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고은별, 해리엇 초이, 경지은, 최예나, 김보은씨. ⓒ시사IN 이명익

관객 한 명이 일어서더니 공연장을 나갔다. 6월17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연 행사에서 ‘기후가 웃기니?’라는 주제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던 중이었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크루인 '블러디 퍼니' 멤버들(왼쪽 위부터 고은별(35), 해리엇 초이(37), 경지은(32), 최예나(31), 김보은(38))씨는 놀라지 않았다. “꼭 무료 공연일 때만! 유료 공연일 때는 안 나가요(김보은).” “남자분이었는데···(경지은).” “저희는 정말 성별을 구분하지 않거든요. 공연을 봐주시면 다 감사하죠(해리엇 초이).” “그런데 그분들이 구분을 짓고 나가시더라고요(최예나).” “아니면 맨 앞줄에 팔짱 딱 끼고 앉아 계시거나(고은별).”

여성들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성별만 주제로 삼는 건 아니다. 각자의 직업 혹은 직장, 종교, 정치, 권력, 가족까지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전 이거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회사 일로 분노하다가도 ‘무대에서 써먹어야지’ 싶어요(해리엇 초이).” “얼마 전 예나가 되게 힘들어했는데 다들 오히려 부러워했어요. ‘뭐 더 힘든 거 없어? 더, 더 짜내봐’, 그러다 보면 웃고(김보은).”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는 이들의 삶을 훨씬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었다.

한 명씩 꾸준히 늘어난 멤버는 이제 일곱 명이다(최성희(34), 최정윤(37) 포함). 2019년 1월 첫 공연을 보러 왔다가 객석에서 무대로 합류한 고은별씨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어제도 공연 끝나고 젊은 여성분이 오셔서 자기도 대본을 써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이제는 같이하고 싶다는 분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지만 그때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타이밍이 좋았어요.”

그러나 여전히 남성 코미디언이 출연하는 공연이나 프로그램보다 성장세가 더디다. 여성 코미디언이 활동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편하게 신상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남성 코미디언들은 ‘된장녀’나 ‘김 여사’를 소재로 하는 농담을 해도 괜찮지만, 저는 ‘한남’이라는 단어만 써도 정말 온갖 협박을 받거든요(김보은).” 공연 도중 박장대소가 터진 부분을 릴스나 쇼츠로 올려 홍보하는 건 고사하고 동영상 자체를 찍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이유다. 한때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목소리만 나오는 팟캐스트를 만들기도 했지만,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졌던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는 제작을 잠시 중단했다.

악플, 협박 심지어 저주까지 받으면서도 이들이 무대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는 거, 그게 그냥 좋아요(고은별).” “지난번 백상예술대상 예능작품상을 ‘피식대학’이 받았잖아요? 이제 저희가 받아야죠(해리엇 초이).” “제 사주를 보면 60대가 전성기라고 나오거든요(김보은).”

이들의 다음 무대는 7월 초에 열리는 ‘오픈 마이크’다. 누구나 와서 5분 동안 마이크를 잡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할 수 있다. 물론 블러디 퍼니 멤버들도 무대에 오른다. “저희는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욕하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래도 웃겨요. 웃길 수 있어요(해리엇 초이).” 이제는 깔끔한 농담의 시대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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