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1월30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소유분산 기업을 거론했다.ⓒ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범여권이 혼연일체로 소유분산 기업(확고한 대주주가 없는 기업) 비판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이 새해 금융정책 방향을 보고받는 자리(1월30일)에서 소유분산 기업을 거론하더니, 같은 날 국회 의원회관에선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 주최로 관련 세미나가 열렸다. 사흘 뒤(2월2일), 국민의힘 비상대책회의에선 김상훈 의원이 소유분산 기업들을 맹렬히 성토했다. “포스코, KT 등과 거대 금융회사와 같은 소유분산 기업의 대표이사들이 자신만의 왕국(王國)을 건설하며 토착화하는 호족 기업이 돼선 안 된다.” 여권은 이른바 ‘스튜어드십 코드’로 본때를 보여줄 심산이다. 이를 집행할 국민연금공단은 ‘왕(王)’들과의 일전을 서슬 푸르게 벼르는 중이다. 아니나 다를까. 검찰은 관련 수사를 개시했다.

김상훈 의원의 조어인 ‘호족 기업’은 오히려 여권의 숨겨진 열망을 보여준다. 호족(豪族)은 일부 지역에 웅거하며 중앙정부와 대립하는 독자적 ‘지방 세력’이다. 통일신라 말기의 군벌들인 궁예나 견훤 등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며 토착화한” 대표적 사례다. 신라 왕이 해당 군벌의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명해도 듣지 않는다. 1300여 년이 흐른 대한민국에서 중앙정부는 불행히도 비슷한 무리들을 만나고 만다. 아무리 압박해도 자리를 내놓지 않는 소유분산 기업(포스코, KT, 4대 금융지주)의 대표이사들이야말로 ‘호족’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가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여당 의원의 비대한 자의식이다. 21세기의 소유분산 기업은, 정부의 투자 지분이 없는, 어엿한 민간업체다. 정부·여당이 남(엄밀히 말하자면 주주들)의 사유재산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떠드는 것이 오히려 매우 이상한 일이다. 검찰이 마음 먹고 수사하면 어렵지 않게 재산권 침해, 직권남용 등의 혐의를 입증할 수도 있을 터이다.

이 기괴한 상황의 근본 원인은 소유분산 기업들의 지배구조 결함이 맞다. 지분의 80~90%가 셀 수 없이 많은 소액주주들에게 분산되어 있다. 소액주주들은 대체로 경영권엔 큰 관심이 없다. 의사를 결집하기도 힘들다. 주인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주인이 없는’ 상태다. 정치·관료 ‘엘리트’들에겐,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 사적 이익을 탐닉할 인센티브가 발생한다. 그들의 무기는 정부의 인허가권과 감독권이다. 소유분산 기업들은 금융·통신·철강 등 공공성이 강한 업종에 종사한다. 인허가권 및 감독권의 잠재적 행사 가능성만으로도 이들을 떨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치·관료 엘리트들에게도 무서운 적수가 있다. 해당 기업 내부에서 성장한 ‘경영 엘리트’다. 이 ‘내부인’들에겐 대의명분도 있다. 해당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경력도 없는 전직(혹은 선거 패배로 잠시 쉬는) 정치인이나 퇴직 관료보다는 ‘내부인’이 대표 자리에 훨씬 어울려 보이지 않을까? 이에 맞서는 정치·관료 ‘엘리트’를 위한 논리가 최근 새롭게 개발되었다. ‘기업 내부인들이 돌려가며 대표를 해먹는 폐쇄적인 지배구조 때문에 혁신 지체, 이자 파티, 정치권 유착 같은 부조리가 발생한다. 그들만의 리그를 개방하라.’ 누구에게?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이를 위한 편의적 실천방안으로는 ‘스튜어드십 코드’가 활용될 전망이다.

