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12일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법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연합뉴스
2018년 12월12일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법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연합뉴스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의 사법 리스크 불똥이 정부 결정에도 튀었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8월 광복절 특별사면 복권 직후 다시 검경 수사선상에 올랐다. 실형이 선고된 횡령·배임 혐의로 또다시 수사가 시작되고 속도까지 붙으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사면 결정 적절성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 전 회장이 연루된 사건을 계기로 대기업 총수 일가 관련 제도 개선을 추진해온 공정거래위원회는 재계가 반발하자 최근 계획을 철회했다. 공정위가 충분한 명분을 갖고서도 수정·보완 없이 제도 개선 계획 자체를 뒤엎은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는 이호진 전 회장의 횡령·배임 의혹을 수사 중이다. 이 전 회장은 2015~2018년 그룹 임원 계좌에 허위·중복 급여를 입금한 뒤 이를 빼돌리는 수법으로 비자금 수십억 원을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는다. 그룹 소유 골프장인 태광CC를 통해 다른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 전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고, 지난해 그룹 차원에서 진행된 내부 감사에 불만을 품은 쪽에서 나온 제보로 시작된 수사라는 뒷말이 나오지만 경찰 수사는 이 전 회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이 전 회장의 자택과 개인 계좌 및 휴대전화, 태광그룹 경영협의회 사무실과 계열사 등을 여러 차례 압수수색했다. 최근에는 자금흐름 파악과 참고인 조사를 마무리하고 이 전 회장 소환조사를 예고했다.

2011년 1월, 이 전 회장은 그룹 핵심 계열사 태광산업의 섬유제품 생산량을 조작해 회삿돈 421억원을 횡령하고, 9억여 원의 법인세를 포탈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이후 8년5개월 동안 일곱 번 재판(파기환송 두 차례) 끝에 2019년 6월 대법원은 이 전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 등에 대해 징역 3년을 확정했다.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도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벌금 6억원이 확정됐다.

이 전 회장은 간암과 대동맥류 질환을 이유로 구속 63일 만에 보석을 허가받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황제 보석’ 논란이 불거졌다. 보석 기간에 흡연과 음주를 하는 모습 등이 언론에 포착돼 비판을 받았다. 2018년 12월 법원은 이 전 회장의 보석을 취소했다. 재수감된 이 전 회장은 2021년 10월 만기 출소했고 지난해 8월 광복절 특사로 복권됐다. 이 전 회장에 대한 이번 서울경찰청 수사는 복권 2개월여 만에 시작됐다. 과거 황제 보석 논란에 실형이 확정된 횡령·배임 혐의로 다시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특별사면의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이 전 회장 복권의 명분이 ‘경제 회복’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태광그룹은 2022년 12월16일 중장기 대규모 투자계획을 공개했다(12월19일 공시). 향후 10년간 석유화학 부문에 6조원, 섬유 부문에 4조원, 금융사업 부문에 2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총 12조원을 투자해 전 계열사에 걸쳐 신규 인력 7000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도 함께 내놓았다. 태광그룹이 그룹 차원의 대규모 투자·고용 계획을 밝힌 것은 창사 이래 처음이었다.

지난해 8월 특별사면 적절했나

그러나 태광그룹의 투자계획 발표 직후 줄곧 이 전 회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오던 시민단체에 더해, 금융투자 및 관련 업계에서도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을 보면, 핵심 계열사 태광산업은 석유화학 부문에서 2022년 2분기에 79억원 적자를 냈고 3분기에는 481억원 손실을 냈다. 태광산업의 2022년 3분기 연결 기준 현금성자산은 1조3719억원(단기금융자산 및 공정가치금융자산 포함)이었다. 나머지 10조원이 넘는 돈을 마련할 구체적인 방안은 밝히지 않았다. 태광그룹은 최근까지도 자금조달 계획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태광그룹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빌딩의 모습.ⓒ연합뉴스
태광그룹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빌딩의 모습.ⓒ연합뉴스

공교롭게도 태광그룹이 대규모 투자를 발표한 날(2022년 12월16일)은 법무부가 신년 특별사면·복권 논의를 위한 사면심사위원회 개최를 일주일 앞둔 시기였다. 이를 두고 한 시민단체는 “태광그룹의 투자계획은 과장됐고, 총수 사면 등 다른 의도가 있다”라고 주장하며 금감원에 허위 공시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태광그룹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최근 공개한 중장기 ESG 경영계획과 연결해 일부 조정할 수 있지만 투자는 계획대로 추진될 것이다. 경찰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선 언급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일감 몰아주기 등 사익 편취 행위가 적발된 법인을 검찰에 고발할 때, 총수 일가도 원칙적으로 함께 고발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하다가 이를 철회했다. 지난해 10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등의 위반행위 고발에 대한 공정위 지침’을 개정한다는 내용의 행정예고를 했는데, 70일 만에 지침 개정의 핵심으로 꼽히던 ‘총수 일가 고발’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최종안을 마련했다.

