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미트윌란 조규성. ⓒEPA
FC 미트윌란 조규성. ⓒEPA

올여름 한국 축구에는 이례적 행보가 두드러졌다. K리거 7명이 유럽으로 직행했다. K리거 출신 유럽파 탄생으로는 역대 최다 숫자다. 지난 6월 성남 FC의 김지수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브렌트포드로 이적하며 신호탄을 쐈다. 월드컵 스타 조규성도 덴마크의 강호 미트윌란으로 향했다. 강원 FC의 양현준, 부산아이파크의 권혁규가 나란히 스코틀랜드의 절대 강자 셀틱 FC로 이적했다. 8월 말에도 유럽파가 잇달아 탄생했다. 대전하나시티즌의 배준호가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 스토크시티로, FC 서울의 이한범이 미트윌란으로 각각 떠났다. 수원삼성의 황인택은 1년 임대 방식으로 포르투갈의 에스토릴 프라이아에 합류했다.

1998년생인 조규성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모두 2001년 이후 출생자다. 권혁규가 2001년생, 양현준과 이한범은 2002년생, 황인택과 배준호는 2003년생이다. 2004년 12월생인 김지수는 만 18세에 불과하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선수가 주를 이룬다. 조규성 외에 유럽으로 가기 전 A대표팀에 선발된 경력을 가진 선수는 양현준뿐이다. 가능성과 잠재력에 초점을 맞춘 이적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특이점은 포지션의 다양화다. 과거에는 측면 포지션의 비중이 높았다. 특유의 근면성과 기동력 혹은 특출난 스피드와 양발 사용 능력에 비교적 높은 평가가 이뤄졌다. 그에 비하면 이제는 한국 선수들이 유럽 무대에서 경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느껴졌던 포지션으로 다각화되고 있다. 김지수와 이한범은 전형적인 센터백이고, 황인택은 중앙과 측면을 두루 소화하는 멀티 수비수다. 권혁규는 중앙 미드필더, 배준호는 공격형 미드필더와 측면 미드필더를 모두 소화한다. 양현준 정도가 과거부터 유럽에서 선호하던 빠른 돌파에 양발을 이용하는 측면 공격수다.

브렌트포드 FC 김지수. ⓒ연합뉴스
브렌트포드 FC 김지수. ⓒ연합뉴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우선 유럽의 인식 제고다. 아시아 선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최근 들어 한국과 일본이 남미와 아프리카를 대체하는 선수 수급 시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대표되는 남미의 특급 유망주들은 몸값이 상당히 올랐기 때문이다. 10대 중후반의 어린 선수에게 300억원 이상의 가치가 부여된다.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도 새로운 선수 영입 경쟁자로 등장했다. 지리적·문화적으로 가까운 데다 성장세가 두드러지는 무대다. 아프리카 유망주들은 입도선매 방식으로 일찍이 진로가 정해지는 편이다. 어린 나이에 유럽 빅클럽과 연계된 현지 아카데미에서 성장하는 경우다. 빅클럽의 자본력에 밀린 나머지 클럽들이 찾은 틈새시장이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과 일본이다.

한국과 일본 선수들에 대한 평가는 ‘아직 시장가치가 낮지만 양질의 시스템에서 잘 교육된 선수들’로 요약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이 시스템을 믿지 못해 아시아 선수의 경우 10대 초반에 데려가 자신들의 시스템 안에서 육성하는 방식도 택했다. FC 바르셀로나의 유스 시스템인 라마시아에서 성장한 백승호, 이승우, 장결희 3인방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FIFA)이 무분별한 저인망식 유망주 영입에 제동을 걸었다. 바르셀로나는 중징계를 받았고 미성년 선수 영입과 육성 기조도 수그러들었다.

셀틱 FC의 양현준. ⓒ연합뉴스
셀틱 FC의 양현준. ⓒ연합뉴스

한국과 일본은 육성 시스템의 중요성을 오래전부터 인식했다. 서로 경쟁하듯 수정과 발전을 이어온 덕에 유럽이 신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게다가 양국에서 배출한 선수들이 유럽 최상위 레벨에서 장시간 주전 선수로 활약할 수 있다는 걸 최근 증명하고 있다. 한국은 손흥민(토트넘),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재성(마인츠), 황희찬(울버햄프턴), 이강인(파리 생제르맹)이 대표적이고 일본은 미토마 가오루(브라이튼), 엔도 와타루(리버풀), 가마다 다이치(라치오), 도미야스 다케히로(아스널), 구보 다케후사(레알 소시에다드) 등이 있다. 특히 손흥민의 경우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실력자다. 올 시즌은 주장으로 팀을 아우르는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 김민재도 유럽 진출 2년 만에 빅클럽에 입성했다. 페네르바체, 나폴리를 거쳐 아시아 선수 역대 최고 이적료(약 710억원)를 기록했다. 아시아의 원석을 유럽으로 가져와 세공을 잘 하면 그 가치를 10배, 20배 이상으로 키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시장과 선수·에이전트 인식이 달라졌다

이렇게 되면서 유럽 구단들의 스카우팅 방식 자체도 변했다. 과거에는 A매치 출전 횟수나 월드컵에서의 활약 같은 단기 임팩트가 일종의 보증수표였다. 이제는 선수의 성장을 장기간에 걸쳐 관찰한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스타일과 장점을 지닌 선수를 발견한 뒤 내밀하게 들여다본다. 아시아 전담 부서를 두고, 1년에 수차례 한국과 일본으로 파견한다. 에이전시와 협약을 맺고 아예 상주하는 스카우트 인력을 계약하는 클럽도 있다.