국민연금공단은 과거에서 배워야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는, 기관투자자(자산운용사, 펀드, 연기금)들이 자신에게 돈을 맡긴 고객에게 ‘집사(steward)’처럼 봉사하기 위한 행동 지침이다. 기관투자자는 고객이 맡긴 돈을 기업에 투자한다. 그런데 해당 기업 경영자가 사업을 잘못 운영해서 이익을 남기지 못하거나 사회에 해악을 끼칠 경우, 기관투자자는 고객에게 충분한 수익을 돌려줄 수 없다. 그래서 기관투자자가 스스로 규범을 정해 피투자 기업 경영자를 감시하고 주주총회에서 심판하는 등 경영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소유분산 기업들은 국민연금공단(대체로 8~9% 지분 보유)이 최대주주이거나 2대 주주다. 국민연금공단은 박근혜 정부 당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에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는 등 정권의 입김과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조직이다. 국민연금이 ‘소유분산 기업의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교정하기 위해 내부인을 몰아내는 쪽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라면 법률적으론 꽤 깔끔하다. 법률을 어기지 않으면서 사적 목표를 달성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국민연금의 현재 기조가 스튜어드십 코드의 본래 취지와 일치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목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의 이익이다. 구현모 KT 대표는 기업가치를 크게 올렸다. 그가 취임한 2020년 3월 당시 1만7000원 선이던 KT 주가가 지난해 8월에는 3만9300원까지 상승했다. 인공지능, 클라우드, 콘텐츠 등 신사업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해 혁신을 지체시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국민연금의 자산과 고객(연금 가입자)의 이익이 늘었다. 엘리트들에겐 ‘대표이사가 누구냐’가 관심거리지만 연금 가입자들에겐 공단의 수익이 중요하다.

여권은 소유분산 기업의 이사회가 대표의 거수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이사의 임기 연장과 외부인에 대한 차별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최고위 간부들도 KT와 포스코의 지배구조에 분노한다(포스코 최정우 회장의 임기는 내년까지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사회가 거수기 노릇이나 하는 행태는 단지 소유분산 기업의 문제만은 아니다. 국민연금이 대주주인 재벌 기업들의 이사회 상태가 더 심각하다. ‘재벌 기업엔 오너(owner, 소유자)가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체 계열사 기준으로 따지면, 재벌 가족은 10%의 지분도 갖지 않은, ‘오너’로 불리기엔 좀 민망한 경우가 많다. 더욱이 재벌 가족들은 임기 연장 정도가 아니라 대대손손 경영권을 계승한다. 대기업의 대다수 주총에서 재벌 가족의 손을 들어주는 국민연금이 소유분산 기업에 대해서만 펄펄 뛰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구현모 KT 대표는 두 번이나 대표이사 후보로 확정됐지만 결국 자진 사퇴했다.ⓒ연합뉴스

소유분산 기업에서 나타나는 여러 폐해들을 지배구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여권의 주장에도 모종의 의도가 깔렸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금융권의 ‘이자 파티’가 오로지 지배구조 때문일까. 금융지주에 대주주가 있다면 수익 기회를 그냥 지나가게 놔뒀을까? 차라리 시장경제와 주주자본주의를 탓하는 쪽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소유분산 기업들이 ‘정치권 유착’을 체질화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다만 그 원인 제공자인 정치권이 ‘유착’을 소유분산 기업의 탓으로 몰아붙이는 광경은 기묘하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KT에 대한 여권의 질타·압박은 어떤 결과로 이어졌나? KT 이사회는 사내 출신을 대표 후보로 선정하는 한편 윤석열 대통령 관계자들을 사외이사 후보 및 계열사 대표로 내정했다. 정부·여당이 ‘공정한 지배구조’를 외치면, 소유분산 기업은 그것을 ‘우리 사람을 영입하라’는 요구로 해석한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정치인과 관료에게 ‘거대 기업 대표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용도로 사용된다면 이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사례가 될 것이다. 국민연금은 과거에서 배워야 한다. 청와대 지시로 삼성물산의 합병 주총에 의결권을 행사한 후과가 어떠했던가. 수년 뒤 특검이 국민연금 최고위 간부들을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해 유죄판결을 받게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당시 특검팀에서 파견검사로 일했던 사람이다.

기자명 이종태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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