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3일 공개된 영상에서 넥슨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캐릭터 엔젤릭버스터가 집게손 모양을 만드는 장면.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11월23일 공개된 영상에서 넥슨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캐릭터 엔젤릭버스터가 집게손 모양을 만드는 장면.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11월23일. 넥슨 게임 〈메이플스토리〉 캐릭터 ‘엔젤릭버스터(엔버)’의 뮤직비디오 ‘샤이닝 하트(Shining Heart)’가 공개됐다. 11월25일. 젊은 남성들이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남초 커뮤니티)에서 뮤직비디오 속 엔버의 손동작에 주목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영상에서 엄지와 검지로 ‘집게손’ 모양을 만드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이 남성들의 여성혐오를 성별만 바꾸어 그대로 돌려주는 ‘미러링’을 내세운 커뮤니티 ‘메갈리아’의 로고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해당 로고는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를 비하하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11월25일 오후 8시55분, 주로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백과사전처럼 작성하고 수정하는 사이트 ‘나무위키’에 엔버 관련 ‘남성혐오 논란’ 문서가 처음 만들어진다(이 문서는 이후 몇백 번 수정을 거듭한다). 이 문서의 최초 버전(r1판)은 엔버가 오프닝 장면에서 집게손을 만드는 모습을 올리며 이렇게 쓴다. “엄지손가락의 각도가 부자연스러운 점 등 유저(이용자)들 사이에서 자조적으로 하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 소위 ‘페미가 묻은 결과’라는 주장이 급속도로 신빙성을 얻고 있다.”

이날 밤부터 뮤직비디오의 그림을 그린 애니메이터 A씨의 과거 트윗이 남초 커뮤니티에 돌기 시작한다. “남자 눈에 거슬리는 말 좀 했다고 sns 계정 막혀서 몸 사리고 다닌 적은 있어두 페미 그만둔 적은 없다 ㅇㅇ 은근슬쩍 스리슬쩍 페미 계속해줄게”(2022년 3월11일자). 이 트윗은 ‘은근슬쩍 스리슬쩍 애니메이션에 집게손을 넣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고, “문득 불안함을 느낀 게이머들이 조사를 한 결과 메이플(스토리)뿐만 아닌 각종 다른 게임들의 작업물에도 정말로 문제의 손가락을 숨겨둔 것이 대량으로 적발”되었다(나무위키). 〈메이플스토리〉 측은 문제 제기가 나온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11월26일 0시께 영상을 비공개 조치하겠다며 사과문을 올린다. “많은 용사님께 걱정을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집게손 혐의를 받은 넥슨의 또 다른 게임 〈던전앤파이터〉 〈블루아카이브〉, 스마일게이트의 게임 〈에픽세븐〉 〈아우터플레인〉 등도 줄줄이 영상을 내리고 사과문을 올렸다.

“주먹을 쥐다 손가락을 펴면 나오는 동작”

그런데 엔버 영상은 넥슨이 ‘스튜디오 뿌리(이하 뿌리)’에 외주를 준 작업물이었다. A씨가 뿌리 소속 애니메이터였기에 뿌리가 제작한 게임 관련 영상들이 주로 ‘집게손’ 검증 대상에 올랐다. 11월26일 오후 4시12분, 뿌리는 1차 사과문을 올린다. “동작과 동작 사이에 이어지는 것으로 (손가락이) 들어간 것이지 의도하고 넣은 동작은 절대 아닙니다. … 해당 스태프는 앞으로의 수정 작업과 더불어 저희가 작업하는 모든 PV(홍보 영상)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과문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집게손에 의도가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A씨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튿날인 11월27일 오후 8시21분, 뿌리는 2차 사과문에서 “특정 성별을 혐오하는 표현을 막지 못했다” “(집게손이) 의도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해주신 부분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 책임을 통감했다”라며, 애니메이터 A씨가 “퇴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1시간도 되지 않아 삭제된 이 사과문은, 애니메이터 A씨와 뿌리 측이 남성혐오의 의미로 집게손을 몰래 넣었다고 사실상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일단락되는 줄 알았던 사건은, 11월30일 〈경향신문〉 보도로 전환점을 맞는다. 애니메이션은 ‘콘티’라 불리는 설계도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엔버 영상에서 초기부터 의심을 받은 대표적 장면인 오프닝의 집게손 부분 콘티를 여성 애니메이터 A씨가 아니라 40대 남성이 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A씨는 당초 주목받았던 오프닝이 아니라, 엔버가 공중에 떠서 ‘변신’하는 장면을 담당했다.

