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에도 깎인 적 없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8월2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는 내년도 ‘주요 R&D 예산’을 전년 대비 3조4500억원 삭감한 21조5000억원으로 편성했다고 밝혔다. 국가 R&D 예산은 ‘주요 R&D’와 ‘일반 R&D’로 구분된다. 전체 R&D 예산 중 80%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R&D’ 예산이 전년 대비 13.9% 줄어든 것이다.

8월29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내년도 전체 예산안이 공개되자 파장은 더 커졌다. 기획재정부(기재부)는 내년도 예산 총지출 규모가 656조9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2.8%밖에 늘지 않았다며 자화자찬했다. 한국은행의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이 3.5%인 점을 감안하면, 실질 재정 지출은 줄어드는 셈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밀집한 대전 대덕연구단지 곳곳에 R&D 예산 삭감에 반발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시사IN 신선영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밀집한 대전 대덕연구단지 곳곳에 R&D 예산 삭감에 반발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시사IN 신선영

문제는 수많은 국가 예산 지출 항목 가운데 유독 R&D만 대폭 삭감되었다는 점이다. 국가 예산은 총 12가지 분야로 나뉜다. 기재부 발표에 따르면, 전년 대비 예산이 줄어드는 분야는 교육, R&D 그리고 일반·지방행정 세 분야에 불과하다. 일반·지방행정 분야가 전년 대비 0.8% 줄어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교육(-6.9%)과 전체 R&D(-16.6%, 일반 R&D 포함) 두 분야에서 예산을 대폭 줄여 재정지출 증가를 억누른 셈이다. 반면 보건·복지·고용(7.5%), SOC(4.6%) 분야는 전년 대비 예산이 대폭 확충됐다. 기재부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건전 재정’은 사실상 국가의 미래를 일구는 데 필요한 교육과 R&D 예산 삭감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매년 증가해왔던 국가 R&D 예산이 삭감되는 것은 1991년 이후 33년 만이다.

대통령 한마디에 줄어든 R&D 예산

국가 R&D 예산이 감축되리라는 전망은 지난 6월부터 나왔다. 발단은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다. 6월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라며 R&D 예산에 대한 재검토를 주문했다. 다음 날인 6월29일에는 감사원이 과기부를 비롯한 11개 기관에 감사관을 보내 현장감사(실지감사)를 실시하며 긴장감을 높였다.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온 대통령의 지시 사항은 이후 관료 집단에 중대한 매뉴얼로 작동한다. 당시 회의는 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고보조금, 저출산 대응, 지역 균형발전, R&D 분야 예산이 주된 논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보조금 분야는 6월4일 대통령실의 ‘민간단체 보조금 감사 결과’ 발표 당시부터 예산을 줄일 것으로 예상되었다(〈시사IN〉 제823호 ‘민간단체 보조금 논란,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기사 참조).

국가재정전략회의 직후 R&D 예산은 보조금 예산 이슈와 유사한 과정을 겪는다. 대통령의 발언 직후 감사원이 움직이고, 곧바로 여당에서 지원사격을 하는 식이다. 보조금 예산 문제가 불거졌을 때 국민의힘 내부에 시민단체선진화특별위원회가 꾸려지고 하태경 의원(위원장)이 정치적 이슈를 제기한 것처럼, R&D 예산 문제도 대통령 발언 이후인 7월20일 국민의힘 내부에 과학기술특별위원회(과기특위)가 만들어지며 정치적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6월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R&D 예산 재검토를 주문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6월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R&D 예산 재검토를 주문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8월16일에는 ‘R&D 비효율성 혁파를 위한 실무 당정협의회’에서 당내 의원들이 R&D 예산 문제를 직접 언급하고 나섰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여당 간사를 맡고 있는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지난 정부에서 R&D 예산이 4년 동안 10조원 이상 증가했다. 전반적인 비효율 등으로 소위 카르텔로 지목될 수 있는 사례들이 많이 나타났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번 예산 감축으로 인해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특히 타격을 입게 되었다. 출연연은 인문사회 분야를 전담하는 국무총리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NRC)’ 소속 24개 기관, 과학기술 분야를 전담하는 과기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소속 25개 기관이 있다. 이 가운데 과학기술 분야 출연연은 정부 전체 R&D 예산의 16.6%를 사용하는 핵심 기관이다(2022년 기준). 누리호 발사를 성공시킨 한국항공우주연구원처럼 민간에서 수행하기 어려운 연구와 기술개발을 국가 예산으로 전담한다.

