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연구자는 재난에 맞서는 과학이 보통의 기대만큼 깔끔하고 매끄럽지 않다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박진영 연구자는 재난에 맞서는 과학이 보통의 기대만큼 깔끔하고 매끄럽지 않다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과학과 정치는 서로의 대립항처럼 여겨진다. 과학은 과학적 진실을 정치가 호도한다고 비판하고, 정치는 과학적 불확실성을 둘러싼 논쟁에 편승하거나 멀찍이 뒷짐을 지곤 했다. 코로나19 방역을 두고 ‘정치 방역’과 ‘과학 방역’이라는 신조어가 대립하는가 하면, 후쿠시마 오염수의 안전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반대의 과학적 주장을 괴담이나 선동이라 불렀다. 사안은 다르지만 매번 ‘과학 대 정치’의 구도가 반복되며 위기 소통은 갈피를 잃는다. 과학을 필요로 하는 안전 재난은 점점 더 늘어나는데, 정작 그 현장마다 과학은 정치적이라는 ‘오명’에 휩싸이고 만다.

과학은 정말 순수한 고정불변의 진리인가. 환경 재난을 연구하는 박진영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과학 대 정치의 이분법에 균열을 내는 신진 연구자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박사과정을 밟던 2019년 우연한 기회로 ‘가습기살균제참사와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의 연구 과제에 참여했다가 ‘과학이 변한다’는 사실에 착안한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관한 연구는 실험실에서 진행되었지만, 그 연구 결과는 피해자와 시민사회, 국회, 정부와 무수히 상호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 것’이라던 정세랑 소설(〈피프티피플〉)의 한 문장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과 제품의 영향에 관한 과학은 피해자와 유가족이 만든 것”이었다고 박진영 연구원은 말한다.

흔히 참사에 관한 기록은 ‘왜 발생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공동체의 가장 첫 번째 임무다. 그런 다음 중요한 작업이 ‘참사 그 후’를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신간 〈재난에 맞서는 과학〉은 피해자가 아닌 과학 지식의 관점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되돌아보는 기록이다. 참사를 조사한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호흡기내과 의료진, 독성학자 등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공청회와 학술대회를 찾아다녔다. 재난은 과학과 정치가 부딪치는 장이었다. 1월4일 전북대학교 전주캠퍼스에서 만난 박진영 연구원은 “모범 답안은 아니지만 재난 대응에서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과학의 면면을 이해하는 일은 재난이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사참위 조사를 계기로 박사학위 논문(‘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지식 정치: 피해 한정 기준의 형성과 재구성을 중심으로’)을 썼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1990년대 처음 제품 개발 과정을 준비하던 때부터 2023년 현재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재난이다. 2023년 10월 말까지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신고한 7877명 중 1835명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이 미증유의 환경 재난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무엇이 바뀌었는지 여러 질문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화학물질 관리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는 등 성과가 있는 한편, 여전히 연구되어야 할 분야가 많았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고 앞으로 무엇이 더 필요한지 기록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전문가들에게 어떤 사건이었나?

가습기 살균제 참사만큼 오랜 기간, 여러 분과의 자원이 투입된 조사는 없었던 것 같다고 여러 전문가들이 그러더라. 과학자 한두 명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여타 화학물질에 대한 유해성 조사는 해외에 참고할 만한 연구나 증거가 많이 있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달랐다. 피해가 신고되기 시작한 2000년대만 해도 살균제의 주원료인 화학물질을 인체에 흡입했을 때 어떤 영향이 있는지에 관한 조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은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밑바닥’부터 연구해야 했다.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과 관련된 지식은 2011년 이후부터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원인불명의 증상’이 역학조사의 영역에 들어간 건 가습기 살균제가 세상에 나온 지 17년 만인 2011년이었다. 정부의 수거 명령은 그로부터 7개월이 더 걸렸다.