오프닝 장면의 집게손 부분 콘티. 페미니즘 관련 트윗을 올린 A씨가 아니라 40대 남성이 그린 것으로 확인됐다. ⓒ시사IN 자료
오프닝 장면의 집게손 부분 콘티. 페미니즘 관련 트윗을 올린 A씨가 아니라 40대 남성이 그린 것으로 확인됐다. ⓒ시사IN 자료

이에 대해 집게손을 그린 것이 A씨든 아니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중요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남페미(남성 페미니스트)’도 있을 수 있는 데다, 애초에 논점은 원청인 넥슨에 대한 하청 뿌리의 ‘하극상’이라는 논리다. 그런데 30여 명이 참여하는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서, A씨든 누구든 집게손을 ‘몰래 넣는’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 애니메이션 제작은 먼저 콘티로 포즈 등 기본적인 구상을 짜고, 이를 바탕으로 원화(움직임의 축이 되는 밑그림)를 두 단계로 나눠 그린 뒤, 원화 사이사이에 ‘동화(움직임을 보완하는 그림)’를 그려넣는 순서로 진행된다. A씨는 원화의 일부(변신 장면)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총감독이 콘티, 첫 번째 원화, 두 번째 원화 각각의 단계에서 컨펌(확인)을 하고, 동화 뒤 채색과 촬영이 끝난 최종본을 또다시 컨펌한다. 에미상을 수상한 50대 남성 김상진 감독이 이 영상의 총감독을 맡았다.

김상진 감독은 “콘티가 마무리되면 원청인 넥슨에 보낸다. 컨펌을 받으면 이를 시간에 맞게 편집해서 다시 보낸다. 원청이 컨펌하면 그때부터 원화에 들어가며, 동화를 거쳐 최종 단계에 이르기까지 중간중간 원청과 소통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림쟁이이지 페미니즘에는 관심이 없다. 집게손이 그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만약 넥슨에서 넣지 말라고 했다면 당연히 뺐을 것이다. 집게손이 포함된 콘티 등을 넥슨이 알고 있었고 컨펌을 했다. 빼달라는 요구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넥슨은 스튜디오 뿌리 측에 “사과를 해주시는 게 뿌리 측에서 (넥슨에) 해줄 수 있는 배려다. 최대한 빨랐으면 좋겠다. 엄격하고 낮은 자세로 커뮤니케이션 해주셨으면 한다”라고 말했고, 법무팀을 언급하기도 했다고 〈경향신문〉이 보도했다.

A씨는 오프닝이 아니라 변신 장면을 작업했다. A씨가 작업한 원화 중 한 컷. ⓒ시사IN 자료
A씨는 오프닝이 아니라 변신 장면을 작업했다. A씨가 작업한 원화 중 한 컷. ⓒ시사IN 자료

