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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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봄, 〈노란문〉 제1호가 세상에 나왔다. 28쪽짜리 ‘영화 연구 자료집’으로, 표지 한가운데 놓인 노란색 문 이미지가 시선을 끈다. 최종태 소장의 발간사가 비장하면서도 어딘가 느슨하다. ‘한국 영화의 새물결을 일으킬 새로운 영화세대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내부의 적’으로 자만과 조급함을 꼽은 데 이어, ‘한 화학원소를 발견하기 위한 어느 과학자의 끊임없는 실험의 반복처럼,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가기보다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무르익어 넘칠 수 있기를 노력하며 인내할 생각’이라고 밝힌다.

1990년대 초 만들어진 노란문 영화연구소는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다 휴학 중이던 최종태 소장을 주축으로 2~3명이 모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지인과 지인의 지인도 데려와 30여 명까지 회원이 늘었다. 연출 분과, 시나리오 분과, 비평 분과로 나뉘었다. 영화 전공자부터 인문학 대학원생 등 구성원은 다양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영화라는 매체와 함께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만은 공통적’이었다. 회원 중 유명인사로는 봉준호 감독이 있다. 가장 초창기부터 노란문에 몸담았던 그는 이곳을 거쳐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한 뒤 1993년, 잘린 손가락을 주운 회사원이 등장하는 데뷔작 〈백색인〉을 만들었다.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등으로 연달아 주목을 받은 그가 2000년대 초, 해외 영화제에 갈 때마다 같은 질문을 받았다. '도대체 한국 감독들이 어디에 있다가 쏟아져 나오는 건가?' 봉 감독은 노란문을 이야기했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이하 〈노란문〉)는 노란문 회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서울 서교동 한 건물 2층, 노란색 페인트로 칠한 문을 열면 시네필(영화 애호가)의 공간이 나왔다. 이름을 짓기 전부터 중국집 배달원에게는 일찌감치 ‘노란문’으로 통했다. 영화를 몹시 사랑했던 이들이 30년 만에 그 시절을 떠올리며 ‘영화광들의 시대’와 청년 봉준호의 첫 번째 단편영화를 복기한다.

1993년 발간된 영화 연구 자료집 〈노란문〉 제1호와 노란문이 취합한 영화 자료 목록표. 자료집 속 그림은 봉 감독이 그렸다 ⓒ시사IN 이명익
1993년 발간된 영화 연구 자료집 〈노란문〉 제1호와 노란문이 취합한 영화 자료 목록표. 자료집 속 그림은 봉 감독이 그렸다 ⓒ시사IN 이명익

“액체 같은 사람들의 기체 같은 꿈”

〈노란문〉을 만든 이혁래 감독도 노란문의 멤버였다. ‘노란문이 만들어진 지 30년 되었으니 다 같이 한번 모여서 술이나 마시자.’ 이런 얘기를 하는 자리에서 시작된 기획이다. 10월2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노란문〉 속 등장인물과 계속해서 선을 그었다. “당시 나는 만 18세로 막내였다. 항상 주장하는데,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분들과 세대가 좀 다르다(웃음). 예전에 TV에서 방영한 〈케빈은 열두 살〉이라는 미국 드라마를 좋아했다. 열두 살 주인공이 연민과 선망의 시선으로 히피 누나의 방황을 지켜본다. 영화를 좋아하는 노란문의 형과 누나들을 볼 때 약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플라이 대디〉 〈해로〉 등을 만든 최종태 감독은 당시 이론서 〈영화의 이해〉를 펼쳐놓고 대학생 봉준호에게 영화를 가르쳤다. 필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서로의 기억이 엇갈린다. 연구소의 주된 ‘미션’은 ‘영화 조달’. 당시에는 고전 명작을 구하기가 어려워 불법복제밖에 길이 없었다. 지금 보면 화질이 형편없는 VHS 테이프를 모았다. 자료에 대한 갈증이 많았던 봉 감독은 노란문의 영화자료 관리자이기도 했다. 테이프 반납을 독촉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독일 표현주의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고다르 감독의 〈사랑과 경멸〉을 봤다. 영화를 사조별, 장르별, 신(scene)별로 분석하기도 했다. 모임의 형태는 느슨했다. 리더 격인 최종태 소장부터 계획이 없는 편이었다. 〈노란문〉 속 한 등장인물은 말한다. “액체 같은 사람들이 모여 뭉실뭉실하게 기체 같은 꿈을 꾸었다.”

대부분의 출연진은 〈노란문〉 첫 촬영 후 말했다. “이게 얘기가 돼?” 봉준호 감독도 ‘우리’끼리만 보고 좋아할 만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혁래 감독은 “실제 노란문을 겪어본 사람들은 거기가 ‘얘기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별게 없잖나. 말하자면 (〈파업전야〉를 만든) 장산곶매가 아니잖나. 정부가 헬기까지 동원해 상영을 막으려던 곳이야 얘기가 되겠지만 노란문은 그런 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 폐막한 제28회 부산국제영제에서 〈노란문〉이 공개됐을 당시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관객들이 공감해주었다. “뭔가 대단한 걸 할 것처럼 모였지만 이룬 것 없이 그냥 사라졌다. 대부분의 모임들이 그렇다. 그런 면에서 영화가 각자의 경험을 불러들인 것 같다. 웃으라고 만들었는데 우는 관객이 많았다.”

