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미국 영화 팬들과의 질의응답에서 ‘최후의 만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 5명’으로 앨프리드 히치콕, 김연아, 케빈 더 브라위너, 마틴 스코세이지, 지미 페이지를 꼽았다. 현존하는 동종업계 종사자로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유일하다. 2월9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감독상을 받은 봉 감독은 “어렸을 때 항상 가슴에 새긴 말이 있는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그 말을 하신 분이 바로 마틴 스코세이지다”라고 말하며 나란히 감독상 후보에 오른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전 세계인 앞에서 ‘월드 클래스’ 반열의 ‘성덕(성공한 덕후)’을 인증한 날이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말은 ‘봉준호 월드’를 설명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기생충〉의 경우 개인을 ‘한국’으로도 바꿀 수 있다. 반지하와 소독차, 짜파구리, 대만 카스테라, 수석 같이 한국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기생충〉이 쟁쟁한 영어권 국가의 작품들과 겨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총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시상식 이후 기자회견에서 봉 감독은 “가장 한국적인 것들로 가득 차서 오히려 가장 넓게 전 세계를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빈부 격차라는 소재 자체가 세계 공통의 현상이기도 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성난 황소〉를 비롯해 히치콕의 〈싸이코〉 등 할리우드 거장들의 영화를 보며 자란 봉준호 감독은 주로 텔레비전을 통해 명작을 접했다. 〈자전거 도둑〉을 본 뒤 영화의 위력을 느꼈고 한국 나이로 열네 살, 만으로 열두 살에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평범하지만 집착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회고하는 그에게 집착의 대상은 줄곧 영화였다. 국립영화제작소 미술실장이기도 했던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만화를 좋아해 감독이 된 뒤에도 지금은 사라진 홍대 앞 만화 전문서점 한양툰크에 자주 들렀다. 〈설국열차〉의 원작도 거기서 접했다. 영화감독의 전공이 영화와 상관없다는 걸 알고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사회과학 서적을 보면 머리에 쥐가 나서 〈자본론〉 1권을 읽다가 포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가 대학 학보에 연재했던 ‘연돌이와 세순이’라는 네 컷 만화도 다시 화제에 올랐다. 네 컷짜리 그림에 등록금 문제 등 학내 현실을 꼬집었다. 학생운동이 치열하던 시절이었다. 선전물에 만화를 그리고 학회실 벽에 그림도 그렸다. 그림에 익숙한 그가 영화 작업을 할 때 직접 콘티를 그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화 동아리 ‘노란 문’을 거쳐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장준환 감독 등과 입학한 뒤 1993년, 잘린 손가락을 주운 회사원이 등장하는 단편 〈백색인〉과, 교수·논설위원·검사 등 엘리트 지식인의 이중성을 그린 졸업 작품 〈지리멸렬〉을 내놓았다. 1997년 충무로에 입성해 〈모텔 선인장〉의 조연출을 하고 〈유령〉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다.

ⓒ시사IN 최예린

진지한 분위기에서 힘을 빼놓는 유머 코드

봉준호 감독은 과거 자신을 다룬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나는 남이 안 했던 영화를 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남이 안 만든 영화. 이것은 봉준호 감독 개인의 특징이 되었다. 해외 영화제에 가면 그는 장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조차 자신의 영화가 어느 장르로 분류될지 모를 때가 많다. 오늘날 감독 스스로 장르가 된 배경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섞여 있다고 적당히 눙쳤다. 강아지 연쇄 실종사건을 다룬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2000) 역시 처음 소개됐을 때도 코미디와 공포, 미스터리, 판타지가 뒤섞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감독 스스로는 ‘일상 속의 비일상, 슬픔 뒤의 기쁨’을 묘사하고 싶었다. 백수에 가까운 시간강사,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가 강아지를 두고 쫓고 쫓기는 이 이야기의 주된 배경은 복도식 아파트다. 이때부터 봉 감독은 익숙한 장소를 낯설게 보여주는 데 탁월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현관 전등(〈기생충〉)과 복도식 아파트 입구(〈플란다스의 개〉), 삼겹살과 소주(〈옥자〉) 앞에서 멈칫하게 된다.