그런 출연연들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6월28일)가 나온 직후 ‘예산 재편성’에 나섰다.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과기연전)에 따르면, 과기부 산하 출연연들은 대통령 발언 다음 날인 6월29일부터 주요 사업 예산을 20% 삭감한 예산 수정안을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원래 각 정부 기관은 내년도 예산안을 6월30일까지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마감을 이틀 앞둔 상태에서 대통령이 직접 예산 재편을 주문했고, 그동안 준비했던 예산안은 모두 백지화될 상황에 놓였다.

사업비뿐 아니라 기관 운영비도 삭감 대상이 되면서 연구시설을 가동시킬 돈도 대폭 줄여야 했다. 과기연전은 8월28일 “최근 급격히 인상된 전기·가스 요금 납부조차 어려워 대형 연구시설 가동을 멈추거나, 아예 전기 요금을 연체하여 내년 회계 예산으로 납부할 계획을 세우는 '좀비 연구기관'마저 생겨나고 있다”라며 현장 상황을 전했다.

‘돈 줄이기 소동’이 과학기술계 전체로 번지면서 주요 국가 시설의 운영이 중단되는 사태도 뒤따랐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운영하는 ‘글로벌 대용량 실험 데이터 허브센터(GSDC)’가 대표적이다. GSDC는 첨단 연구 장비에서 생산되는 대용량 데이터를 저장하고, 각종 실험 데이터를 공유 및 분석하는 일종의 연구 플랫폼이다. 연구자들이 이곳에 접속해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일본 고에너지가속기연구소(KEK) 등에서 수행한 연구 데이터를 활용하는 일종의 연구 허브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설비는 민간기업이나 개별 연구기관에서 구축하기 어려울 만큼 비싸고, 유지비도 많이 들기 때문에 정부 산하기관에서 전담 운영하며 연구 환경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 시설을 운영하는 데 드는 전기 요금(월평균 4억원)이 8월 들어 오르자, GSDC는 8월20일부터 전체 클러스터 장비 절반가량의 운영을 중단했다. 운영비 증액은커녕, 추후 예산마저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이다. 과학기술계에서는 GSDC의 가동 중단이 출연연에 대한 예산 감축 요구와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하고 있다.

출연연만큼이나 비상이 걸린 곳은 기초과학 연구 분야다. 과기부는 8월22일 ‘예산 배분·조정 결과’ 발표 당시 기초 연구 분야의 예산을 2023년 2조6000억원에서 2024년 2조4000억원으로 6.2%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기초 연구 분야는 ‘사업 과제’ 중심으로 구성되는 여타 R&D 분야와 달리 연구자 중심으로 편성되는 R&D 예산이다. 열악한 기초과학 분야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문재인 정부 동안 1조원 이상 증액된 예산이다. 수년간 확장 추세를 이어왔지만 올해는 감축을 피하지 못했다.

정부는 이 같은 급격한 예산 감축의 원인으로 ‘카르텔’을 지목하고 있다. 카르텔을 혁파하기 위해 돈줄을 조였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카르텔’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관계자마다 해석이 다르다. 이종호 과기부 장관은 8월22일 “예산과 제도를 혁신해 이권 카르텔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 R&D 비효율을 예방하고 대처하지 못한 점에 대해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R&D 예산을 허위로 따내는 부정부패 세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데 국민의힘에서는 ‘카르텔’에 대해 다소 다른 해석이 등장한다. 8월7일 정우성 국민의힘 과기특위 위원장(포항공대 교수)은 “카르텔이라는 용어가 실체 없이 널리 쓰이고 있어 폐해가 크다. 현장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카르텔의 실체는 비효율이다”라고 말했다. 주무부처 장관과 여당 특위 위원장의 해석이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실체가 모호한 지칭 때문에 현장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당사자인 연구자들은 모욕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연총)는 7월21일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연구자들을 카르텔의 주범인 양 핍박하는 강압적이고 일방적 정책을 중단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도 8월25일 “연구개발을 둘러싼 카르텔이 있다면 그것은 현장 연구자들이 아니라 부처 이기주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정부 관료, 전문성 없는 정치권과 일부 관변 과학기술자들이다”라며 카르텔이라는 말이 실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카르텔 혁파 외에 대통령의 주문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국제 공동연구를 늘려라’다. 국가재정전략회의 당시 윤 대통령은 “R&D 국제협력은 세계적 수준의 공동연구를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는 과기부의 정책 발표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8월22일 과기부는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을 함께 발표했는데, 이 혁신 방안의 첫 번째 항목이 바로 ‘해외 연구기관의 정부 R&D 참여 허용 등 글로벌 공동연구 제도 정비’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실제 출연연 등으로 전달된 메시지는 다소 과격하다. 당장 국제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올리라는 식이다. 7월18일 조승래 더불어민주당이 주최한 ‘R&D 예산 백지화, 무엇이 문제인가’ 간담회 자리에 참석한 한 출연연 관계자는 “(연구자들이) 국제 공동연구 제안서를 1시간 이내에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시스템 개혁 대신 들고나온 예산 감축

