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값 폭등은 지난해 봄부터 예견됐다. 한 어린이가 과수원에서 사과를 먹고 있다. ⓒ시사IN 포토
사과 값 폭등은 지난해 봄부터 예견됐다. 한 어린이가 과수원에서 사과를 먹고 있다. ⓒ시사IN 포토

1월2일 새해를 맞아 서울 청량리 경동시장에선 사과 판매가 한창이었다. 시장 내 점포에서는 제법 실한 부사를 3개에 1만원에 팔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작거나 예쁘지 않은 사과를 5~7개에 1만원씩 파는 리어카에만 사람들이 몰렸다. 까만 구멍이 숭숭 난, 아예 상품 가치가 없는 사과(4~7개에 5000원)를 사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일반 마트에 비해 훨씬 싸다는 경동시장의 풍경이 이랬다.

1월2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사과(부사) 10개의 소비자가격은 2만9672원으로 1년 전(2만1859원)보다 35.7%나 뛰었다. 사과뿐 아니다. 감귤, 딸기 등도 1년 전과 비교해 크게 올랐다. 채소도 마찬가지다. 대파 가격이 50% 이상 크게 뛰었고, 애호박·깻잎·미나리 등도 올랐다. 사과 몇 알, 대파 한 단 장바구니에 넣기가 부담스러운 시절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농산물 가격 폭등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가격 폭등의 배경에는 유통과정이 복잡한 농산물시장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기후위기다. 농작물 생장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상기후가 농촌을 습격하면서 상당수 작물의 수확량이 크게 줄었다.

당장 최근 채솟값이 뛴 데에는 지난해 12월 몰아친 한파와 폭설 탓이 컸다. 12월 초에는 낮 최고기온이 20℃를 웃돌더니 12월 중하순에는 영하 10℃를 밑돌면서 월동 채소 수확에 큰 타격을 입었다. 지난해 12월은 기상관측 이래 가장 기온 변동 폭이 컸던 12월로 기록됐다. 종잡을 수 없는 기후변화 탓에 농촌 현장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충북 보은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윤병화씨. 그는 농사를 지은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된 귀농인이다. 도시에서 IT 프로그래머로 살다 농업에 뜻을 두고 보은으로 왔다. 예년 같으면 가을에 수확한 사과를 한창 판매할 시기이지만, 그는 몇 달 전부터 인근 농공단지로 출퇴근하고 있다. 판매할 사과가 없어서다.

지난해 그의 사과나무 과수원에서는 예상했던 수확량의 절반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 탄저병 때문이다. 탄저병은 과일에 까만 점이 생기면서 점차 썩어 들어가는 병이다. 비가 많이 내리고 기온이 높은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잘 확산한다. 여름철 강우기가 길어지는 추세가 확고해진 한반도에서 탄저병은 더욱 확산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의 경우 수확기에 비가 자주 내리면서 사과는 물론 배·복숭아·자두·감 같은 다른 노지 과일도 큰 피해를 보았다. 윤병화씨는 “나 같은 귀농인뿐 아니라 마을에서 30~40년씩 사과나무를 키우는 분들도 이제는 기후위기 때문에 농사를 못 짓겠다고 한탄하는 걸 보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병충해만이 문제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일상이 되어버린 봄철의 너무 덥거나 추운 날씨도 심각한 문제다. 특히 지난해 사과 수확량이 크게 줄어든 데에는 봄철의 이상기온이 한몫했다. 2023년 3월 전국 평균기온은 9.4℃로 기상관측 이래 최고온도를 기록했다. 평년보다 3.3℃가 높았다. 전국적으로 봄꽃 개화기가 빨랐고, 사과꽃도 평년에 비해 열흘 이상 빨리 피었다.