1990년대, 노란문 멤버들이 모였을 당시의 모습. ⓒ넷플릭스
1990년대, 노란문 멤버들이 모였을 당시의 모습. ⓒ넷플릭스

1990년대, 노란문 말고도 곳곳에 영화 모임이 있었다. 그중 〈파업전야〉를 만든 장산곶매는 ‘슈퍼스타’였다. 영화제작소 현실, 푸른영상, 씨앙씨에 등도 있었다. 영화 속 멤버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말한다. “잔치가 끝난 다음의 허탈함이 있었다.” “에너지는 넘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학생운동은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이혁래 감독은 개방의 시기로 당시를 회상한다. 못 듣던 해외 앨범이 정식으로 발매되고 오래 금지되던 영화가 개봉했다. 해외여행도 자유화되었다.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가 홍수처럼 밀려오던 시기였다. 나이에 비해 너무 버거운 사명감을 짊어지고 있던 20대들이 1990년대 초 동구권이 몰락하며 짐을 좀 내려놓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기도 했다. 마음껏 방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음악과 영화들은 널려 있었다.” 문은 열렸지만 향유할 여건은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 영화를 찾아 즐기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 미묘한 시대적 어긋남이 영화광들로 하여금 영화에 더 집착하도록 만들었다. 1980년대 후반 학번인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의식적으로 공부해서 감독이 된 첫 세대’, ‘시네필이 인더스트리에 진입한 첫 세대’로 스스로를 정리한다.

다큐멘터리를 관통하는 또 한 편의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루킹 포 파라다이스〉다. 노란문 시절 그가 만든 ‘숨겨진 데뷔작’이다. 지하실의 고릴라가 애벌레와 사투를 벌이며 파라다이스를 향해 나아간다는 내용이다. 고릴라 인형을 촬영해 만든 단편이다. 이 감독이 〈노란문〉을 만든 개인적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다. 30년 전 그 영화를 봤을 때의 느낌이 굉장히 생생하다. 세세하게 다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의 보정’이 있었다. 그냥 보여달라고 하면 안 보여줄 것 같아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핑계로 말했다.” 봉 감독의 작품이지만 그와 회원들에게도 중요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그냥 모여서 놀고 공부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며 굉장히 마음이 움직였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지금(위치)의 봉 감독이 아니라고 해도 30년 전 〈루킹 포 파라다이스〉를 본 경험은 내게 중요하다. 멤버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 ‘봉준호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 걸로 깊이 남아 있다. 봉 감독이 숨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알겠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건 아니니까(웃음).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 쿵 하고 떨어지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꿈을 좇는 고릴라의 이야기에는 반전도 있다.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모르지만 어디로 가고 싶지 않은지는 확실히 알았던, 노란문 회원들의 청춘과 겹치는 이야기다. 작품을 찾는 데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느 날 봉준호 감독이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필모 분실의 공포, 끔찍하다.’ 찾아봐도 영화가 없다고 했다.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가 했더니 아니었다. 다큐멘터리 제작 자체가 무산될 위기였다. 이 감독은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를 생각해보라며, 발견하기 쉬운 데를 찾아보라고 했다. 일본에서 출시된 봉 감독의 초기작 DVD가 남아 있었다. 테이프 원본은 분실되었으나 DVD에 옮겨놓은 흔적을 찾았다. 틀어보니 재생이 안 되었다. 용산 전자상가를 뒤지다 한 군데에서 데이터 복원이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절반만 복원되었는데 그중에 작품이 있었다.

의 한 장면. 봉준호 감독(왼쪽)을 비롯한 노란문 회원들이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넷플릭스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한 장면. 봉준호 감독(왼쪽)을 비롯한 노란문 회원들이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넷플릭스

30년 전 영화에 ‘미쳐’ 살던 사람들

이 감독의 전작은 지난해 개봉한 〈미싱 타는 여자들〉이다. 1970년대 노동교실에 다니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장편 다큐멘터리를 또 만들게 된다면 극장용 작품은 만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익을 떠나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번 영화를 구상하며 넷플릭스에 제안했다. 봉준호 감독이 출연하지 않으면 투자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봉 감독은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본인을 주인공 말고 노란문 멤버 중 하나로 다뤄달라는 것. A4 용지 두 장짜리 시놉시스를 써서 넷플릭스에 제안했다. ‘만일 이대로가 아니라, 봉준호 감독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하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걱정했는데 담당자가 단번에 “동아리 얘기네요”라고 화답했다. “함께 무언가를 좋아했던 마음과 경험이 영화에 제대로 담기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뜻밖이었다. 알고 보니 그분도 영화 동아리 활동 경험이 있었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창작 멤버로 있던 영화 모임 소속이었다.

원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넷플릭스의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봉준호 감독에 비해 다른 멤버들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했다. 비슷한 말을 해도 대중과 친숙한 봉 감독이 등장하는 장면은 집중도가 높았다. 나머지 멤버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신경써서 후작업을 했다. 봉준호 감독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 궁리하다 그가 소개하는 노란문, 그가 말하는 1990년대 시네필 문화로 가닥을 잡았다.

30년 전 영화에 ‘미쳐’ 살던 사람들은 이제 각자의 자리에 있다. 영화계에 있거나 영화계와 멀리 있다. 이 감독도 한참 영화를 떠나 있다가 지난해 〈미싱 타는 여자들〉로 돌아왔다. 이 감독에게 20대 초반 1~2년은 짧았고 어떻게 보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그때를 다시 살며 ‘시절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요즘 영화학도들 사이에서는 시네필이라는 말에 반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봉준호 감독이 땅을 치던데, 1990년대나 지금이나 무언가를 과도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변으로부터 이해받기가 힘들다. 그러다 좋아하는 걸 함께 이해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얼마나 좋겠나. 무언가 좋아하는 경험을 공유했던 기억은 이후 경력과 직접 연결되지 않더라도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지금의 힘든 삶을 견뎌나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1990년대 시네필의 얘기만이 아니다. 지금 주변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걸 자신의 정체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영화를 보며 지금의 시간, 좋아하는 이 순간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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