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케인이 20년 가까이 몸담은 토트넘 홋스퍼를 떠났다. 케인은 토트넘 팬들이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춘 선수였다. 연고지인 런던 출생으로 2004년 토트넘 유스팀에 입단해 성장했고,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간판 스트라이커이자 주장으로 활약했다. 로컬 보이, 성골 유스, 주장, 최고의 골잡이라는 수식어는 팬들의 자부심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케인의 축구 인생은 미완으로 여겨졌다. EPL 득점왕 3회, 월드컵 득점왕, 잉글랜드 대표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우고도 우승 트로피 한번 들어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올 시즌 독일 명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면서 토트넘에서 우승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시인한 셈이 됐다.

지난해 5월15일 토트넘 홋스퍼의 해리 케인이 골을 넣은 후 팀 동료 손흥민(오른쪽)과 기뻐하고 있다.ⓒAFP PHOTO
지난해 5월15일 토트넘 홋스퍼의 해리 케인이 골을 넣은 후 팀 동료 손흥민(오른쪽)과 기뻐하고 있다.ⓒAFP PHOTO

토트넘이 21세기에 이룬 우승은 2008년 리그컵이 유일하다. 뮌헨은 최근 10년 동안에만 분데스리가 우승(10회), 챔피언스리그 우승(2회) 등 다양한 무대에서 총 23개 트로피를 휩쓸었다. 이번 시즌에도 맨체스터 시티에 이어 챔피언스리그 우승 배당률 2위를 기록할 만큼 전력이 탄탄하다. 반면 토트넘은 지난 시즌 리그 8위에 그쳤다. 챔피언스리그는 물론 유로파리그, 유로파 콘퍼런스 등 어떤 클럽 대항전에도 나서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팀의 방향성과 정책의 문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토트넘은 트로피보다 비즈니스를 우선시하는 구단으로 유명하다. 그 중심에는 대니얼 레비 회장이 있다. 2001년부터 팀의 최고경영자를 맡은 그는 탁월한 사업 감각을 발휘하며 토트넘을 EPL ‘빅 6’ 자리에 올려놨다. 3만6000석 규모의 기존 홈구장 화이트 하트레인 대신 6만3000석 규모의 최신식 구장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을 건립해 수익성을 높인 게 대표적이다.

문제는 축구의 핵심인 선수단 운영이었다. 다른 EPL 팀들과 달리 토트넘은 구단주가 금전 지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레비 회장에게 경영 전권을 부여했다. 레비 회장은 선수 판매와 상업 수익을 통해 영입을 책임진다. 경쟁 구단보다 선수단 구성이나 규모 면에서 뒤처지는 방식이다.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리버풀, 아스널 등 기존 강호는 물론이고 뉴캐슬 유나이티드, 애스턴 빌라 등 중동의 대부호들이 인수한 중위권 팀에도 씀씀이에서 크게 밀린다.

‘쩐의 전쟁’ 양상이 된 유럽 축구에서 토트넘과 레비 회장이 추구하는 효율적인 경영은 선수단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케인을 뮌헨으로 보내면서 토트넘은 1480억원을 벌었다. 팀 역대 최고 이적료 수익이지만, 이것이 재투자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 토트넘 팬은 없다. 케인 이적 전후 토트넘 팬들은 SNS에서 ‘레비 아웃’을 외친다. 차라리 중동 부호에게 팀이 인수되길 바란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2라운드에서 주장으로 나선 손흥민은 2선 지원을 맡았고, 팀은 2대 0으로 첫 승을 올렸다. ⓒAFP

‘유리천장’ 깨고 주장 맡은 손흥민

케인이 트로피를 찾아 떠나면서 ‘손케(손흥민-케인) 듀오’도 해체됐다. 둘은 EPL 최고의 콤비였다. 케인은 스트라이커이지만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연계 능력을 지녔고 손흥민은 상대가 쫓기 힘든 주력과 최고의 슈팅 기술을 지닌 선수다. 2022-2023 시즌까지 둘이 합작한 득점은 47골로 EPL 역대 최다 기록이다.

