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창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내친구의서재 펴냄

“여기에 귀신이 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는 유령이나 절대자, 좀비, 부활 등 현실에서 불가능한 상황이 실존한다고 전제한 가운데 이 세계관의 논리에 맞춰 사건을 풀어가는 장르다. 산촌의 연쇄방화 사건에 대한 탐정과 조수의 논리 경합으로 시작된 도입부가 갑자기 ‘쓰야마 사건’ ‘제국은행 사건’ ‘아베 사다 사건’ 등 20세기 초반 일본의 흉악 범죄 가해자들을 지옥에서 지상으로 소환하는 오컬트로 돌변하더니, 사람들 틈에 숨은 인귀(人鬼)들을 잡아내는 수수께끼 풀이로 이어진다. 정신 나간 전개로 보이지만 의외로 수미일관한 데다 논리적이고 흥미로우며 무엇보다 코믹하다. 이 책은 ‘특수 설정’ 부문에서 최근 나온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

수아지크 미슐로 지음, 이현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그러므로 명상가의 접근 방식은 화가나 시인의 그것과 여러 면에서 겹친다.”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빨라진 속도에 지친 사람들이 마음 챙김, 명상, 도파민 디톡스 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꼿꼿하게 세운 허리, 불편해 보이는 가부좌 등의 이미지는 ‘명상은 힘들다’는 고정관념을 낳았다. 저자는 SNS에서 마주치는 번듯하고 차분한 이미지만이 명상의 참모습은 아니라고 말한다. 모호하고 난해해 보이는 명상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은 뜻밖에도 예술이다. 규모나 분야에 상관없이 예술 작품이 주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명상의 길에 오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명상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준다. ‘명상 책이자 동시에 그림책’이라는 설명에 걸맞다.

있었던 존재들

원도 지음, 세미콜론 펴냄

“때로는 펑펑 울고 싶다. 삶의 비밀을 너무 일찍 깨우친 죄로.”

첫 에세이 〈경찰관 속으로〉로 주목받았던 저자가 4년간 과학수사과에서 현장감식 업무를 하며 만난 사건을 복기했다. 그는 29개 단어들로 자신이 마주한 현장을, 아니 생과 죽음이 교차했던 흔적을 말한다. 단어 ‘심연’에는 양쪽 주머니에 커다란 돌들을 가득 넣고 한강으로 뛰어든 노인이, ‘극단’에는 병실에 불이 나 까맣게 타들어가야 했던 사지마비 환자가, ‘비상’에는 추락 지점을 며칠 전부터 서성이다 지체 없이 뜀박질한 청년이 있다. 저자는 무력감 때문에, 밥벌이의 급급함 때문에, 너무 많은 황망한 죽음 때문에, 세상의 비겁함 때문에 부끄러워한다. 과장도 겸손도 없는 그 말간 부끄러움이 안쓰러워서 책을 놓을 수 없다.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읽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반비 펴냄

“우리는 앞으로 긴 악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책은 2023년 12월17일에 쓴 저자의 ‘맺음말’로 마무리된다. 재일 조선인 작가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명예교수는 다음 날 영면에 든다. 그가 남긴 마지막 원고의 제목은 “‘선한 아메리카’를 기억하기 위하여”. 트럼프의 등장과 코로나19 팬데믹, 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전쟁의 한가운데서 그는 ‘선한 아메리카’의 기억들을 끈질기게 펼쳐놓는다. “극동에서 온 정치범 가족인 젊은이”에게 소박한 선의를 갖고 다가와준 사람들을 떠올린다. 냉소주의가 팽배한 시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선한 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글은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한” 분투다. 그는 마지막까지 ‘망각에 저항하자’고 말했다.

해방의 밤

은유 지음, 창비 펴냄

“나는 이 문장을 수치의 언어가 아니라 해방의 언어로 읽었습니다.”

낮의 소란이 지나가고 가까스로 나만의 시간이 확보된 밤, 갈급한 마음으로 집어든 책에서 만난 ‘자유의 말’에 기대 써내려간 이야기를 묶었다. 나를 살리고, 타인을 북돋우는 문장마다 삶을 포갰다. “책으로 삶을 해석하고, 삶으로 책을 반박하며” 한 편씩 완성한 글들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고민 안에 관계와 사랑이, 상처와 죽음이, 편견과 불평등을 켜켜이 녹여냈다. 그렇게 나의 해방이 당신의 해방과 연결되어 있음을 단단하고도 다정한 언어로 설득한다. 르포르타주, 인터뷰, 에세이 등을 넘나들며 글을 깁는 은유 작가의 독서 목록이 궁금한 사람에게도 훌륭한 ‘책 지도’가 되어준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김영사 펴냄

“괴로운 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 아니면 스마트폰을 움켜쥔다.”

지배 체제는 왜 이토록 안정적일까? 도발적인 시선으로 시대의 본질을 건드려온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신작이다. 자본주의와 긍정의 과잉에 갇힌 디지털 세상을 겨냥하는 에세이와 인터뷰 18편이 실렸다. 철학자의 눈에 자본주의 체제에는 죽음이 씌어 있다. 축적과 성장에 대한 강박은 생태적 재앙과 정신적 재앙을 불러온다. ‘공산주의 혁명가’를 자처하는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벌인 논쟁에서 네그리는 지구적 저항의 가능성들을 열망하지만 저자는 순박한 주장이라고 일갈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자행되는 권력은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이기 때문이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