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6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칠레와 평가전을 치른 대전월드컵경기장. 고 유상철 선수를 추모하는 카드섹션이 진행됐다. ⓒ연합뉴스

6월6일 대전월드컵경기장. 오후 8시6분이 되자 관중석에서 대형 카드섹션이 펼쳐졌다. 한쪽 골대 뒤를 가득 채운 붉은색 물결 위로 ‘기억해 YOU’라는 하얀색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상철”을 연호하는 함성이 관중석을 돌고 돌았다. 하루 뒤인 6월7일은 유상철이 췌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지 1년 되는 날이었다. 6번은 유상철의 현역 시절 등번호, YOU는 유상철을 지칭했다.

6월 친선경기 4연전을 기획한 대한축구협회는 6월2일 브라질전을 시작으로 네 차례 A매치에서 2002 한·일 월드컵 20주년을 기념하는 카드섹션을 진행했다. 6월6일 칠레와의 평가전은 그 두 번째 경기로, 유상철과 3년 전 유명을 달리한 핌 베어벡 2002년 대표팀 수석코치를 비롯해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하다 세상을 떠난 축구인들을 추모하는 뜻을 담았다. 때맞춰 방한한 거스 히딩크 감독의 얼굴도 관중석에서 보였다. 박지성·이영표 등 현역에서 은퇴한 월드컵 영웅들과 함께였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함성은 순식간에 모두의 기억을 2002년 그 자리로 돌려놓았다. 대전월드컵경기장은 한국 축구사상 가장 극적이고 충격적인 역사를 만들어낸 곳이었다. 안정환의 헤더가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빗장 수비)를 부순 날, 한국 축구는 기적을 품게 됐다.

최초의 ‘완전체’ 멀티플레이어, 유상철

2002년 월드컵 본선을 앞둔 한국 대표팀의 불안 요소는 부상이었다. 특히 주장이자 수비의 핵심이던 홍명보의 부상은 큰 걱정거리였다. 16강을 목표로 두고 있던 대회의 성공 여부가 의심스러워지는 분위기였다. 그때 히딩크 감독은 이런 말로 우려를 잠재웠다. “유상철이 좌우 풀백은 물론 중앙 수비수까지, 세 자리를 소화할 수 있다.” 잠깐, 좌우 풀백을 각각 한 자리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당시 유상철의 본업은 미드필더였다.

유상철은 히딩크 체제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한 선수였다. 엔트리상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었지만 상황에 따라 여러 자리를 오갔다. 미드필더인 동시에 공격수였고, 때로는 수비수였다. 체력과 활동량은 물론 축구 지능과 균형감, 슈팅력까지 두루 갖춘 선수였다. 요컨대 현대 축구가 사랑하는 멀티플레이어이자 한국 축구에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한 미드필더였다. 2002년 이전, 멀티플레이어에 대한 인식은 박했다.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선수를 더 신뢰하던 시절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선수들을 중용했다. 유상철이 본선 전 경기를 풀타임 소화한 데서 감독의 신뢰가 드러난다. 유상철은 4강 신화의 서막인 폴란드전에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골을 넣었고,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다 홍명보를 대신해 센터백 역할을 수행했다.

16강전은 한국 축구사에서 전술적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일전이었다. 당시 한국은 후반 중반까지 이탈리아에 0-1로 끌려갔다. 히딩크 감독은 교체 카드 세 장을 모두 공격수 투입에 썼다. 김태영 대신 황선홍, 김남일 대신 이천수, 홍명보 대신 차두리가 차례로 출전 기회를 얻었다. 후반 중반 이후 그라운드에 선 우리 공격수만 다섯이었다. 결국 후반 43분 설기현이 동점골을 넣었다. 연장전에서 안정환이 역전골을 터뜨리며 8강행이라는 기적을 현실세계로 가져왔다. 안정환의 골든골(득점 즉시 승부가 갈리고 경기가 중단됨)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한 탓에 간과하기 쉽지만, 공격적인 선수 교체에도 한국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던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센터백으로 내려선 유상철의 수비 센스와 리더십 덕분이었다. 히딩크의 승부수는 멀티플레이어를 통한 전술적 다양성을 확보했기에 가능한 카드였다.

2002년 월드컵에서 전 경기를 뛰었던 유상철. ⓒ사진공동취재단

세계가 놀란 대한민국의 거리 응원

그 시절을 기억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2002년을 이야기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6월의 기억은 동일할 것이다. 축구가 주는 일치감과 환희가 더 이상 축구만의 것이 아니었던 계절. 폴란드를 시작으로 독일을 만나기 전까지, 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의 강호를 차례로 꺾는 대이변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수석코치 핌 베어벡은 “이런 대진은 일부러 짜려고 해도 짜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경기장에서, 호프집에서, 교회와 사찰에서, 결혼식장 혹은 장례식장에서, 심지어 분만실에서까지 ‘공용어’는 축구였다. 압권은 거리 응원이었다.