손케 듀오는 상호 보완적이었다. 상대 수비가 한 명을 집중적으로 마크하면 다른 한 명이 자유로워졌다. 2020-2021시즌에는 케인이 23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손흥민은 17골로 득점 4위였다. 다음 시즌에는 손흥민이 23골로 득점왕을 차지했고, 케인은 17골을 기록했다. 7시즌 연속 나란히 두 자릿수 득점을 했다. 경쟁 팀보다 전력 보강이 약한 토트넘이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은 둘의 활약 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케인은 떠났다. 8년간 주장을 맡아온 골키퍼 위고 요리스도 토트넘과 결별을 앞두고 있다. 올 시즌 새로 부임한 앙게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주장단을 새로 구성해야 했다. 손흥민을 중심으로 팀 분위기를 일신하기로 했다. 토트넘과 손흥민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손흥민은 팬들에게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간판스타다. 그러나 리더 그룹은 아니었다. 8년째 토트넘 소속으로 뛰면서 주장과 복수의 부주장으로 구성되는 주장단에 한 번도 든 적이 없다.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었다. 토트넘의 주장단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 선수로만 수년째 구성됐다. 다른 구단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선수는 팀의 에이스라도 리더십으로 전면에 서지 못한다. 과거 박지성이 퀸스파크레인저스(QPR) 시절 주장을 맡았을 때도 보이지 않는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QPR은 승격 후 선수단 교체를 큰 폭으로 단행한 팀이었고 박지성 역시 새로 합류한 선수였다. 이름값으로는 팀 내 최고였지만 이미 팀 분위기를 형성한 유럽 선수들이 아시아인 주장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결정은 전격적이었다. 그는 선수단 내 누구에게도 미리 언질을 주지 않고 전체 미팅에서 손흥민을 새로운 주장으로 발표했다. 구단 안팎으로 많은 이들이 놀란 선택이었다. 이번 여름 토트넘에 부임한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걸어온 길을 보면 손흥민을 선택한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으로 그리스에서 태어나 튀르키예계 가정에서 성장했고, 스코틀랜드에서 셀틱 감독으로 성공시대를 연 지도자다. 그 역시 변방에서 온 지도자이기에 기존의 암묵적 규범을 깨고 손흥민을 새 시대의 리더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감독의 지명을 받은 손흥민은 선수들 앞에 서서 유창한 영어로 팀의 방향과 새 시즌에 대한 계획 등을 연설했다. 그는 2018년부터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왔다.

시즌 개막전인 브렌트퍼드 원정에서 토트넘은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경기 전 둥글게 스크럼을 짜고 힘을 모으는 의식을 자기 진영 중앙이 아닌 팬들 가까이에서 진행했다. 원정까지 함께한 팬 앞에서 하자는 손흥민의 제안에 선수들이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에서도 손흥민은 동료들을 지원하는 역할이 돋보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2라운드에서 손흥민은 2선 지원을 맡았고, 팀은 2대 0으로 첫 승을 올렸다.

현지 언론들은 손흥민의 포용력과 희생정신을 주목하고 있다. 지난 시즌부터 긴 부진에 빠진 브라질 국가대표 공격수 히샤를리송이 대대적 비난에 부딪히자 손흥민은 취재진 앞에서 그를 변호하며 감쌌다. “중앙에서 성실하고 투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득점은 곧 따라올 것이다.” 토트넘 팬들의 성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손흥민 역시 트로피를 원한다면 토트넘을 떠나는 게 맞지 않느냐는 주변의 얘기를 일찌감치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2021년 여름 4년 재계약을 택했다. “가족과 같은 이 팀의 분위기가 좋다. 토트넘을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8년 동안 토트넘에서 쌓아온 신뢰와 존중은 올 시즌 주장이라는 새로운 역할로 꽃피고 있다. 트로피라는 성과 이상의 가치에 대한 도전과 함께 손흥민의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기자명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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