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 내 성소수자 문제를 전향적으로 공론화해왔다.  ⓒUPI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 내 성소수자 문제를 전향적으로 공론화해왔다. ⓒUPI

“축복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며 그 누구도 이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2023년 12월18일 교황청이 동성 커플에 대한 사제의 축복을 허용하며 이같이 설명했다. 축복(Blessing)은 예수의 대리자인 사제가 하느님께 복을 청하는 행위다. 결혼은 남녀 간에 하는 것이라는 기존 교리를 손대진 않았지만, 축복받을 수 있는 범위를 성소수자 신도로 넓힌 것이다. 2021년까지만 해도 동성 커플 축복에 관해 “가톨릭 교리와 불합치한다”라고 밝혔던 가톨릭 교회의 큰 진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제 전 세계 가톨릭 사제들은 결혼하려는 동성 커플에게 축복을 빌어줄 수 있게 되었다.

교황청의 달라진 입장은 총 여덟 장 분량, 45개 조항으로 서술된 교리 선언문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에 담겼다. 교황청 신앙교리부 장관인 빅토르 마뉴엘 페르난데스 추기경이 작성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승인했다. 가톨릭 교회가 동성 결합 자체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선언문은 사제의 축복은 미사나 결혼식의 형태를 띠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그 때문에 보수 가톨릭계에선 이번 선언문이 공식 전례상 축복과 사목적(비공식적) 축복의 구분을 보여주는 것이며, 전통적인 가르침이 변한 것은 아니라는 데 방점을 찍는다. 한국천주교회의도 2023년 12월27일 설명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 선언은 가톨릭 교회가 동성 결합 자체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성 결합의 형태로 살고 있는 이들도 ‘축복할 수 있다’는('축복해야 한다'가 아닌)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동성 결합 자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되거나 혼란을 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축복 시도는 불가하다.”

하지만 그렇게만 해석되기에 이번 선언의 무게는 그 이상이다. 성소수자 축복을 좁게 해석하고 금지했던 전통을 넘어, ‘사목적 배려심’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새롭게 짚어내는 대목이 있어서다. 박상훈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는 교리 선언문이라는 형태에 주목한다. “교황청의 교리 선언문은 교황이 직접 쓰지 않은 바티칸 문서 가운데 높은 수준의 권위를 지니는 문서다. 2000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조제프 라칭거 주교 시절 발표한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lesus)’ 이후 처음 나온 것이다.” 교황청은 교리 선언문을 통해 당시 확산되던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해 가톨릭 교회의 유일성을 천명했다. 그런 교황청이 23년 만에 내놓은 선언이 ‘축복은 신앙을 키우는 수단을 제공하는 일이므로 저해돼선 안 된다’라는 포용적 메시지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성소수자 문제를 전향적으로 공론화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의 절묘한 한 수라는 평가가 잇따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0년 한 다큐멘터리에서 동성 커플의 시민 결합을 공개 지지하는가 하면, 2023년 1월엔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 관용 부족이 더 문제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미 동성혼이 합법화된 유럽 국가에서는 동성 커플을 축복하고 집전하는 사제들이 존재한다. 특히 2021년 독일 주교회의에서 (사목적 활동이 아닌) 전례에서도 동성 커플 축복을 허용했는데, 이를 계기로 교회 내 논쟁이 불거졌다. 가톨릭은 오랫동안 동성애 자체를 용인하지 않았다. 잇따른 문의에 2021년 교황청이 내놓은 답변은 ‘신은 죄를 축복할 수 없다’였다. 비판 여론이 들끓자 교황청은 책임자를 해임한 뒤 재검토 작업을 벌여왔다. 이번 선언문은 그간의 내부적 역동이 만들어낸 결과인 셈이다.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의 정다빈 연구원은 “여전히 성소수자를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존재로 본다는 한계가 뚜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이 완벽한 사람들에게만 베푸는 은총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공식화했다”라고 평가했다.

2023년 12월17일 영국의 한 침례교회에서 동성 커플이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고 있다. ⓒAP Photo
2023년 12월17일 영국의 한 침례교회에서 동성 커플이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고 있다. ⓒAP Photo

로마 교황청이 한발 내딛는 동안, 한국 교계는 멈춰 있거나 퇴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황청 선언이 있기 열흘 전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는 성소수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넘겨진 이동환 목사에 대해 출교 결정을 내렸다. 교단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징계다. 감리회 기본법인 교리와 장정 제3조 8항은 ‘마약업 위반, 도박 및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했을 때 정직·면직·출교 등의 처벌을 가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2023년 12월8일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 재판위원회(박영식 위원장)는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로 종전 총회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자숙하지 않고 계속 유사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다시 범과를 저지를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라며 양형 이유를 밝혔다.

천동설, 노예제 옹호, 여성 차별, 성소수자

“흔히 가톨릭이 구교이고, 우리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라고 하는데 이제는 뒤집어진 것 같다.” 12월26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만난 이동환 목사가 말했다. 현재 성소수자 인권단체 ‘큐엔에이’의 대표다. 교황청의 선언에 반가움과 속상함이 교차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제 두려움 없이 신부에게 축복을 요청할 수 있고, 그 사제 역시 두려움 없이 축복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다르지만, 축복이 사목자(가톨릭)와 목회자(개신교)의 중요한 권한이라는 점은 유사하다. 비슷한 시기 축복에 관한 정반대 판단이 나온 것이다. ‘축복은 죄가 아니다’라는 구호는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은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가 지난 4년간 외쳐온 말이기도 하다.