문제는 꽃이 피고 난 뒤인 4월 초에 기온이 영하까지 떨어지는 한파가 몰아쳤다는 점이다. ‘냉해’ 피해가 닥친 것이다. 냉해는 사과꽃이 피었을 때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 꽃이 얼어죽는 현상을 말한다. 꽃이 죽으면 열매도 맺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번 겨울의 ‘사과 값 폭등’은 이미 지난봄부터 예견된 사태였다.

더욱 큰 문제는 몇 년 전부터 이런 냉해 피해가 일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본래 ‘꽃샘추위’는 꽃이 필 무렵에 닥치는 추위를 말했다. 요즘에는 이른 봄의 이상고온으로 꽃이 활짝 핀 뒤에 추위가 밀려온다. 봄철의 추위는 꽃 수정을 도와주는 벌과 나비의 활동도 위축시킨다. 설령 냉해를 견디고 꽃이 피었다 해도 열매가 제대로 여물지 않고 6월쯤에 ‘낙과’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걸 ‘준드롭(June-drop) 현상’이라고 부른다. 봄철 냉해만큼이나 농민에게는 절망적인 일이다.

2070년 ‘사과 소멸’ 시나리오

사과는 ‘호냉성(好冷性) 작물’로 불린다.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는 뜻이다. 온난화로 한반도의 기온이 높아지면서 사과 재배지가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대구 사과’는 옛말이 되어가고, 경기도 가평, 강원도 홍천, 심지어 최북단인 강원도 양구 사과가 인기를 끌고 있다. 사과와 배는 7℃ 이하에서 1200∼1500시간 이상 경과해야 제대로 여문다. 특히 밤 온도가 높으면 착색(과일에 색깔이 드는 것)과 비대(과일 크기가 커지는 것)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

〈그림〉을 보자. 농촌진흥청이 2022년 작성한 ‘사과 재배지 변동 예측지도’다. 지도를 보면 1981년부터 2010년까지 과거 30년간 제주도 및 영호남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사과 재배지(재배 적지+재배 가능지)였다. 앞으로 몇 년 남지 않은 2030년대가 되면 확 달라진다. 영호남 대부분 지역이 사과 재배지에서 이탈하고 강원도와 충북 일부로 좁아진다. 그러다 2050년대가 되면 강원도에서도 백두대간 고원지역 일부에서만 사과 재배가 가능해진다. 이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2070년대가 되면 사실상 한국에서 사과는 사라진다.

다만 이 예측은 여러 기후변화 시나리오 가운데 ‘SSP 5-8.5’에 근거했다. 이것은 앞으로 인류가 계속 화석연료 사용량을 높인다는 가정하에 만든 비관적 시나리오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 해도 인류가 극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못하는 한 언젠가 닥칠 미래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즉 ‘사과의 소멸’이다.

이 지도를 보면서 이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먼 미래는 몰라도 앞으로 20~30년 정도는 강원도에서 주로 사과를 재배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강원도는 여름에만 온도가 낮은 것이 아니다. 봄철에도 춥다. 앞서 말한 냉해 피해에 취약한 곳이다. 게다가 산지가 많아 일조량도 훨씬 적다. 농민들 처지에서는 작목 변경도 쉬운 일이 아니다.

농촌에 닥친 기후위기는 비극적인 사건도 불렀다. 지난해 9월 경남 진주에서 단감 농사를 짓던 정철균씨가 농막에서 불에 타 숨졌다. 추석 당일이었다. 단감에 창궐한 탄저병을 막다가 농막에서 잠들었고, 안타깝게도 그곳에 불이 났다. 고인은 학생운동을 거쳐 진주시 농민회 사무국장 등을 역임한 농민운동가였다. 향년 48세로 농촌사회에서는 젊디젊은 나이였다. 평생 농촌과 농민에게 헌신한 농민운동가는 기후위기의 피해자가 되어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장례는 부산경남 농민장으로 치러졌다.

