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21일 ‘칼퇴근법’ 등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석한 어머니와 아이. ⓒ시사IN 신선영
2017년 6월21일 ‘칼퇴근법’ 등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석한 어머니와 아이. ⓒ시사IN 신선영

대형 로펌에서 일하던 후배가 업무 시간이 좀 더 적은 회사의 사내 변호사로 이직하겠다고 했다.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할 텐데 대형 로펌에서는 ‘일·가정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을 적게 하고 월급도 적게 받는 단축 근로를 로펌에 제안해보면 어떨까 물었지만, 그는 단축 근로가 공식적 제도로 운용되고 있다면 모를까 자기가 앞장서 그런 요구를 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대형 로펌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클로디아 골딘 교수가 정의한 ‘높은 노동강도와 불규칙한 근무시간’을 요구하는 ‘탐욕스러운 일자리(greedy work)’의 대표 직종이다. 업의 본질이 애초에 가정과 양립하기 어렵다면, 절이 싫은 중이 떠나야 할 문제일까? 나 역시 답은 모르겠다.

그러나 ‘배려받는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을 후배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배려는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고 마음을 쓴다’는 뜻이다.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직장은 나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경제적 관계이지 애정에 기반한 가족이나 이웃이 아니다. 배려를 하는 사람도, 배려를 받는 사람도, 언제까지 얼마나 배려해야 하고 배려받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면, 그 관계는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그러니 그 후배는 회사 눈치를 보며 배려해달라고 호소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어린 자녀를 키우는 수습 노동자에게 새벽·공휴일 근무를 시키고 이를 따르지 않아 채용을 거부했다면 부당해고라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대법원은 “자녀 양육에 대한 부담으로 발생하는 근무상 어려움을 육아기 근로자 개인이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볼 수 없고, 사업주는 소속 육아기 근로자의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배려 의무를 부담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판시했다. “사업주에게 소속 근로자의 일·가정 양립을 배려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라고 한다. 가정에서 돌봄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차별 취급하는 사용자에게 제동을 걸고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를 구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판결이다.

일·가정 양립 위해 필요한 것은 배려 아닌 ‘제도’

하지만 사업주가 부담해야 하는 배려 의무의 구체적 내용은 여전히 알기 어렵다. 대법원이 밝힌 대로 “사업주가 부담하는 배려 의무의 구체적 내용은 근로자가 처한 환경, 사업장의 규모 및 인력 운영의 여건, 사업 운영상의 필요성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개별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도 항소심은 “24시간 도로 통행료 징수 및 지원을 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일정 부분 공휴일 근무 분담이 불가피함”을 고려하면, 회사가 일·가정 양립을 위한 배려를 기울이지 않았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법원도 판단이 서로 엇갈린다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회사에 어디까지 배려를 요구할 수 있는지 알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일·가정 양립을 위한 배려 의무’의 기준이 모호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법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가 노동자의 육아를 지원하기 위하여 업무를 시작하고 마치는 시간 조정, 연장근로의 제한, 근로시간의 탄력적 운영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육아휴직이나 육아기 노동시간 단축 허용은 사업주의 명확한 ‘법적 의무’이지만, 그 외의 조치는 여전히 ‘노력’의 영역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제정한 ‘가족 친화 사업장 조례(Family Friendly Workplace Ordinance)’는, 가족 돌봄 책임이 있는 노동자들이 유연근무나 예측 가능한 작업 스케줄을 고용주에게 요구할 수 있고, 고용주는 과도한 어려움을 입증하는 경우에만 그 요청을 거부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돌봄 책임이 있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헌신을 요구하는 회사의 갈등 관계는 일방의 배려만으로는 해소되기 어렵다. 노동자들의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배려가 아니라 명확한 사회적 제도다.

기자명 이혜온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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