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민지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는 제14회 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한국 작품 최초로 대상을 수상했다. ⓒ시사IN 박미소 
마민지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버블 패밀리〉는 제14회 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한국 작품 최초로 대상을 수상했다. ⓒ시사IN 박미소 

22년 전 이맘때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추석 연휴가 오기 전, 초등학교 5학년이던 마민지씨는 집에서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더니 곧이어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드렸다. 그전에도 “아빠를 찾는 사람들”이 찾아왔던 터라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집 안의 모든 가전제품에서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전기료 납부가 밀려 전기가 끊긴 것이었다. 어둑해진 집을 빠져나와 경비실과 마트, 공중전화 부스를 한 시간 넘게 돌아다니고 나서야 퇴근하는 엄마를 만났다. 서러움에 눈물이 터졌다.

그날이 왜 그토록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는지 모른다. 이제 30대가 된 마민지 감독에게 “처음 집이 망한 순간”으로 기억되는 장면이었다. 에세이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을 쓰면서 그날의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쓴다고 했더니 아버지 마풍락씨는 “영화로도 망신시키더니 책으로도 또 망신시킨다”라고 말했다. 가족사가 알려지는 것을 여전히 탐탁지 않아 했지만, 막상 책을 보여드리니 뿌듯해했다. 어린 시절 찍은 세 식구의 가족사진이 책 표지 곳곳에 앨범처럼 걸려 있다.

5년 전 마 감독은 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로 장편 데뷔를 했다. 부동산의 흥망성쇠와 함께한 가족의 일대기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제14회 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한국 작품 최초로 대상을 수상한다. “경제 붕괴 후 수천 명이 함께 겪었던 시련을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며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해 깊이 통찰하는 작품”이라는 심사평을 받았다. 영화의 첫 장면도 ‘망한 순간’에서 시작한다. 오래된 보일러가 고장 나서 ‘뜨신 물’이 나오지 않자 세 식구가 옥신각신한다. 카메라로 집 안을 비추는 딸에게 어머니가 핀잔을 준다. “엉망진창인데 뭘 찍냐.”

IMF 외환위기가 오기 전까지 ‘엉망진창’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카메라를 든 쪽은 어머니 노해숙씨였다. 당시 유행하던 캐논 AE-1 카메라며 최신형 소니 6㎜ 캠코더로 외동딸의 일상을 기록할 만큼 여유가 있었다. “최근 일은 기억하지 못해도 두세 살 때 기억이 생생하게 나는 걸 보면 어릴 적 엄마가 보여주던 앨범의 영향이 클 거예요.” 강남을 중심으로 고층 건물이 올라가던 1980년대, 울산에서 상경한 마 감독의 부모는 도시개발의 붐을 타고 ‘중산층’ 대열에 합류한다. 소위 ‘집장사’라 불리던 소규모 건설업을 했는데 3저 호황과 올림픽 특수에 힘입어 상승가도를 달렸다. 세 식구가 살던 잠실 46평대 아파트는 수백만 원짜리 고급 가구로 채워졌고,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해외여행과 워커힐호텔 피자, 콘도미니엄 등이 사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족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캠코더 속 영상은 1997년에 멈춰 있다. 고급 빌라단지를 짓기 위해 토지 매매가만 24억원인 땅을 구매하느라 무리한 대출을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2년 뒤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욕심부리는 만큼 성취하는(마풍락)” “내리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못했던(노해숙)”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살던 집에서 쫓기듯 나온 가족은 같은 아파트의 더 좁은 평수로, 인근 상가주택으로 이사해야 했다. 집이 망해도 가구는 못 버렸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리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중산층 대열에서 내려오는 건 순식간이었다고 마 감독은 회상한다. 가정주부였던 어머니가 가족을 부양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기획부동산 텔레마케터로 일하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동안, 아버지는 부동산 투자처를 찾으며 역전을 꿈꿨다. 고급 인테리어를 보며 건축가를 꿈꾸던 중산층 가족의 아파트 키드는 이제 생활비와 학자금 대출로 씨름하는 ‘IMF 키즈’가 되어 있었다. 가난한 형편을 숨기고 싶었고, 부동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경매 딱지와 빚 독촉장을 보고 싶지 않아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왔으나, 치솟는 집값에 자취방을 전전한다.

1980년대 울산에서 상경한 마 감독의 부모는 도시개발의 붐을 타고 ‘중산층’ 대열에 합류한다. ⓒ출판사 클
1980년대 울산에서 상경한 마 감독의 부모는 도시개발의 붐을 타고 ‘중산층’ 대열에 합류한다. ⓒ출판사 클

부동산이 도대체 뭐길래

그런 가족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 건 영화를 전공하면서다. 2013년 어느 날 종로 거리를 걷고 있는 아버지를 우연히 발견했다. 안부 연락은 고사하고 예전 전화번호만 있을 정도로 서먹해진 사이였다. 아버지는 새로운 개발 정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처음 두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고 마 감독은 말한다. “부모의 삶을 그저 이해해보고 싶었어요. IMF 외환위기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부동산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잊어버릴 만하면 두 사람의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오는지.” 무엇보다 가족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다른 작업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동과 송파의 도시개발사를 듣고 싶다고 하자 부모님은 반가움 반, 어색함 반으로 카메라 앞에 앉았다.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통해 수년간 밀렸던 대화를 몰아서 했다.

