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9일 100엔당 엔화 환율이 897.49원을 기록하며 8년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연합뉴스
6월19일 100엔당 엔화 환율이 897.49원을 기록하며 8년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연합뉴스

지난 6월19일, 8년 만에 기록적인 엔저 현상이 발생했다. 지난 4월 말 100엔당 1000원 이상을 기록하던 엔화 환율이 6월19일 100엔당 897.49원으로 떨어졌다. (서울외국환중개 고시 기준) 원·엔 환율이 900원 아래로 떨어진 것은 2015년 6월 이후 8년 만의 일이다.

엔화 환율 하락 소식에 사람들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외환도 일종의 상품이기에, ‘엔화’라는 상품의 가격이 하락하자 자연스레 수요가 늘었다. 일본 여행을 앞둔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엔화를 미리 비축할 수 있었다. 투자 목적으로 엔화를 매입하는 사람도 늘었다. 환차익을 목적으로 엔화 예금을 늘리거나, 최근 상승 중인 일본 증시에 투자하려는 수요가 커졌다. 한국은행이 6월23일 발표한 ‘2023년 5월 거주자외화예금 동향’에 따르면, 5월 한 달 동안 엔화 예금이 9억3000만 달러 증가했다. 4월 말 대비 17.5% 늘어난 수치였다.

환율은 두 나라 통화의 상대적 가치를 반영하는 지표다. 따라서 엔화 환율 하락은 곧 외환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원화의 가치가 상승하고, 엔화의 가치가 하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국제 거래에서 ‘가치’의 기준으로 통용되는 달러와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림 1〉은 1달러를 구입하기 위해 원화와 엔화를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를 나타낸 그래프다. 원·엔화의 가치가 하락하면 그래프는 우상향한다. 1달러를 사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원·엔화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원화 가치가 내리면, 달러를 사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원화가 많아진다. 즉, 원화로 표시한 달러의 가격이 올라간다. 반대로 우하향하는 그래프는 원화나 엔화의 가치가 상승해 더 적은 원·엔화로도 달러를 구매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1년간 달러 대비 원화와 엔화의 환율을 살펴보면, 올해 5월 들어 두 통화가 반대 행보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엔·달러 환율을 나타내는 파란색 그래프는 우상향했고, 원·달러 환율을 나타내는 주황색 그래프는 우하향했다. 달러에 비해 엔화 가치는 하락한 반면 원화 가치는 상승한 것이다. ‘상대적 가치’ 측면에서 보면, 엔화에 비해 원화 가치가 급격히 상승했다. 따라서 엔화를 사기 위해 지불해야 할 원화의 양이 줄어들었고, 기록적 엔저 현상이 발생했다.

엔화와 원화는 왜 정반대 움직임을 보였을까. 5월 들어 원화 가치가 상승한 주요 배경으로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가 일제히 상승하며 외국인의 한국 주식투자가 늘어난 점이 꼽힌다. 지난 5월 외국인 투자자의 한국 주식 순매수 규모는 4조3000억원 수준으로, 4월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외국인이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를 하기 위해선 원화를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원화 수요가 커져 그 가치가 상승하는 결과를 낳는다.

일본 역시 최근 주가가 상승하며 외국인 투자자금이 유입된 점에선 한국과 비슷했다. 그러나 엔화 가치 하락은 그보다 더 근본적 원인 때문에 발생했다. 바로 ‘수익률곡선 통제(YCC:Yield Curve Control)’라고 불리는 일본의 제로금리 정책이다.

장기 경기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일본은 2016년 YCC라는 파격적인 통화정책을 도입했다. YCC 정책으로 일본은 10년 만기 국채의 금리를 0% 수준으로 유지했다. 국가에 돈을 10년간 빌려줘도 이자를 한 푼도 받지 못한다는 소리다. 국채금리는 해당국 금융시장에서 통용되는 여러 금리의 가장 밑바닥을 형성한다. 국채금리가 오르면 다른 금리들도 오르고, 국채금리가 떨어지면 다른 금리도 떨어진다. 따라서 이자를 거의 받지 못하는 엔화의 매력도는 떨어졌고, 그에 따라 엔화 수요가 감소하며 가치가 하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지난 6월 금리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결정이 엇갈리며 엔화 가치는 더욱 하락했다. 6월 이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와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시장에서 각기 다른 기대를 받고 있었다. 연준에 대해선 기준금리 인상을 멈추고 몇 달 뒤엔 인하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관측이 나오고 있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지속적으로 완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연준이 불황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준금리 인상을 지속적으로 강행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반면 일본에선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은행은 YCC를 완화해서(즉, 국채금리가 0%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허용해서), 여러 엔화 금리들을 높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두 중앙은행이 내린 결정은 시장의 기대와 달랐다. 연준은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도 ‘앞으로 올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은행은 ‘아직 YCC 정책을 완화할 시기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미국은 고금리 정책을, 일본은 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며 엔화 가치는 더욱 하락했다. 금리가 높은 미국에 비해, 금리가 낮은 일본에 투자할 유인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엔저 현상, 일본도 반기지만은 않아

엔화 가치가 꾸준히 하락하자 일본의 고심은 깊어졌다. 엔화 가치 하락이 일본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국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수출에 도움이 된다. 예컨대 엔화 가치가 떨어져 1달러당 환율이 100엔에서 120엔으로 상승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일본산 상품의 가격이 600엔이라면, 과거에는 이 상품을 6달러에 판매했어야 한다. 그러나 달러당 엔 환율이 120엔으로 오른 덕에 현재는 동일한 상품을 5달러에 팔아도 된다. 달러로 표시한 상품의 가격이 낮아진 만큼, 외국에서 이 상품의 수요가 증가해 수출이 늘어난다. 반면 수입물가는 상승한다. 동일한 환율 변화를 가정할 때, 5달러 가격의 제품을 외국에서 사오는 데 예전에는 500엔이면 됐지만 이제는 600엔을 지불해야 한다.