과학기술 분야 R&D 예산은 지난 정부에서 처음으로 30조원 시대를 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일본과의 수출규제 갈등 국면에서 R&D 예산이 대폭 확대됐다. 규모가 커진 만큼 집행 과정에서 잡음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과학기술계 내부에서는 R&D 예산 집행의 중추를 이루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의 개선을 요구해왔다. 1996년에 도입된 PBS 제도는 정부가 제시하는 연구과제(프로젝트)를 개별 연구기관이 수주해 예산을 확보하는 시스템이다. 프로젝트별로 예산이 집행되다 보니, 각 기관이 얼마나 연구과제를 수주하느냐에 따라 예산 확보가 달라졌다. 연구자 중심 투자가 뒷전이 되고 중복 연구 등 폐해도 발생했다. ‘R&D 과제 성공률 연평균 99%’도 이 같은 시스템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R&D 투자에서는 실패가 누적되는 경험이 중요하지만, PBS 시스템에서는 실패를 감당하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8월22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주요 R&D 예산 감축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8월22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주요 R&D 예산 감축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규모 예산 삭감보다 시스템이 만드는 비효율성 문제를 제도적으로 개선하는 게 우선이라는 비판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과학기술 출연연을 총괄하는 김복철 NST 이사장은 8월17일 기자회견에서 “예산 삭감의 방향이 맞지만 방식은 잘못되었다. PBS로 인해 큰 연구가 각각의 과제로 파편화되다 보니 연구자들이 일부 과제 한두 개만 맡아서 적당히 기준에 맞는 성과만 내는 문화가 형성됐다. 결과적으로 예산 낭비의 주범은 PBS다”라고 말했다. 연구자들이 주축을 이루는 과기연전도 7월17일 성명문을 발표하며 “진정 국가 R&D 미래 성장을 위해서는 연구원을 보따리 장사로 만드는 PBS 제도 폐지 등 출연연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 정책이 급선무다”라고 주장했다. 이종호 과기부 장관은 지난해 6월26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PBS 문제에 대해) 해법을 모색하겠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땅한 대책은 나오고 있지 않다. 이 장관이 8월22일 발표한 ‘제도혁신 방안’에도 PBS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R&D 예산 감소가 내년 총선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유권자들이 체감하는 예산을 늘리면서 건전재정 기조는 유지하기 위해 결국 만만한 R&D 예산을 깎았다는 의혹이다. 2024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저소득층 생계급여 확대, 노인 일자리 증대 등 복지 예산은 확대됐고, 충남 서산공항, 부산 가덕도 신공항, GTX-A 개통, 대구 도시철도 4호선 같은 지역 SOC 예산도 줄어들지 않았다. 기획재정부의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내년 예산에서 16.6% 감축하는 R&D 예산은 이후 6.4%(2025년), 7%(2026년), 7%(2027년)를 늘릴 방침이다. R&D 예산 집행 시스템이 문제라면 시간을 두고 예산 규모를 동결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당장’ 큰 폭으로 줄이고, 다시 규모를 늘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정부의 예산 감축을 국회 심의과정에서 변경하는 것은 가능할까? 변수는 ‘세수 결손’이다. 8월31일 기획재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1~7월 걷힌 국세는 지난해보다 43조4000억원 줄어든 217조6000억원에 불과하다. 법인세와 소득세가 줄어든 까닭이 컸다. 세수가 모자라기 때문에 정부 예산안이 국회에서 큰 폭으로 조정되기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적게 걷고 적게 쓴다. 현 정부의 정책 기조다. 그러나 이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분야의 곳간을 닫을 정도로 과감하지는 못했다. IMF 외환위기에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미래 먹거리라는 명분으로 줄곧 증가했던 R&D 예산은 처음으로 희생을 강요받고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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