축구대표팀 서포터스 ‘붉은악마’는 2002 한·일 월드컵을 전 국민의 축제로 만들기 위해 거리 응원을 계획했다. 거점은 서울 광화문과 서울시청 광장. 이유는 단순했다. 옥외 전광판을 보유한 빌딩이 있고, 그래서 중계 화면을 함께 볼 수 있으며, 많은 인원이 모이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붉은악마가 주도했지만 나중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한민국!’을 외쳤다. TV 중계 화면 속의 국호가 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뀐 시점도 이때다. 한국 경기가 있을 때마다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 모여드는 인원이 늘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 모인 인원은 180만명이었다. 경기를 제대로 보지 못해도 응원 그 자체가 축제였다. 골이 터질 때면 생면부지의 사람과 얼싸안거나 손바닥을 마주쳤다.

인터넷에서 2002년 거리 응원과 관련된 추억을 검색해보면 무용담(?)이 쏟아진다. “서울시청에서 8강 승부차기가 끝난 뒤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걷다 보니 서초구청이었다”라는 사연은 흔한 축에 속한다. “진짜 해방이 이루어졌다”라는 어느 어르신의 감격에는 질곡의 역사가 스친다. 부정을 타도하기 위해 모였던 광장이 축제의 장이 된 건 실제로 광복 이후 처음이었다. 2002년의 거리 응원을 시작으로 촛불집회와 탄핵 정국을 거치기까지 광장을 떠올려보면, 공간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더 선명해진다. 태극기에 대한 금기도 깨졌다. 온 국민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외울 정도로 신성시하던 태극기는 2002년을 계기로 ‘패션’이 되었다. 태극기를 머리에 쓰거나 망토처럼 어깨에 걸치는 것은 예사. 치마처럼 두르거나 크롭티처럼 잘라 입기도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태극기가 일상이 된 사람들도 있다.

한편 국제축구연맹(FIFA)은 2002년 붉게 물든 서울시청 앞 광장을 보고 큰 영감을 얻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확인하자 재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FIFA는 월드컵과 관련한 거의 모든 형태의 상업 및 마케팅 권리를 독점적·배타적으로 소유한다. 2006 독일 월드컵부터 대회 개최 도시마다 거리 응원 구역인 ‘팬존(Fan Zone)’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팬들은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즐긴다. 대형 스크린을 통한 중계를 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응원한다. FIFA를 후원하는 공식 파트너사들만 팬존에 부스를 설치해 마케팅을 펼칠 수 있다.

새로운 세대의 월드컵이 오고 있다

한국 축구사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2002년 전과 후로 구분된다. 클럽 시스템 같은 인프라는 말할 것도 없고 유소년 육성 철학 같은 무형의 유산도 남았다. 물론 모든 유산이 찬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축구 콘텐츠는 여전히 2002년에 머물러 있다. 대표팀의 성공을 떠받치는 구조 아래 K리그가 있다는 사실은 20년째 관심 밖이다. 대표팀 성적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졌다. 이렇게 말하는 축구인도 있다. “2002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한국의 승리 없는 월드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2002년 이전 ‘본선 무승’ 팀이었던 한국의 도전사를 떠올리면, 4강 신화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이후 대표팀과 감독들은 2002년의 기적과 비교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 축구의 경계는 확장되어왔다. 히딩크를 따라 박지성과 이영표가 네덜란드 프로축구 에레디비지에 도전했고, 따로 또 같이 유럽 성공기를 새로 썼다. 박지성으로 대표되는 2002 세대의 유럽 진출은 다음 세대에게 목표이자 꿈이었다.

손흥민 선수가 6월6일 칠레전에서 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연합뉴스

2002 월드컵을 보고 자란 소년들은 월드컵 원정 첫 16강(2010년), 올림픽 동메달(2012년), 아시안게임 금메달(2014·2018년), U-20 월드컵 준우승(2019년)이라는 역사의 주역이 됐다. 기성용과 이청용, 구자철, 이승우, 백승호, 이강인 등 여러 선수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성장 서사를 만들어낸 이름은 손흥민이다. 그 역시 2002년 월드컵을 경험하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대한축구협회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7세에 독일로 건너가 30세에 축구 본류 유럽에서 정점을 찍었다. 아시아 선수 최초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이 되는 현실은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다’고 외치던 시절에도 상상 못한 시나리오였다.

손흥민이 선봉에 선 지금의 대표팀은 ‘팀 2002’와 비슷한 나이다. 2002년 당시 월드컵 대표팀 평균 나이는 27.3세였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6월에 소집한 대표팀의 평균 나이도 27.3세다. 2002년과 다른 점이라면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유럽 리그에서 뛴 선수들이 많다는 것. 손흥민 외에 김민재(페네르바체), 황의조(지롱댕 보르도), 황희찬(울버햄프턴), 정우영(SC 프라이부르크) 등이 주전급으로 활약하고 있다. 해외 무대에서 직접 부딪치며 공략법과 생존법을 터득한 선수들은 이제 나름의 자신감으로 세계와 맞선다. 지난 6월2일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확인한 것은 세계 1위 팀에 밀릴지언정 주눅 들지 않는 기운이었다. 새로운 세대가 월드컵을 준비하는 방식이다. 2002년 ‘가능성’으로 시작된 기적은 어쩌면 이렇게 완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자명 배진경 (전 ⟨포포투⟩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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