부모의 생애사는 한국의 도시개발사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었다. 시대의 맥락을 비춰보면서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도 차츰 누그러졌다. “집값이 내린다고 하면 팔고 집값이 오른다고 하면 사야 한다고 해요. 사람들을 다같이 움직이도록 하는 경제적 분위기가 존재하는 거죠. 그 버블이 지나가고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집이란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어요.” 땅에 대한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는 부모님을 시종일관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으나 ‘나라면 달랐을까’ 하고 감독은 자문해봤다. 범인은 없고 피해자만 가득한 IMF 키즈의 자전적 이야기는 숱한 공감을 불러 모았다. ‘우리 집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며 공감하는 관객이 많았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어머니가 많이 울었다.

다큐멘터리와 에세이 사이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영화가 개봉했을 때만 해도 ‘패닉 바잉’의 시대였는데, 지금은 ‘전세 사기’와 ‘순살 아파트’로 이름만 바뀐 채 부동산 지옥도가 계속되고 있다. 주거복지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장이 열리길 바랐는데, 최근엔 자신의 책이 부동산 투자 방법론으로 소개되는 걸 알고 놀랐다. 이 사례처럼 도시개발계획과 맞물려 투자를 노려야 한다는 취지였다. “부동산이나 주거 문제가 기삿거리로 치부돼요.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사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야기거든요.” 부동산 투기에 뛰어든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내 집값 하락은 용인하지 않는, 이상하고 평범한 욕망이 한국 사회 기저에 흐르고 있다고 마 감독은 말했다.

한 사람의 생애를 깊이 이해하는 것

개인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었다. 지난해 4월29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코로나19 위중증 환자로 병원에 입원한 뒤 5개월 만이었다. 강남의 텔레마케터들 사이에 집단감염이 이어지던 시기다. 어머니가 혼자 감당하고 있던 가장의 자리를 본인이 물려받게 된 것 같다고 마 감독은 말한다. 책을 쓰는 과정이 애도의 시간이었다. 유품을 정리하던 중 어머니가 보여주지 않았던 사진 앨범 한 권이 통째로 발견되면서 ‘부동산 가족’에 대한 탐구가 이어질 수 있었다. ‘기록광’이던 성격답게 새로 발견된 수첩이며 가계부, 설계 도면을 딸은 아직도 다 살펴보지 못했다.

가족이 그토록 원하던 국민임대주택에 입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다. 주민 텃밭을 신청해보기도 하고 식물을 더 많이 키우기 시작한 엄마의 변화를 보며 딸은 주거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누구나 만족하면서 살 수 있었다. “집이 쾌적하고 깨끗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면 부모님 집에 더 자주 놀러갔을까? 가진 것도 없으면서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것은 불온한 욕심일까?”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땅이 팔렸다’거나 ‘주민 텃밭이 당첨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의식은 없었지만 아마 좋아하셨을 거예요.” 엄마가 산 6인용 식탁을 이제는 버려야겠다는 다짐으로 책은 끝나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2019년 8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주택 재건축 현장에서 철거공사가 진행 중이다. ⓒ시사IN 이명익
2019년 8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주택 재건축 현장에서 철거공사가 진행 중이다. ⓒ시사IN 이명익

전화번호도 잘 몰랐던 아버지와는 하루에 서너 번씩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마 감독의 폰에 ‘영감탱’으로 저장되어 있다. 마 감독이 대표로 있는 독립영화 제작사의 이름은 ‘쌍마픽처스’다. 1980년대 강남에 집을 짓던 아버지가 자신과 딸의 성을 본떠 ‘쌍마빌딩’이라고 지었다는 일화를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하며 알게 되었다. “그 단어를 잃어버리지 않고 싶어서”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요즘 쌍마픽처스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미투 운동' 이후 어떻게 회복해가고 있는지를 카메라로 담고 있다. 3년 동안 촬영한 작업물을 내년까지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연극도 기록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질병과 죽음, 돌봄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코로나19로 보호자 대기실이 없어진 탓에 다들 주차장에 앉아 울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든 생각이다. “응급콜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캔커피를 마시며 잠을 견뎠거든요. 코로나19로 수만 명이 사망했는데, 왜 다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요?” 그는 코로나19 유가족들과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IMF부터 코로나19까지 미시사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가장 ‘정확하다’고 마민지 감독은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카메라 장비를 다시 어깨에 둘러멨다. 발달장애인 당사자 연극 작업을 촬영하러 가는 길이었다. “주류 담론에서 미끄러지는 이야기들, 그래서 가시화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계속 보게 되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생애를 깊게 이해하는 것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비디오 카메라와 쌍마픽처스, 부모가 물려준 또 다른 유산이 딸의 이야기로 전승되고 있다. 가족이 망한 이야기가 사실은 망하지 않은 이유다.

마민지 감독은 다큐멘터리 를 촬영하면서 가족사진을 다시 찍었다. ⓒ출판사 클
마민지 감독은 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를 촬영하면서 가족사진을 다시 찍었다. ⓒ출판사 클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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