김 감독은 뿌리 창업자로서 뿌리가 만든 모든 영상을 최인승 감독과 함께 감독했다. 넥슨과는 2017년부터 함께해왔고, 넥슨 관련 매출이 전체의 80%에 달한다. 그는 여전히 넥슨 등에서 의뢰한 영상을 만들고 있는데, ‘손가락 논란’이 제기된 이후로는 주먹을 쥐거나 아예 빳빳하게 손을 펴는 식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집게손이라고 지목된 장면 대부분은 주먹을 쥐었다가 손을 펼 때 통상적으로 많이 나오는 중간 동작일 뿐이다. 애니메이션은 어떤 동작을 그림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으로 표현하는 일인데, 이런 식으로 표현에 제약이 생기면 창작자 입장에서도 고통스럽지만 결과물도 부자연스러워진다. 만약 눈 깜빡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서 빼야 한다면, 그런 제약을 가지고 만드는 애니메이션은 어떤 모습일까.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일본 애니를 많이 보는데 그 손동작이 계속 보여서 괴롭다. 30년 경력에 이런 일은 처음이다.”

“30년 경력에 이런 일은 처음이다”

이것은 과도한 검열인가. 넥슨 노동조합(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넥슨지회) 배수찬 지회장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BTS(방탄소년단)가 노래 가사 중 ‘니가’라는 단어를 바꿔 부른 적이 있다. 흑인을 비하하는 표현인 ‘Nigger’와 발음이 비슷해서다. 혐오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이들에 대한 예의를 지킨 거다. MBC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어묵을 먹는 장면의 배경으로 세월호 참사 뉴스특보를 흐리게 처리해 내보냈을 때, MBC는 제작진에게 고의는 없었다면서도 사과하고 징계했다. 일부 유저라도 불편해할 맥락이 있다면, 영상을 내리고 전수조사하는 것은 콘텐츠 제공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넥슨지회 배수찬 지회장은 “일부 유저라도 불편해한다면 콘텐츠 검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넥슨지회 배수찬 지회장은 “일부 유저라도 불편해한다면 콘텐츠 검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반론도 있다. “의도와 무관하게 혐오 표현이 성립할 수 있고 그런 경우 검수가 필요한 것도 맞는다. 사실, 발화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모욕적으로 느낀다면 문제’라는 것은 그동안 전통적인 소수자 집단의 주장이기도 했다. 문제는 과연 지금 문제되는 각종 영상 속 집게손을 ‘남성혐오’로서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다. 우리가 ‘여의사’ ‘여검사’ 등 사소한 표현조차 조심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와 차별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상 속 집게손이 현실에서 남성혐오를 조장하고 남성 차별의 사회적 확산에 기여하고 있는가?”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과)의 말이다.

대선 직후인 2022년 3월 ‘에브리타임’이라는 커뮤니티에 ‘페미니스트들이 정부와 어용단체에서 돈을 받아왔는데, 정권이 바뀌었으니 밥줄이 끊길 것이다’라는 취지의 글이 올라왔다. A씨가 이를 비판하며 2022년 3월11일 올린 트윗이 “은근슬쩍 스리슬쩍 페미 계속해줄게”다. 이 트윗이 1년 반도 더 지난 2023년 10월 A씨가 참여한 엔버 영상의 ‘의도’로 해석되고, A씨의 얼굴 사진과 카카오톡 아이디가 디시인사이드에 유포됐다. 뿌리 사무실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A씨는 당초 퇴사하기로 했으나 퇴사하지 않았고, 현재 정직 상태다. 온라인 괴롭힘에는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이다.

A씨는 〈시사IN〉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단체 작업에 표식을 숨겨 넣는 건 작품을 망치는 일이에요. 저는 그저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하면 더 예쁘고 멋지게 그릴지 생각할 뿐 사상운동은 다른 데 가서 해요. 페미를 하겠다는 건 집회에 나가거나 서명을 하거나 모금에 참여하겠다는 의미이지, 남성혐오 손가락을 그림에 넣겠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남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성차별에 반대한다면 누구나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손가락이 아니라 제가 페미니스트인 게 문제인가요?”

12월4일 스튜디오 뿌리 소속 애니메이터 A씨가 〈시사IN〉 취재진과 만나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시사IN 신선영
12월4일 스튜디오 뿌리 소속 애니메이터 A씨가 〈시사IN〉 취재진과 만나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시사IN 신선영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