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터시티의 제이미 바디. ⓒAP Photo

잉글랜드 프로축구 선수 제이미 바디(레스터시티)는 늦깎이 스타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하부 리그를 전전하다 27세에 1부 리그(프리미어리그)에 데뷔했다. 득점력으로 입소문을 탄 뒤 2부 리그 레스터시티에 입단해 팀과 함께 승격했다. 2015-2016시즌 소속 팀의 첫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일군 뒤 2018년 잉글랜드 대표로 월드컵 무대를 누볐다. 2019-2020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고령 득점왕 타이틀까지 얻었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 바디의 이야기는 자신만의 속도로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희망을 준다. 늦가을 산기슭이나 들에서 만나는 꽃처럼 정취를 풍긴다. 봄에 앞다투어 피는 꽃을 시샘하지 않고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미덕이다.

일찌감치 철들어야 했던 선수도 있다. 이름은 웨슬리 모라에스. 브라질 태생으로 인생 초기부터 난제를 연속으로 만난 공격수다.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3㎝ 짧았다. 아홉 살에는 아버지를 뇌종양으로 잃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지만 축구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열네 살에 여자친구가 임신하면서 아버지가 되었고(!), 2년 후에는 둘째 아이까지 생겼다. 직접 생계를 꾸려야 했다. 나사 공장에서 일하며 학교를 다니고 축구 연습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침에는 공장에 나가고, 오후에는 훈련을 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했다”.

고단한 삶에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건 16세에 이타부나에서 테스트 기회를 얻으면서다. 곧 잠재력을 입증하며 유럽으로 향한다. 슬로바키아(트렌친)-벨기에(클럽 브뤼헤)를 거쳐 잉글랜드 애스턴 빌라에 입단할 때가 2019년, 그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당시 빌라가 지불한 이적료는 2200만 파운드. 구단 역대 최고액 이적료였다. 빌라 이적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인생의 승리자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고난을 극복하는 이들의 성장은 세상이 사랑하는 이야기의 단골 주제다. 축구 세상에는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선수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짐바브웨 출신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는 로지디아 내전에 군인으로 참가했다. 살상 현장을 겪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중에도 축구를 놓지 않았다. “전쟁은 내게 오늘을 살라고 가르쳤다.” 결국 리버풀과 함께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골키퍼가 되었다.

사라예보 태생의 마리오 스타니치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탈출한 전쟁 난민이었다. 그리고 1998월드컵에서 새로운 조국 크로아티아에 사상 첫 월드컵 골을 안겼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에서 많은 걸 경험했다. 이후로 축구에서 나를 흔들 수 있는 건 없었다. 인생에선 더 나쁜 일도 많으니까.”

또 다른 짐바브웨 선수 하드라이프 즈비레키위는 어떤가. 이름마저 ‘고달픈 인생(Hardlife)’인데, 2019년 승용차 전복 사고로 왼손을 잃고 대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꾸준한 재활 끝에 2020년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내가 다시 그라운드에 선다면, 부정적인 현실에 맞서 극복하려는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될 거로 믿었다.”

전쟁이나 교통사고처럼 생사존망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인생의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한국에서도 이어진다. 포항 스틸러스 수비수 박승욱은 연습생 신화의 주인공이다. 불과 1년 전 그는 내셔널리그 부산교통공사에서 뛰던 세미프로 신분이었다. 포항과 연습경기에서 김기동 감독의 눈에 들어 2021년 하반기에 프로 선수가 되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센터백 3번 옵션 정도”로 염두에 둔 백업 자원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잠재력이 풍부한 선수였다. 발이 빠른 데다 압박 타이밍과 거리 조절 능력이 좋았다. “상대와 붙을 때 돌아설 공간을 주는 게 아니라 딱 붙어서 밀어내는 힘이 무척 괜찮았다.” 감독의 설명이다. 지금은 센터백, 측면 수비수, 중앙 미드필더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 수비수다. 심지어 골도 넣었다. 김기동 감독은 “경기에서 보면 팀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걸 다 쥐어짜내서 뛰는 느낌을 받는다”라며 변치 않는 자세를 칭찬했다.

6월21일 제주 유나이티드는 서울중랑축구단 출신 김범수를 영입했다. ⓒ제주 유나이티드 제공

7부 리그, 조기축구회 거쳐 K리그 1으로

박승욱은 7월13일 토트넘 홋스퍼와 친선경기를 치른 ‘팀 K리그’ 일원으로 뽑혔다. 선발 출전해 히샬리송, 모우라 등이 주도한 토트넘을 상대했다. K리그 1을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성장한 그는 “힘들지만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가장 최근 제이미 바디를 소환한 선수는 제주 유나이티드의 김범수다. 하부 리그를 거쳐 최상위 리그까지 올라온 과정이 꼭 닮았다. 7부 리그에서 5부 리그, 조기축구회, 4부 리그를 거쳐 K리그 1을 누비는 공격수가 됐다.

김범수의 축구 이력은 K리그 1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특이하다. 지난 6월 김범수 영입을 확정하고 보도자료를 준비하던 구단 관계자들까지 선수 정보를 찾을 수 없어서 당황했을 정도다. 김범수는 고교 시절까지 ‘제이썬(J. SUN)’이라는 클럽에서 축구를 했다. 쉽게 말하면 동호인 축구다. 제이썬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한 백록기 대회 관계자 등에 따르면 스피드로 입소문을 탔다. ‘얘, 누구야?’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고. 그러나 호기심이 다른 관심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김범수는 고교 졸업 후 갈 곳이 없어 입대를 했다. 제5기갑여단에서 장갑차를 모는 현역병으로 복무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시절에도 축구를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엘리트 선수들에 비해 기본기가 부족했던 그는 기본기 연마와 함께 피지컬 강화 훈련에 집중했다고 한다. 전역 후 동호회 수준의 축구팀에서 뛰면서도 단계적으로 올라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잃지 않았다. K3리그의 양주시민축구단과 김포 FC 입단 테스트에도 참가했다. 결과는 낙방. 한 축구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김범수의 특장점은 스피드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김범수를 눈여겨보면서도 ‘스피드밖에 없네’라고 판단한다. 감독들은 소위 ‘육각체 선수(모든 능력을 골고루 갖춘 선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제주의 남기일 감독은 달랐다. 모두가 비슷한 덕목을 갖춘 무대에서 뾰족한 장기 하나를 살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무기가 되리라 판단했다. 몇 차례 연습경기에서 김범수의 움직임을 보고 영입을 결정했다. 제주는 라인을 끌어올려 상대를 압박하는 팀인데, 그러다 보니 전환 플레이에 따른 체력 부담이 있었다. 90분 동안 기동성을 유지하려면 김범수 같은 선수가 필요했다. 그의 스피드를 활용해 초반부터 상대를 흔들어놓으면 뒤에 들어가는 선수들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김범수에게 주어지는 출전 시간은 약 30분. 효과가 꽤 좋다. 김범수는 6월21일 대구를 상대로 K리그 1 데뷔를 신고했는데, 상대 수비수 정태욱이 그를 막느라 애먹었다. 세 경기 만인 지난 7월2일 서울전에서는 득점에도 성공했다. 김범수는 “축구를 하면서 꿈을 꾸는 이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다시 바디 이야기로 돌아가면, 모든 선수에게는 자신만의 길이 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속도로 걷지 않는다. 그 덕에 오늘도 축구 세상은 좀 더 다채롭고 근사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기자명 배진경 (전 ⟨포포투⟩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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