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가 듀나의 데뷔 30주년 기념 초기 단편집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의 표지 모습. ⓒ시사IN 신선영
SF 작가 듀나의 데뷔 30주년 기념 초기 단편집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의 표지 모습. ⓒ시사IN 신선영

미국의 한 물리학과 교수가 타임머신 개발에 성공한다. 그가 처음 한 일은 기원전 399년 그리스로 날아가 소크라테스 재판이 플라톤이 기록한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 그런데 막상 타임머신을 타고 아테네에 도착하자 덜컥 겁이 났다. 사람 하나라도 잘못 건드린다면 세계 역사가 완전히 바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교수는 결국 현재로 돌아오기로 하는데, 타임머신에 붙어 있던 나비 한 마리가 과거에 남겨진 것을 꿈에도 몰랐다. 나비의 날개에는 우연히 감기 바이러스가 붙어 있었고,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인류 역사를 처참하게 망가뜨려 놓는데…. 1994년 2월11일 하이텔 과학소설 동호회 게시판에 게재된 듀나의 첫 단편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의 줄거리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컴퓨터가 신문물이던 시절 듀나가 통신 작가로 데뷔했고, 어느덧 한국 SF의 계보도 그만치 쌓였다. 첫 단편에서 묘사된 또 다른 ‘나비효과’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번엔 좀 더 해피엔딩 버전이다. 타임머신과 우주 식민 시대, 로봇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문학이 1990년대부터 그의 손에 의해 한국어로 쓰였다. 소수의 마니아를 위한 게토로 여겨졌던 과학소설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는 장르가 되었다. 김보영 작가는 〈우리는 SF를 좋아해〉에서 “듀나의 존재를 더 빨리 알았다면 조금 덜 절망하며 살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밝혔다. 이경희 작가는 듀나를 “한국 SF의 역사를 관통하는 기둥”이라고, 곽재식 작가는 그를 “한국 SF의 최고의 거장”이라 말한다. 듀나를 읽는 건 한국 SF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는 일이다.

대면 인터뷰는 하지 않는다는 듀나 작가와 2월19일 텔레그램으로 만났다. ‘djuna01’이라는 이름 옆에 귀여운 연갈색 토끼 프로필이 떠 있다. 그를 상징하는 캐릭터 듀나벨이다. 데뷔할 땐 돌고래였는데 트위터로 넘어오면서 토끼가 되었다. 토끼가 더 잘 “붙는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10주년, 20주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30주년도 다른 분들이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그래도 30년은 제법 긴 시간이라 조금 놀랍긴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 전 이 일을 이렇게 오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한국어권에서 SF가 이렇게 메인스트림이 되리라고 생각 못했습니다.”

듀나는 작가 주나 반스(Djuna Barnes)의 이름에서 따온 필명이다. 이름은 물론이고 성별, 나이도 알려지지 않았다. 자연인으로서 ‘나’와 작가 정체성을 분리하기 위해서였다. 20년 전만 해도 ‘얼굴 없는 작가’로 호명되는 일이 잦았는데 이제 그런 관심 자체가 줄어들었다. 그의 팬들은 작가가 궁금하면 작품을 보면 된다고 변호한다. 듀나가 1994년 데뷔 이후 써온 장·단편 소설은 120편이 넘는다. “저만 그런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웹툰이나 웹소설 작가 상당수가 그럴 거고. 이게 이미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에서 듀나는 “1970~19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소위 X세대에 속해 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토끼가 아니라 고양이 두 마리와 산다는 점도 비밀은 아니다.