기후위기는 친환경 농사를 짓는 농민을 특히 위태롭게 한다. 농약은 물론이고 냉해 피해를 막기 위한 생장조절제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농민은 이상기후 앞에서 막막할 뿐이다. 병충해가 시도 때도 없이 창궐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약을 치지만, 그럴 때마다 괴롭다. 여름철에 비가 자주 내리면 농약이 씻겨 내려가기에 더욱 자주 약을 쳐야 한다. 친환경 농민으로서 괴로움을 호소하는 이가 적지 않다. 충북 보은에서 생강·대추 농사를 짓는 전경진씨는 “이제는 농민들도 서로 ‘내년에는 잘되겠지’ 하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재해보험 들었냐고 물어볼 뿐이다”라고 말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사전에 계약을 하고 농산물을 수급하는 생활협동조합의 어려움도 크다. 한살림 농산물위원장 우준씨는 방울토마토의 사례를 들려줬다. 한살림은 생산자인 농민들끼리 미리 계획을 세워 출하 시기를 조절하는데, 지난해는 이상기온으로 방울토마토 출하 시기가 늦춰졌다. 봄철부터 순차적으로 나왔어야 할 방울토마토가 한 시기에 몰렸다. 가격이 폭락하는 걸 막기 위해 한살림이 조성한 생산안정기금을 풀어 생산자에게 지급했다. 그동안 쌓아둔 안정기금 상당액을 지난해에 썼다. 이상기후로 농산물 수급에 차질을 빚을수록 운영상 고충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월3일 사과 가격이 폭등한 가운데 한 대형마트 매대에 사과가 진열되어 있다. ⓒ시사IN 조남진
1월3일 사과 가격이 폭등한 가운데 한 대형마트 매대에 사과가 진열되어 있다. ⓒ시사IN 조남진

정부의 해법, 사과 대신 바나나 먹어라?

농민들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것이 앞서 말한 농작물 재해보험이다. 농민이 매달 일정액의 보험료를 내면 자연재해로 피해가 발생했을 때 손실을 보전해준다. 문제는 보험 내용이 기후위기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풍 등 자연재해로 인한 손실은 보상해주고 있지만, ‘자연재해성 병충해’는 일부 품목(벼·복숭아·감자·고추 등)을 제외하고는 보상하지 않는다. 지난해 수많은 농민을 괴롭힌 탄저병도 보험 대상이 아니었다.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최근 정부는 자연재해성 병충해에 대한 보상 확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얼마나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정말 씁쓸한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언젠가부터 세상은 농민을 기후위기를 초래한 ‘가해자’로 지목하며 농업 부문의 탄소배출량을 줄여야 한다고 촉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농축수산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체의 3.4%에 불과하며(2018년 기준) 상당 부분은 축산업이 차지한다. 누구보다 더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 당사자인 농민에게 가해자의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녹색연합이 펴낸 〈모두를 살리는 농사를 생각한다-17인의 농민이 말하는 기후위기 시대의 농사〉에서 충남 예산군의 농민 임춘근씨는 이렇게 말한다. “탄소중립, 온실가스 감축 모두 중요하지요. 그런데 화학비료 안 쓰고, 농약 덜 쓰고, 탄소 흡수할 수 있는 농작물로 대체하면 농가소득이 지금의 30%밖에 안 될 거예요. 당장 농약을 안 쓰면 벌레 먹어서 수확량이 뚝 떨어지겠지요. 농민들이 친환경 농업과 탄소중립에 협조한다고 했을 때 소득을 보전해줄 수 있는지가 관건인 것 같아요.”

1월4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민생토론회에서 정부는 국내 과일값 폭등의 대책으로 바나나 등 과일 수입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역대 최고 수준인 ‘수입 과일 21종에 대한 관세 면제 및 인하’를 추진한다. 올 상반기에만 바나나 15만t, 파인애플 4만t, 망고 1만4000t 등 모두 30만t을 무관세나 저관세로 수입한다. 먹거리 위기의 시대, 정부는 사과 대신 바나나를 먹으라고 권한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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