엔저를 바라보는 일본의 심경이 불편한 까닭은 ‘수출 증가’로 인한 이득보다 ‘수입물가 상승’에 따른 손해가 크기 때문이다. 국가 경제에서 내수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일본은 수출 증가에 따른 이점이 제한적이다. 실제로 달러 대비 엔저 현상이 심해진 지난해 2월 이후, 일본의 무역수지(수출액과 수입액 차이) 적자는 오히려 확대되었다(〈그림 2〉 참조). 특히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엔저 현상이 맞물리며 수입물가 상승의 충격이 더욱 심해졌다. 6월26일 일본 재무성 간다 마사토 재무관이 “과도한 환율 움직임에 대해선 적절히 대응하겠다. 어떤 옵션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라며 엔저 현상에 경계심을 나타낸 이유다.

엔저 현상이 문제라면, 그 근본 원인인 YCC 정책을 완화하면 되는 일 아닐까? 일본 역시 YCC 정책의 부작용을 모르지 않지만, 일본의 만성적인 저물가 현상이 정책 완화를 망설이게 한다. 물가가 낮은 것은 언뜻 좋은 일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진 않다. 낮은 물가가 수요 부족으로 인한 경기침체를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계와 기업의 입장에선, 시간이 지나도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 지금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소비와 투자를 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따라서 일본은 경기침체가 시작된 이래로 ‘저물가와의 전쟁’을 벌여왔다. YCC 정책을 시작하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 역시 저물가를 타개해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금리를 낮춰 적정 수준의 물가상승과 소비·투자 활성화 사이 선순환이 이어지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2022년 4월 이후 일본의 물가상승률은 목표치인 2%를 웃돌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행은 여전히 저물가 현상을 경계한다. 현재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시적일 수 있으며, 당장 YCC 정책을 완화했다가는 오랜만에 잡은 저물가 탈출의 기회를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현재의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일 수 있다고 일본은행이 우려하는 이유는 임금인상 추세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금인상은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임금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물가가 상승하면 실질임금이 하락하기에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한다. 임금이 인상된다면 기업은 비용 상승을 만회하기 위해 상품 가격을 올린다. 그 결과로 다시 물가상승이 발생하며, 임금인상과 물가상승이 서로를 지탱해 일정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유지한다.

YCC 완화는 아직 이르다는 일본은행

일본은행은 ‘서비스 물가’ 지표를 임금인상의 징후로 바라본다. 서비스 산업은 재화(물리적 상품)를 생산하지 않으므로,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이 비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원자재 가격·물류비 등이 상승하면 발맞춰 올라가는 재화 가격과 달리, 서비스 물가는 임금이 상승해야 올라간다. 그런데 지난해 4월 이후 인플레이션이 2%를 상회할 때에도 서비스 물가는 마이너스 수치를 기록했다(〈그림 3〉 참조).

서비스 물가가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재화 물가만 올라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임금이 인상되었다기보다 원자재, 중간재, 기계 등 다른 생산요소의 가격이 올랐기 때문에 평균 2% 이상 인플레이션이 달성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임금인상이 변변치 않은 상태에서 이후 원자재·중간재 등의 가격이 내려간다면 일본은 다시 저물가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우려한 일본은행은 지난 6월 통화정책회의에서 “임금상승이 서비스 물가로 전이된 것이 소비자 물가 상승의 주된 원인이 되지 못했다. 비용 상승 요인이 아닌 임금상승에 따른 물가상승이 필수적이다”라는 방침을 밝혔다.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견되는 엔저 현상은 한국 입장에서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경쟁자 일본의 수출경쟁력이 엔저로 인해 상승한다면 그만큼 우리 수출이 불리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한국경제연구원(KERI)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 1분기부터 2022년 3분기 사이 엔·달러 환율 상승률이 1%포인트 상승하면 한국의 수출 금액 증가율은 0.61%포인트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자동차·선박·철강제품 등 한국의 주 수출품이 일본과 경쟁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엔저 현상은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이제 시장은 다시 일본은행의 결정을 주목하고 있다. 올해 춘계 노사협상에서 일본 주요 기업들의 임금인상률이 3.91%를 기록해 31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달성하고, 서비스 물가가 상승하는 등 YCC 정책 완화의 선결조건이 점차 갖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해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추가적으로 올리면 엔저 현상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올 하반기까지 일본의 임금과 서비스 물가가 상승하는 동시에 증시, 성장률 등에서도 괜찮은 지표가 나타나 경제 부활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다면 일본은행도 YCC를 완화할 명분이 생긴다. 한국에도 영향이 적지 않을,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기자명 주하은 기자 다른기사 보기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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