1994년부터 2009년까지 쓴 작품 스물한 편이 신간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에 담겼다. 30주년 기념 단편집이다. 쓰면서는 민망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의 흔적이었다. “다시 읽고 깜짝 놀랐어요. ‘했소’체를 쓰는 남자들이 이렇게 많이, 당연한 듯 나오는구나. 한국 남자들도 ‘번역소설에 나오는 중년 영국인’처럼 말해요.” 한국어로 쓰는 소설임에도 미국인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았거나, 서구 중심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스스로의 평가다. ‘거짓말 안 하기’와 ‘이걸 그대로 두면 안 되지’ 사이에서 고민이 많이 되었다. 인종차별적 표현은 아예 삭제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설정은 코멘터리를 달아 가차없이 비판했다. 삭제할 수 없는 역사이니 변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2019년 12월28일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SFWUK) 임원진이 〈시사IN〉 사무실에서 좌담을 했다. 당시 임원진이던 듀나는 온라인으로 참가했다. 그의 자리에는 인형 ‘듀나벨’을 놓아두었다. ⓒ시사IN 신선영
2019년 12월28일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SFWUK) 임원진이 〈시사IN〉 사무실에서 좌담을 했다. 당시 임원진이던 듀나는 온라인으로 참가했다. 그의 자리에는 인형 ‘듀나벨’을 놓아두었다. ⓒ시사IN 신선영

한국을 배경으로 한 SF적 상상력

그사이 국내 SF 세계가 풍부해졌다는 의미도 된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더 이상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듀나 작가는 SF가 융통성 있는 장르로 변화해왔다고 말한다. “20세기 서구 문학의 SF 독점 현상은 기술 발달을 서구 세계가 독점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기의 선물이지요. 당연히 거기서 벗어난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자신을 넣는 걸 꺼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거기서 벗어나는 중이고 기술 발전은 전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는 동안 SF는 보다 융통성 있는 장르로 변화해갔습니다. 여러 면에서 다양한 문화권에서 SF가 나오기 쉬운 환경이 조성이 되었고 우리도 그 혜택을 누리고 있지요. 당연히 한국 SF의 개성도 있지만, 이 큰 변화 자체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린 그 일부니까요.”

듀나의 소설에서는 부천(〈대리전〉)과 종로 버거킹(〈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이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가 하면, 다양한 언어권과 문화권의 사람들이 꾸준히 묘사된다. 여성, 퀴어, 장애인 등 현실에선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가 그의 SF 세계에서 다르게 그려진다. 독자들은 듀나의 소설을 통해 가부장 질서의 ‘바깥’을 상상해보게 된다. “사실 전 그냥 도피를 위해 써요. 전 현실 세계의 재료만 갖고 글을 쓰는 것이 재미있거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지금 여기에서 제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다 보면 제가 그렇게 벗어나려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종종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요. 우리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글을 쓸 수는 없고, 결국 방법만 다를 뿐 ‘지금 여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죠. SF는 그걸 다른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틀이고요.”

그렇게 30년간 “파도를 타듯”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펼쳐왔다. 그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 가운데 이미 현실이 된 것도 있다. 일례로 2013년 〈면세구역〉에 실린 단편 ‘사라지는 사람들’에선 온라인 매체를 통해서만 대화할 수 있게 된 언택트 시대를 일찍이 그렸다. “누군가는 지금이 지루한 디스토피아라고 하더군요. 여러 면에서 불길하고 끔찍한데, 디스토피아물의 재미는 없다고요. 코로나와 두 차례 전쟁을 체험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세상에 비관적이 되지요. 20세기의 역사를 겪은 뒤에도 다시 비슷한 극우화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으면 우리가 배운 게 없는 종족이라는 생각도 들죠.” 30년 차 SF 작가로서 체감하는 가장 큰 변화이기도 하다. “그때는 세상에 대해 더 낙천적이었던 것 같아요. 전 지금 좋은 미래는 정말 상상하기 어렵거든요. 당시는 세상이 만족스럽지 못해도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있었고 그게 반영된 것 같아요.”

올해 연작 단편집이 세 권 더 나올 예정이다. 하나는 초능력자들이 아이돌처럼 관리되는 세계를, 다른 하나는 초자연현상이 과학에 편입된 세계를 다룬다. 이른바 ‘링커 우주’라는 세계가 배경인 스페이스 오페라 연작도 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우린 여전히 미래를 상상하고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계속 뒤로 쓸려 나간다고 해도.” 그의 첫 단편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 이후로도 ‘나비의 집’(〈나비 전쟁〉)등 나비가 곧잘 등장한다. “쓰다 보니 계속 들어갔다”는 이 나비는 어쩐지 인류 문명이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을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2024년 현재 듀나가 주시하는 ‘지금 여기’의 현실은 뭘까. 대답은 간결했다. “절망하지 않기. 아마도요.”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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