그러나 구현모 대표의 경우 첫 번째 연임 도전이었고, 연임은 회사 정관상 허용돼 있다. 대표이사 후보자가 되기 위한 절차도 정해진 규정에 따라 진행됐다. ‘여러 차례 연임을 거쳐 경영권을 장악한다’는 지적이 딱 들어맞지 않는다. 민간기업 지배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와 여당이 공개적으로 나서는 것도 ‘낙하산 인사’ 등 다른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3월22일 KT 대표이사 후보자에서 사의를 밝힌 윤경림 KT 그룹 트랜스포메이션부문장.ⓒKT 제공

KT가 ‘외풍’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KT는 민영화 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번과 비슷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어김없이 대표이사와 대표이사 선임에 관여하는 사내외 이사들을 정권 코드에 맞춰 선임해왔다. 최근엔 대표이사가 사외이사 후보 추천위원회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고, 지배구조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적받아온 제도상 허점을 고치지 않고 유지해왔다는 뜻이 된다.

윤경림 사장의 대표이사 선임 여부는 3월31일 열리는 KT 정기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을 통해 결정될 예정이었다. KT 지분 구조는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 10.35%, 현대차그룹 7.79%(현대차 4.69%, 현대모비스 3.1%), 신한은행 5.58%, 기타 18.58%, 소액주주 57.36%, 우리사주조합 0.34% 등이다. 국민연금은 ‘윤경림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해왔다. 2대 주주인 현대차그룹은 최근 “대주주(국민연금)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3대 주주인 신한은행은 견해를 내놓지 않았지만 국민연금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은 현대차그룹과 신한은행의 주요 주주이기도 하다.

반면 세계 양대 의결권 자문회사 ISS(인스티튜셔널 셰어홀더 서비스)와 글래스루이스는 윤경림 사장의 대표이사 선임에 ‘찬성’을 권고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들 자문사는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 투자자(KT의 경우 지분 약 43% 보유) 및 국내 개인투자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친다. ISS와 글래스루이스는 지배구조 문제와 다른 사내이사 선임 안건에서 견해차를 보였지만, 윤경림 사장의 대표이사 선임에 대해선 찬성으로 한목소리를 냈다. ISS는 “윤경림 사장의 배경과 회사의 장기 성장 전략을 고려할 때 회사의 사업계획을 주도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글래스루이스는 “주주들이 우려할 만한 실질적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라는 의견을 냈다. 이들 자문사는 선임 안건이 통과되지 않으면 경영 공백으로 인해 ‘주주 가치가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라고도 밝혔다.

표 대결 전망은 불투명했다. 1·2·3대 주주의 지분율은 총 23.72%이지만, 대주주들이라 다른 주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지분율보다 더 크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윤경림 사장이 주총에서 새 대표이사로 선임되더라도 후폭풍이 클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정부·여당의 강도 높은 반대 속에 대표이사 취임을 강행하는 모양새가 되면서, 재임 기간 내내 ‘외풍’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대표이사 후보자 인선 과정에서 함께 KT 사외이사 후보로 선정된 임승태 법무법인 화우 고문과 윤정식 KT스카이라이프 대표이사 후보자가 자진 사퇴했다. 임승태 법무법인 화우 고문은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 후보 캠프 특보를 지냈다. 윤정식 한국블록체인협회 부회장은 윤 대통령의 충암고 선배다. 이들은 정부·여당과 KT 사이 가교 구실을 할 것으로 예측됐으나, KT를 향한 전방위 압박 분위기가 사그라들지 않자 사퇴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3월22일, 윤경림 사장은 KT 이사진과 함께한 조찬 간담회에서 사의를 밝혔다. 최종 후보자 선정 이후 정부·여당의 압박과 회사 및 자신을 향한 검찰 수사 등에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닷새 뒤인 3월27일 KT는 윤 사장 후보직 사퇴를 공식화했다. 전날까지 이사진이 설득했으나 윤 사장의 의사가 확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KT는 “윤 후보가 주요 이해관계자들의 기대 수준을 넘어서는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새로운 CEO가 선출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구현모 대표의 임기는 3월31일까지다. 현재 사내이사인 구 대표와 윤 사장 두 명이 이사회를 떠난다. 유희열, 김대유 등 사외이사 2명도 윤 사장과 함께 자진 사임했다. 이들은 지난 정부 시절 임명된 사외이사들이다. 이에 따라 KT에는 총 8명의 이사진(사외이사 6명, 사내이사 2명) 가운데 4명만 남게 됐다. 이사회 개편이 불가피하다. ‘정부 입김’이 닿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차기 대표이사직이 공석으로 남게 되면서, KT는 정관상 직제 규정에 맞춰 대표이사 직무대행 체제로 전환했다. 박종욱 KT 경영기획부문장이 대표이사 직무 수행을 맡는다. 대표이사 직무대행과 주요 경영진들로 구성된 비상경영위원회를 신설해 집단 의사결정 방식으로 전사의 경영·사업 현안을 해결한다. 비상경영위원회 산하에 ‘성장지속 태스크포스(TF)’와 ‘뉴 거버넌스 구축 TF’도 운영할 계획이다. KT는 그동안 조직 개편 및 상무급 이상 임원 인사, 계열사 투자 유치 및 상장 추진 등을 미뤄왔다. 차기 대표이사 선정 이후로 예정됐던 계획들이다. 이에 따라 KT는 지난해 12월부터 이어진 대표이사 인선 논란으로 올해 1분기를 통째로 날렸다.

KT는 지배구조 개선 작업과 두 차례 임시 주주총회 개최를 통해 사외이사 및 대표 선임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약 5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KT는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기자명 문상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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