장편 데뷔작이었던 〈플란다스의 개〉는 10만여 관객이 들었고 다음 작품을 기약하지 못하게 되면서 봉 감독은 비디오 가게 창업을 알아보기도 했다. 만들지는 못해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뜻밖의 인연은 송강호 배우로 이어졌다. 원래 잘 웃지 않는다는 그가 〈플란다스의 개〉를 보며 데굴데굴 굴렀고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3년 뒤 송강호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한 〈살인의 추억〉(2003)도 일반적인 스릴러물과 달랐다. 최후까지 연쇄살인범이 밝혀지지 않는 데다 ‘어떻게 범인을 잡았는지’보다 ‘어떻게 범인을 못 잡았는지’에 집중했다. 봉 감독은 ‘트렌치코트 깃을 세운 형사’가 아니라 실제 주변에서 마주칠 법한 1980년대 형사를 그렸다. 형사의 무능함보다는 시대의 조악함을 그리고 싶었던 그는 “스릴러란 장르에선 약점이지만 허구적 결말로 실제 사건을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AFP PHOTO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

장르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대체로 사회적 메시지가 선명하게 담겨 있다. 때로는 국가의 존재 의의를 묻고 자본주의와 계급, 환경과 식량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1000만 영화’였던 〈괴물〉(2006)은 한강의 괴생물체에 맞서 싸우는 가족의 이야기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10년간 한강 근처에 살았던 감독의 경험이 담겨 있다. 어린 시절 시커먼 물체가 교각을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던 게 시작이다. 2000년 주한 미군 소속 군무원이 한강에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한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개봉 첫 주 32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기록했고 칸 국제영화제에 감독 주간으로 초대받았다. ‘반미 영화냐’는 외신의 질문에 그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한국 정부를 비판한 영화”라고 밝혔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전무한 한국의 현실을 표현하고 싶었다고도 덧붙였다.

봉준호 감독의 특징 중 하나는 진지한 분위기에서 힘을 빼놓는 유머 코드다. 송경원 영화평론가는 이를 ‘기이한 명랑함’으로 정의한 바 있다. 봉준호 영화의 주요한 코드가 유머이고 그 웃음이 코미디 영화의 웃음과는 색을 달리한다고 말했다.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을 잡겠다며 목욕탕에서 무모증 환자를 뒤질 때, 〈괴물〉의 장례식장 신에서 모두가 울고 있는데 누군가 “차 좀 빼주세요”라고 할 때, 〈기생충〉에서 기택이 “아들아, 넌 계획이 다 있구나” 할 때도 그렇다. 아무리 심각해도, 절박해도 웃기는 포인트가 있다. 반전은 모자란 캐릭터와 만나며 더 힘을 얻는다.
봉 감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영화에는 못난 인물이 나온다. 이성재·배두나도 그렇고(〈플란다스의 개〉) 한심스러운 형사들(〈살인의 추억〉)도 그렇다. 〈괴물〉에도 평범한 수준을 밑도는 가족이 나와서 감당 안 되는 상황이나 사건에 노출된다. 상황은 심각한데 스크린 밖에서 볼 때는 웃긴 상황이다.”

〈마더〉(2009)만은 예외였다. 국민 어머니 김혜자에게서 불안정하고 히스테리한 면모를 발견한 그가 모성의 관념을 비틀어 만든 이 영화는 웃음기가 쏙 빠진 영화였다. 다른 작품과 공통점이 있다면 사회적 약자를 그린다는 점이다. 약자끼리 할퀴는 이야기다. 봉 감독은 줄곧 ‘루저’나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보여왔다. 그는 ‘불행은 부자에게 가지 않는다’는 말로 이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그릴 때 진정한 드라마가 나온다는 의미다.

기상이변으로 모든 게 얼어붙은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설국열차〉(2013)는 〈괴물〉 〈살인의 추억〉과 함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사회 저항 운동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 질주하는 꼬리 칸 지도자가 기차의 심장인 엔진 칸으로 질주한다. 실제로 혁명에 대한 이야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그는 “이런저런 상징을 고민하기보다 단순하고 통쾌한 느낌으로 감상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어 제작한 〈옥자〉(2017)도 그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투자처마다 ‘슈퍼 돼지’의 도살장 신을 거부했지만 넷플릭스가 유일하게 투자하면서도 간섭하지 않았다. 100%의 권한을 받았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과 자본주의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을 선택한 탓에 칸 영화제 경쟁 진출 당시 현지 반발에 부딪혔고 국내 멀티플렉스로부터 보이콧당하기도 했다.

20년째, 봉준호 감독은 남이 안 만드는 영화를 만들었다. 장르영화 감독이면서 장르를 ‘물 먹이는 사람’이었다. 송강호 배우도 〈기생충〉을 찍은 뒤 이 영화가 장르의 틀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혼합되고 변주됐다고 했다. 배우로서 “낯선 게 두렵기도 하지만 영화의 참신함이 두려움을 상쇄시킨다”라고 했다. ‘장르영화를 좇으면서도 그 규칙을 깨부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봉준호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고, ‘봉준호라는 장르’의 탄생 배경이다.

〈기생충〉으로 “1인치 자막”의 장벽을 완벽하게 넘어선 그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면 찍고, 1년에 1초도 운동을 하지 않고 먹으면서도 영화를 본’ 영화광이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거라는 그의 말은 전 세계 창작자에게 자극이 되었다. 이제 그 말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보다 봉준호 감독의 말로 기억될 것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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