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 충남대 생명시스템과학대학 생명정보융합학과 교수. ⓒ시사IN 조남진
김준 충남대 생명시스템과학대학 생명정보융합학과 교수. ⓒ시사IN 조남진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 연구는 신림동 꼭대기 쪽 자취방 뒤에 있던 감나무에서 시작됐습니다.” 김준(34) 충남대 생명시스템과학대학 생명정보융합학과 교수가 지난해 11월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에 쓴 ‘선충의 텔로미어 진화’ 연구 후기다.

그 뒤로도 엄격·근엄·진지한 연구 후기의 문법을 깨는 문장이 연이어 튀어나온다. 가령 이런 대목. “(채집한 선충의 유전체 해독 결과가 예상과 달리 나오자) 초콜릿 가루를 세 숟가락쯤 때려넣은 핫초코를 뱃속에 들이부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다른 지표만 보면 유전체 지도 품질이 좋은 게 확실한데 텔로미어가 안 나온다? 이건 데이터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다.’”

텔로미어는 진핵생물에서 DNA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구조물 중 하나다. 생명체의 설계도라 할 수 있는 DNA는 염색체에 담겨 있다. 예쁜꼬마선충은 6쌍, 초파리는 4쌍, 개는 37쌍, 인간은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운동화 끈 끝에 붙어 있는 테이프와 비슷한 역할이다. 테이프가 떨어지면 끈의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염색체 양쪽 끝에 있는 텔로미어가 제 역할을 못하면 염색체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라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암세포 속에 있는 염색체는 텔로미어 이상으로 돌연변이가 나타나곤 한다. 노화나 스트레스로 인해 텔로미어가 손상을 입기도 한다.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오래된 연구 대상이다.

생물종마다 서로 다른 DNA를 가지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텔로미어만은 비슷한 염기서열을 띤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척추동물의 텔로미어는 ‘TTAGGG’라는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다. 곤충이나 선충처럼 인간과 상당히 다른 생물의 텔로미어도 TTAGG, TTAGGC로 거의 유사하다.

대학원생 시절, 김 교수는 예쁜꼬마선충을 연구하는 서울대 이준호 교수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다양한 선충을 채집했다. 선충은 썩은 감에 많이 서식한다. “집 근처 감나무를 뒤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썩은 감을 줍고, 어디 놀러 가면 근처 공원에 들러서 썩은 감을 줍고, 연구실 사람들이 명절에 고향에 간다고 하면 썩은 감 좀 주워다 달라 부탁하고···.” 썩은 과일에는 선충이 많이 산다.

김준 교수가 실험 도구로 채집한 선충을 다루는 모습을 시연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김준 교수가 실험 도구로 채집한 선충을 다루는 모습을 시연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전국 방방곡곡에서 채집한 선충들의 유전체를 분석하는 연구는, 텔로미어 부분이 이미 알려진 염기서열(TTAGGC)과 다른 선충 3종을 찾아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실험이 잘못되었나 싶어 “핫초코를 뱃속에 들이붓게” 했던 데이터가 사실은 세계 최초의 발견이었던 셈이다. 2023년 11월 이 연구 논문은 유전체 분야의 국제적 학술지 〈게놈 리서치〉에 게재되었다.

그 직후 BRIC에 올린 연구 후기가 과학 커뮤니티를 넘어 페이스북 등 SNS에서 널리 공유되었다. “과학 1도 모르는데 낄낄대며 읽었다” “과학하는 즐거움을 엿볼 수 있었다”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김준 교수는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고 말했다. “기초과학 연구의 상당수가 세금을 연구비로 받아서 이루어진다. 시민들의 지지와 호응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 연구가 진행되는지, 어떤 측면에서 중요한 연구인지 최대한 쉽게, 재미있게 써보려 했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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