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9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회담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REUTERS
10월19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회담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REUTERS

늦어도 올 연말까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역사적 수교를 통해 중동 평화의 발판을 마련하려던 게 미국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중대한 시련에 봉착했다. 미국이 올봄부터 공들여 성사 직전까지 간 양국의 수교 작업이 하마스 공격의 빌미가 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양측 충돌이 갈수록 격화해 자칫 중동전쟁으로 확대될 경우 양국 수교는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0월18일 이스라엘을 전격 방문해 확전 방지를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가자지구 병원 폭파 사건에 분노한 아랍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죄수 석방, 알아크사 모스크(회교 사원)에 대한 이스라엘 침략 저지,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 저지를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사우디 수교를 좌초시키고, 뒷전으로 밀린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시 부각하려는 게 이번 공격의 주목적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은 이스라엘·사우디 수교를 통해 이스라엘의 숙적인 이란은 물론 최근 중동에서 세력을 확장 중인 중국을 견제한다는 목표에 전념했다. 그 과정에서 중동 평화의 핵심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등한시했고, 미국의 이런 안일한 태도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하마스가 공격을 감행하기 불과 8일 전,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20년 동안 중동 지역이 지금처럼 잠잠한 적이 없었다”라며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양국 수교 협상을 위해 동분서주했고, 수교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나온 자신감의 발로였다. 하지만 하마스는 이스라엘 기습 공격을 통해 보란 듯이 그의 낙관론을 날려버렸다. 하마스 공격 일주일 뒤 미국 NBC 방송에 출연한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본인의 정세 판단이 왜 틀렸다고 보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지난 몇 년간 중동의 사태 발전 속에서 그런 발언을 한 것”이라며 자신의 발언을 옹호했다. 하마스 공격을 ‘이스라엘판 9·11 테러’로 간주한 이스라엘이 피의 보복에 나서면서 설리번의 말을 믿을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주민 60만명이 남아 있는 가자 북부 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할 경우 끔찍한 유혈 사태가 예상된다. 그럴 경우에 레바논에 근거지를 둔 이슬람 무장 조직 헤즈볼라, 나아가 두 무장단체의 배후 지원국인 이란까지 전쟁에 가세할 공산이 크다. 자칫 미국이 원치 않는 ‘중동전쟁’으로 확전될 수 있다. 미국이 이례적으로 이스라엘 인근 해역에 항공모함 전단을 배치한 것도 이란을 겨냥해서라는 분석이 많다.

이란이 하마스 공격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하마스의 재정·군사적 지원국인 이란도 관여 자체를 부인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은 하마스 공격 이튿날 하마스, 헤즈볼라 고위 인사들의 말을 인용해 “이란의 혁명수비대 측이 지난 8월 이후 하마스 측에 육·해·공 이스라엘 침공작전 수립을 도왔고, 10월2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만나 공격을 승인했다”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CNN 인터뷰에서 “이란이 하마스 공격을 사주했다는 직접 증거는 아직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미국 국무장관이 부인하는데도, 이스라엘·사우디 수교로 중동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이란이 끈질기게 수교를 반대해왔다는 점에서 이란 관여설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특히 하마스 공격 나흘 전 이란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를 꾀하는 나라들은 커다란 위험을 무릅쓸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의 군사고문인 야흐야 라힘 사파비는 하마스의 공격 직후 지지를 표시하고 지속적 지원까지 다짐했다.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이 중재해온 이스라엘·사우디 수교 협상은 중동 불안이라는 요소를 처음부터 잉태한 셈이다. 양국 수교 협상은 연내 타결이 가시권에 접어든 상태였다. 사우디는 수교 협상 과정에서 미국에 상호방위협정과 첨단무기·민수용 원자로 제공 등을 요구해 긍정적 답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우디는 협상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 서안지구 영토 확장 중단 등 이스라엘 극우 정부가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도 내걸었다. 다만 미국이 방위협정만 체결해주면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는 신축적 태도를 보였다.

2023년 2월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건설 중인 이스라엘 정착촌 모습.ⓒEPA
2023년 2월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건설 중인 이스라엘 정착촌 모습.ⓒEPA

하지만 하마스 공격 이후 사우디의 입지도 크게 줄어든 것 같다. 로이터 통신은 사우디 왕실의 핵심 소식통을 인용해 “향후 수교 협상이 재개되더라도 팔레스타인 문제가 종전보다 더 큰 우선순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했다. 네이더 하셰미 조지타운 대학 교수(중동정치)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전까지 미국 외교가에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있었는데, 공격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또다시 중동 지역은 물론 세계적 현안으로 떠올랐다”라고 말했다.

‘양국 해결론’을 근간으로 삼았지만

미국은 양국 수교가 이스라엘 영토에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떼어내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설한 뒤 이스라엘과 공존하는 방식을 일컫는 ‘양국 해결론(two-state solution)’을 대체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1993년 미국이 중재한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합의한 ‘양국 해결론’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으로 간주돼왔다. 이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이 이뤄지려면 이스라엘이 우선 서안지구 내 정착촌 철거 등 후속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오히려 그 반대로 나갔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1580억 달러를 지원한 미국도 이스라엘의 정착촌 강행을 막지 못했다. 현재 이스라엘 점령지인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국민 70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 지난 6월 이스라엘 극우 정부는 미국의 강력한 경고를 무시하고 주택 5700채를 서안지구에 새로 건설하기로 발표했다.

미국 역대 행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법으로 ‘양국 해결론’을 중동 정책의 근간으로 삼아왔지만 이스라엘의 강경한 태도로 벽에 부닥쳤다. 그 때문에 이 문제를 일단 접어둔 채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들 간의 관계 정상화 작업을 통해 중동 평화를 이룩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 인식 아래 전임 트럼프 행정부 당시인 2020년 8월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아랍에미리트 수교를 이끌어냈다. 이후 바레인, 수단, 모로코가 동참했다. 아브라함 협정에 이어 이스라엘·사우디 수교 중재 과정에서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뒷전으로 돌렸고, 결국 이게 화근이 됐다는 지적이다. 사우디 외교 전문가인 압둘라지즈 알가시안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형식의 국교 정상화도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의 적대감을 해소하지 못할 것이다. 이 문제 해결 없이 미국이 원하는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화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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