공정위 지침 개정의 계기는 태광그룹의 김치‧와인 강매 사건이다. 공정위는 2014∼2016년 태광그룹이 이 전 회장의 배우자와 자녀가 소유한 업체인 휘슬링락CC(티시스)와 메르뱅에서 생산한 김치와 와인을 계열사 19곳에 강매한 사실을 적발했다. 공정위는 총수에 대한 부당한 이익을 제공한 태광 계열사와 이 전 회장을 검찰에 고발하고 과징금 21억8000만원과 시정명령을 결정했다. 공정위가 2016년 6월13일 의결한 태광그룹 고발 결정서를 보면, 2014년부터 공정위 적발 직전인 2016년까지 계열사들이 메르뱅에서 사들인 와인만 46억원어치였다. 같은 기간 김치는 총 512t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보다 2~3배 높은 가격에 계열사에 팔렸다. 총 96억5000만원 규모였다.

검찰은 2년 넘는 수사 끝에, 강매를 직접 지시했다고 조사된 그룹의 ‘2인자’ 김기유 당시 태광그룹 경영기획실장만 재판에 넘기고, 이 전 회장은 불기소 처분했다. 이 전 회장이 김치·와인 거래와 관련한 재무 상황을 보고받거나 범행을 지시한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이 전 회장은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나온 직후 공정위를 상대로 시정명령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지난해 3월 대법원에서 원심 판단이 뒤집혔다. 대법원은 이 전 회장이 태광에 대한 지배력 강화 등을 목적으로 강매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렇게 판단했다. “이 전 회장은 태광의 의사결정 과정에 지배적 역할을 하는 자로, 김치와 와인 거래가 티시스와 메르뱅에 안정적 이익을 제공해 변칙적 부의 이전, 지배력 강화, 자녀에 대한 경영권 승계에 기여했다. 이 전 회장은 티시스와 메르뱅의 이익과 수익구조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 영향력을 이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다. 공정거래법상 ‘관여’는 특수관계인(총수 등)이 부당한 이익 제공을 장려하는 태도를 보였거나 관련 보고를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태광이 촉발한 공정위·재계 힘겨루기

대법원 판단은 이 전 회장(총수)의 ‘간접 개입 정황’도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다. 공정위는 대법원 판단을 근거로 일감 몰아주기 고발 지침 개정을 추진했다. 그동안 공정위는 총수 일가의 관여 여부 조사에 한계가 있고, 이 때문에 고발에도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대법원이 총수 개입 여부를 폭넓게 판단하면서 고발 지침 강화 명분에 힘이 실렸다.

공정위가 개정안을 행정예고한 직후 재계가 거세게 반발했다. 한국경제인협회(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비롯한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등 6개 경제 단체는 공동 의견서를 내고 ‘총수 고발 지침’ 개정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했다. 경제 단체들은 고발지침 개정안에 대해 “공정거래법은 일감 몰아주기 행위의 위반 정도가 객관적으로 중대·명백해 경쟁 질서를 현저히 해치는 경우에만 고발하도록 규정했는데, 개정안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도 고발하도록 했다. 기업 경영환경을 더욱 불확실하게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공정위가 재계 반발에 제도 개선을 백지화했다. 사진은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연합뉴스
공정위가 재계 반발에 제도 개선을 백지화했다. 사진은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연합뉴스

공정위는 행정예고 기간인 지난해 11월6일 재계 6단체와 비공개 간담회를 진행했다. 간담회 직후 원점 재검토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 12월 말 결국 ‘총수 고발 지침’ 관련 내용을 뺀 개정안을 발표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내부 보고만 받아도 그룹 총수가 고발될 수 있다거나, 법인을 고발하면 총수도 무조건 고발된다는 등 사실과 다른 오해가 있었다. 재계뿐만 아니라 학계와 정치권 등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결정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정위가 대법원 판단이라는 명분과 총수 일가에 대한 조사의 한계 등 명확한 사유가 있었는데도, 이해관계자들의 반발과 ‘사실과 다른 오해’로 인해 별도의 수정·보완 없이 지침 개정 자체를 포기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재계 저승사자’로 불려온 공정위를 향한, 저격에 가까웠던 경제 단체들의 공개적 반발 역시 통상적인 일은 아니다. 재계의 다소 거친 ‘저항’에 공정위가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배경에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 기조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공정위의 ‘총수 고발 지침’ 개정 방향은 윤 대통령이 기업 규제를 바라보는 시선과 정반대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부터 줄곧 “민생 경제를 위해 빠른 속도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킬러 규제”라며 “민간의 자유로운 투자와 사업 활동을 방해하는 제도를 걷어내는 데 더 집중하겠다”라고 밝혀왔다(지난해 8월 제4차 규제혁신전략회의 등). 경제 단체도 공정위 개정 추진 반대 사유로 “현 정부 정책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경찰 수사와 별도로 검찰도 이호진 전 회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정거래조사부(부장 용성진)는 2022년 11월과 12월 사이 태광그룹 2인자였던 김기유 전 태광그룹 경영기획실장을 수차례 소환 조사했다. 김 전 실장은 이 전 회장이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으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을 때, 그룹 업무를 총괄했다. 이 전 회장이 복권 이후 그룹 전반 내부 감사에 착수한 직후 해임됐다. 검찰은 태광그룹이 계열사 협력업체에 골프장 회원권을 강매했다는 의혹과 함께, 2014~2016년 김치·와인 강매 사건도 수사 중이다. 지난해 4월 대법원 판단 이후 제출된 시민단체의 고발장이 검찰 수사의 불씨가 됐다.

기자명 문상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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