과학적 불확실성을 해석하고 승인하는 기준이 분과에 따라 달랐다. 역학조사 결과는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임을 추정할 수 있을 정도의 수치가 나왔으나, 독성학자들은 역학조사가 ‘굉장히 거친 조사’이므로 추가 실험을 해야 한다고 했다. 또 정책결정자들은 역학조사와 세포독성시험 결과가 100%가 아니라면 확실한 근거 없이 강한 조치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한 골든타임이 거듭 유예된 배경이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가장 정확한 인과관계’를 알고 싶어 하지만, 과학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답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과학적 근거가 충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히려 문제 해결을 늦춘다는 말인가?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의 가습기 살균제 형사재판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쟁점이다. 재판부는 현재까지 나온 연구 결과로는 피해의 인과관계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이미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봤음에도 100%가 아니기에 확실치 않다는 피고 측 주장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당시 학자들이 비판했던 지점도 ‘재판부가 요구하는 확신은 신앙이나 종교의 영역이지 과학은 아니’라는 거였다(1월11일 가습기 살균제 2심 재판부는 제조사에 유죄를 선고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안전성 논쟁에서도 과학과 정치가 부딪쳤다.

정부가 과학의 권위에 기대어 신뢰를 얻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불안을 가중시켰다. 과학적 불확실성을 흑백논리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정부 공식 입장으로 ‘괴담’이라는 표현을 쓴 게 대표적이다. 사람들이 미역과 소금을 사재기한 건 괴담에 선동되어서가 아니라 정부의 메시지가 그만큼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학계 내에서도 ‘안전하다’ ‘안전하지 않다’로 나뉘지 않는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사안이 정쟁화되면서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지 못했다. 코로나19 방역에서도 반복된 현실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최종 보고서는 오염수 방류가 국제 안전 기준에 부합한다고 봤는데.

국제기구 보고서에 관한 연구를 보면, 보고서 하나를 내기 위해 전 세계 수많은 전문가들이 숱한 토론을 거친다. 그 과정도 결국 정치라고 볼 수 있다. 정치의 결과물이 과학 보고서인 셈이다. 과학이 정치와 무관하거나 정치가 배제된 순수한 과학적 결과물이 아니다. 하지만 보고서가 나오면 그런 맥락들은 생략되고 국제기구에서 인증한 사실이므로 정답이라고 말한다. 이런 소통 방식은 과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과학자들도 정치와 거리를 두려 하지 않나. 과학적 진실을 정치가 호도한다는 비판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전문가는 ‘정치적인 과학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재난에 맞서는 과학은 보통의 기대만큼 깔끔하고 매끄럽지 않다. 실제로 천식을 피해로 인정해야 하는가를 두고 오랜 논쟁이 있었다. 피해자가 아닌데 피해자로 인정되는 손실과, 피해자인데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손실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에 따라 의견이 달랐다. 과학만의 결정은 아니었다. 전문가 중에선 ‘너무 정치적으로 가는 것 같아서’ 빠졌다는 분도 있었고, 피해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과학적 인과관계 쪽으로 쏠리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2023년 8월31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12주기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들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2023년 8월31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12주기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들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다수의 연대하는 지식인의 존재가 확인된 곳으로 해석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 환경 재난이 연구자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학회나 공청회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문제가 이렇게까지 길게 온 것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전문가들이 직접 성금을 모아 자발적으로 피해 실태를 조사하기도 했다. 사실 모든 연구자가 정치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전문가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알게 된 건 전문가들도 사회적 참사를 겪으며 배우고 깨달아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고고한 과학자, 정치와 무관한 전문가 혹은 운동권 과학자와 정치적인 전문가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연구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100% 안전한 것은 없다는 과학적 사실이 한편으론 ‘답이 없다’는 혼란을 만들지는 않을까.

과학이 언제나 확실한 게 아닐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과학적 결과를 비판적으로 보려고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환경 재난과 피해를 더 떠들썩하게 말해야 하는 이유다. 그 과정을 거쳐 한국 사회를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관련 연구는 실험실에서 이뤄졌지만, 그 연구가 피해자와 정치, 국회, 정부와 만나면서 바뀌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설과 증거가 모이기 시작했고 피해 판정 기준이 폐질환, 암 등으로 넓어졌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지만 천천히 일어나는 변화들이었고 지금도 그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스스로를 과학과 정치와 법의 경계에 선 연구자로 소개했다. 과학기술학자, 환경사회학자로 환경 재난을 연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960~1970년대 급속한 개발과 산업화의 결과가 기후위기나 환경 재난의 모습을 띠고 이제 막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사회 어딘가에서는 또 문제가 생기고 있을지 모른다. 기록을 해놓아야 새로운 위기가 발생했을 때 시행착오를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단축하고, 더 빨리 원인을 찾고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료들과 재난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결국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기록들이 더 모여야 한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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