셀틱과 브렌트포드, 미트윌란은 특히 한국 시장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스카우트 시스템을 바꾼 혁명으로 화제를 모은 팀들이기도 하다. 아시아 전략을 선도하는 팀은 셀틱이다. 지금은 토트넘 사령탑이 된 엔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셀틱에 부임할 당시 일본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성공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으로 일본 J리그 클럽을 맡은 이력이 있다. 아시아 선수들의 경쟁력을 편견 없이 평가하게 된 배경이다. 일본 선수들로 성공한 후에는 한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셀틱은 지난겨울 오현규에 이어 올여름 양현준과 권혁규를 데려가 한국인 트리오를 구성했다. 브렌트포드와 미트윌란은 같은 구단주를 둔 형제 구단이다. 구단주인 매슈 벤엄은 프로 갬블러 출신이다. 스포츠 분석 회사를 운영한 만큼 치밀한 조사와 정량 분석, 데이터 기반의 보고서를 신뢰하는 인물이다. 7~8년씩 장시간에 걸쳐 지역 유망주를 키우는 기존 유럽식 유스 시스템을 폐기했다. 들이는 시간과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진다는 판단이었다. 대신 10대 후반 유망주를 전 세계에서 데려와 B팀에서 집중적으로 키우는 미국 메이저리그식 팀 운영을 택했다.

이면에는 유럽 축구 시장의 달라진 분위기도 있다. 축구 산업이 성장하면서 인건비도 급상승했다. 10대 후반 선수들의 몸값이 수백억을 넘어 1000억원을 호가한다. 자연스럽게 자금력이 강한 빅클럽이 더 강해지는 판이다. 아시아 선수의 잠재력은 중소 클럽에 매력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과거에는 아시아 선수 영입에 20억원 이상의 투자를 주저하던 팀들이 이제는 영건 확보에 30억원 내외의 금액을 적극적으로 쓴다. 때마침 영국 노동부가 이런 흐름에 발맞추고 있다. 지난 6월부터 워크퍼밋(취업비자) 발급 기준을 완화했다. A매치 출전 횟수가 전무하다시피 한 김지수·배준호가 잉글랜드 무대로 갈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다.

셀틱 FC의 권혁규. ⓒ연합뉴스
셀틱 FC의 권혁규. ⓒ연합뉴스

국내 선수들의 인식도 변화했다. 박지성, 손흥민 등의 활약을 지켜보고 자란 10대 선수들은 유럽 진출이라는 확고한 목표와 야망을 갖고 체계적으로 준비한다. 10대 시절부터 사비를 들여 전문적인 피지컬 훈련을 진행할 정도다. 자기 관리 측면에서 이미 프로 수준에 도달한 유망주가 많다. 유럽행에 가장 큰 장벽인 병역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흐름이다. 오현규와 권혁규는 스무 살이 되기 전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입대했다. 병역을 수행하는 동시에 꾸준한 출전으로 기량을 쌓았다. 과거에는 주로 입대 제한 연령(신청 기준 만 27세)을 다 채우거나,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통해 해결하려는 분위기였다.

유럽에서나 익숙하던 바이아웃 조항 삽입도 유럽 진출을 위한 목적이 강하다. 10대 유망주들이 K리그 구단에 입단할 때 일정 조건의 금액을 제시하는 팀이 나오면 이적을 허가받아 자연스럽게 유럽으로 가려는 것이다. 실제로 올여름 김지수와 이한범이 이 제도를 활용해 유럽으로 나갔다. 이적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에이전트들의 인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유럽보다 2~3배 이적료를 제시하는 중국이나 중동으로 보내 거액의 수수료를 받는 방식을 선호하는 에이전트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등장하고 있는 젊은 에이전트들은 동반 성장을 강조한다. 3~4년 뒤 선수의 가치가 더 높아져 빅클럽으로 갈 경우 쥘 수 있는 수수료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김민재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면서 발생한 에이전트 수수료만 210억원에 달한다. 눈앞의 목돈이 아닌 미래 가치에 주목하는 인식이 선수와 에이전트 사이 공감대를 이루는 흐름이다. 유럽으로 도전하는 선수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기자명 배진경(<온사이드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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