출교 처분은 이 목사가 성소수자 환대 목회 활동으로 받은 두 번째 징계다. 2022년 10월 정직 2년 처분이 끝나고 재고발이 이루어졌다. 감리회 목사와 장로들은 축복기도 외에 이 목사가 퀴어문화축제에서 무지개 깃발을 흔들거나 성소수자 인권단체(큐엔에이)를 만든 것을 문제 삼았다. 이 목사가 ‘고발이 끝나지 않겠구나’ 생각한 때다. 재판을 계기로 감리회 내부에 성소수자 이슈가 공론화되길 바랐다. 처벌 근거가 된 제3조 8항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작한 이유다. “이 법 때문에 사람들이 처벌을 받을까 봐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의제가 감리교회 내에서 떠오르지 못하게 막는다.” 2015년 신설된 이 조항은 성소수자 차별법으로도 불린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자란 그는 한 성소수자 교인의 커밍아웃을 계기로 교회 내 차별을 인식하게 되었다. ‘교회법은 그들에게 나가라는 건데 이것이 그리스도 정신에 맞는가. 사회로부터 차별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교회가 피난처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해외 교단을 찾아보니 단순히 포용을 넘어 성소수자 목회자, 주교가 나오는 곳도 있었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70년 동안 신학적 토론과 논의를 거듭한 결과였다. 퀴어문화축제는 2015년부터 참가했다. 조그만 축제 부스에서 축복식을 행할 때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평등하다” “누구나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교인들이 많이 울었다.

성소수자 축복식을 집례했다는 이유로 출교 선고를 받고 항소에 나선 이동환 목사. ⓒ시사IN 박미소
성소수자 축복식을 집례했다는 이유로 출교 선고를 받고 항소에 나선 이동환 목사. ⓒ시사IN 박미소

이동환 목사는 찬성이든 반대든 교회 내에서 얘기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동성애에 관해 언급하는 성경 구절이 7~8군데 있다. 그 당시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였는지 해석의 여지가 크다. 천동설, 노예제 옹호, 여성 차별처럼 성경에 있지만 이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논리도 많다. 이제는 성소수자에 대한 논의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판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교회 재판에서 검찰 역할을 하는 감리회 경기연회 심사위원회 위원과 고발인이 같은 지방회 소속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공소가 취하됐는데도 재판이 진행되었다. 수차례 심사와 재판을 받으며 “그래서 동성애는 죄인가 아닌가” “동성애에 찬성하나 반대하나” 같은 질문만을 반복적으로 받았다고 이 목사는 말한다. 신학적 토론이나 논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2023년 11월30일 진행된 마지막 공판 때 그는 최후진술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우리는 왜 왼손잡이가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왜 게이와 레즈비언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목양하는 것이고 포용하고 환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출교 결정은 8일 후 나왔다. 재판위원회는 항소 비용으로 그에게 3500만원을 청구했다.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모임’의 정경일 집행위원장(성공회대 신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은 감리교의 이번 결정을 퇴행으로 본다. 교회 내에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배제해버린 조치이기 때문이다. “미국 연합감리교회도 성소수자를 포용할지를 두고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지만 누구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교황청엔 있지만 한국 교회에 없는 것

교황청 선언문에는 전문가들에게 자문하고 신중한 초안 작성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 명시돼 있다. 신학자인 정경일 교수는 '토론의 존재'가 이번 교황청 선언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최소한 논의의 장이라도 가졌어야 했는데, 지금 한국 교회엔 그런 게 없다.” 교회의 판단과 달리 교회 내에서 의식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2022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국내 개신교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42.4%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했다. 반대하는 응답자는 31.5%로 10%포인트 이상 적었다.

2020년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차별금지법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 조항이 동성애 행위를 옹호하고 성정체성을 자의적으로 규정한다며 반대한다는 서한을 낸 바 있다. 박상훈 신부는 앞선 한국주교회의의 설명문이 변화하는 교회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 “수세적 해석”이라고 평가한다. “5~6년 전과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동성 커플을 환대하는 신부와 수녀, 수도자들도 많이 늘어났다. 숫자로는 많지 않을 순 있어도 중요한 건 점점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차별받고 있다는 감정은 상처를 남긴다. 이들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억압을 당하는지 생각하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2023년 12월20일 이번 교황청의 선언에 따라 많은 동성 커플이 사제들에게 축복을 받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다고 전했다. 정경일 위원장은 점진적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가톨릭의 가장 큰 힘은 한번 변화가 일어나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교황청이 결정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동성 커플에 대한 공식 축복은 여전히 제약이 있지만 그다음 가능성을 내다보게 되는 이유다. “(비공식적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사목적 활동은 결국 가장 대중과 접촉하고 있는 면이다. 그곳에서 축복과 포용이 일어나게 되면 교회와 제도, 신자들이 같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도 더 넓어진다.” 가톨릭 교회는 그 문을 이제 막 열어젖혔다.

이동환 목사는 12월22일 항소했다. 온갖 음해에 시달리는 그에게 주변에서는 차라리 교단을 나오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이 목사는 거절했다. 굳이 에너지를 써가며 교단 재판을 받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단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 교단에 속해 있는 수많은 성소수자분들이 계실 거다. 조금이라도 그분들이 숨쉴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여기서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100년 후에도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는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2024년 한국 교회는 그 문을 열어젖힐 수 있을까.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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